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71화 (71/203)

71화

“이반 님, 괜찮으세요?”

“…….”

“지금 침이 흐르고 있거든요. 빨리 닦지 않으시면…….”

앞으로 다가온 로제는 손수건을 꺼내 나의 입가로 내밀었다.

고급스런 원단과 레이스.

짙고 화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날아가는 정신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

멈춰 버린 나의 사고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이참…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작고 고운 로제의 손이 입 언저리를 건드렸다.

손수건을 든 로제의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새털처럼 부드럽게 나의 입술을 눌러 왔다.

“이 느낌 뭐지?! 너무 좋잖아! 이래서 키스를 하는 건가?!”

그렇게 로제의 버릇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속마음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버리는 그거 말이다.

“그나저나 눈 좀 감아 주실래요? 그렇게 바라보시니까 확 깨물어 버리고 싶… 아니, 입술 정도라면 허락해 줄 수… 꺄악! 미쳤나 봐, 부끄러워!”

로제는 내적 갈등을 뿜어내며 또 다른 자아와 격하게 사투를 벌였다.

저 모습이 무서운 건 나 하나뿐인 걸까.

순간 소리 없이 다가온 검은 그림자 하나가 로제의 뒤로 다가섰다.

“아가씨,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일찍 자러 갈까요?”

“왜? 나 아직 괜찮은데?”

“아니요. 엄청 피곤해 보이세요. 당장 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요.”

때마침 들어온 도로시는 로제의 팔을 붙잡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

작은 석조 건물 내부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뜬금없는 부족장의 말에 나의 머리는 생각을 멈춘 듯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륙 역사상 최강의 남자가 나의 아버지가 될 판이었다.

버거웠다.

이어지는 정보들은 풀리지 않고 더 크고 무겁게 쌓이기만 했다.

사실 아이작의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빅터와 그가 직접 마주했다는 증거는 없었으니까.

사생결단을 내건.

그대로 잊고 살아가던.

일단 빅터와 만나기만 한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그레이시까지 만난다면 더욱 완벽해질 터.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의 진실은 일단 뒤로 미뤄 놓았었다.

그랬는데.

[진, 그리고 미리암. 우리 사랑 영원히.]

침상 옆에 휘갈긴 이 낙서는 나의 인내심을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드러나는 모든 단서엔 빅터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었다.

조급해졌다.

당장 달려가 그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28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은 누구의 편이었는지.

무기를 맞대는 한이 있더라도 솔직한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젠장…….’

단서는 점점 늘어나는데 마지막 조각은 다른 사람의 손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끝없는 상상을 짓누르는 것뿐.

“한참 고민이 많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런 나를 향해 부족장은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걱정과 고민이 많을 땐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라고.”

“…….”

“그 외의 생각은 자신을 괴롭히는 학대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

“그러니 그대도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라. 며칠 사이 그대는 너무 많은 생각에 쌓여 있었다.”

낮게 깔려 오는 부족장의 말에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작게 주억거리며 부족장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려던 순간.

“동명이인에 대한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깊게 숙인 나의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을 가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고, 지친 나의 시선은 좁은 방을 가로질렀다.

별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별은 느리게 눈을 뜨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똑같은 세속인들의 이름을 나는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럴 확률이 더욱 클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생각을 했었지만 얼마 안 가 바로 접어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공통된 사연, 즉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과 어머니 미리암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집 주인인 진은 황제에게 원통한 죽임을 당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에게 쫓기다 치명상을 입고 사망에 이르렀다.

물론 마지막은 나 때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상황은 작위적일 만큼 맞아떨어졌다.

벽에 적힌 미리암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다는 나의 아버지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인된 두 사람의 정보만 따로 모아 붙이면 이들의 사연은 완벽해진다.

그 모든 걸 확정 지을 만한 마지막 증거.

“대륙 최강의 핏줄이라니… 그대가 강했던 건 유전이었군.”

확정 짓듯 말하는 부족장의 얘기처럼, 진과 나는 신기할 만큼 같은 행보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유일무이한 남자.

몸뚱어리 하나로 천하를 움켜쥔 그의 싸움을, 다음 세대인 내가 그대로 이어 가고 있었다.

“그대는 이제 할 만큼 했다. 이제 남은 건 그대의 스승을 만나서 확인하는 것일 터, 그러니 이제 마음을 놓는 게 어떻겠는가.”

“나도 부족장의 말에 동의한다. 지금은 이곳에 온 이유에만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고뭉치 같은 녀석들이지만, 이번엔 이들의 말이 옳았다.

더 이상 고민해 봐야 나의 심력만 낭비될 뿐.

가방을 뒤적거린 나는 작은 꾸러미를 꺼내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뭐에 쓰는 물건인가?”

다가온 부족장이 기웃거리며 질문했다.

“위치 추적.”

“위치를 추적한다라… 무엇을 추적한다는 말인가?”

“스승님.”

간단히 대답한 나는 손에 든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쳤다.

“그것은 지도 아닌가.”

“맞아. 하지만 보통 지도는 아니지.”

이 물건의 정체는 베르에게 받은 마법 도구였다.

리베를 떠나기 전날.

― 소유한 사람의 위치를 알려 주는 마법 도구입니다.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세요.

짐을 정리하는 나에게 베르는 작은 꾸러미를 넘겨줬다.

― 세상에 딱 한 세트뿐인 물건입니다. 후배님과 저만 가지고 있는 귀한 마도구죠. 하하하하!

그 귀한 마법 도구가 이제 자신의 역할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니, 그걸 왜 찢는 건가?”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사용법을 떠올린 나는 지도 모서리를 찢어 조각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불이 붙은 지도 조각이 순식간에 타올랐고.

딸랑―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펼쳐 놓은 지도 위로 녹색 표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승님과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똑같은 표시가 생기는 거지.”

“오… 그것참 신기하군. 그럼 그 표시가 그대의 스승이 있는 곳인가?”

“아니, 이건 우리가 있는 자리야.”

기능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저희의 위치가 궁금할 때 조각을 태우세요. 그럼 바로 위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신호를 보냈으니 이제 베르도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던 신호는 오지 않았고, 애꿎은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슬슬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신호를 보낼까 망설이던 그때.

딸랑―

종소리가 울리며 파란색 표시가 지도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저기에 가 있는 거지?’

파랗게 표시된 지역은 다름 아닌 대수림.

치료사를 찾아 떠나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위치였다.

게다가 거리상으로도 그리 멀지 않아서, 어림잡아 이틀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에 와 있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딸랑―

“오… 이번엔 색깔이 바뀌고 있다.”

부족장의 말처럼 지도에 표시된 파란색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 같은 자리에서 두 번 신호를 보내면 색상이 바뀌게 됩니다. 한자리에 오래 머물게 될 경우에만 사용해 주세요.

빅터의 일행이 그곳에 있을 거란 얘기였다.

‘차라리 잘됐네.’

에르텔을 찾은 뒤 바로 이동하면 원하는 결과에 더욱 빨리 도달하게 된다.

뭐 하는 곳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음 목적지는 보라색으로 변한 저곳으로 결정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경쾌한 로제의 아침 인사에 무거운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족장과 술은 오전 훈련을 하고 있었고, 술은 큰 냄비를 들고 도로시와 함께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 좋은데 주방이 안에 없는 게 흠이네요.”

가벼운 푸념을 내뱉은 도로시는 그릇을 들어 걸쭉한 수프를 옮겨 담았다.

“자이언트 랜드 크랩 수프에요. 녀석의 깊은 맛을 느끼기엔 수프만 한 게 없죠. 어제 저녁하고는 또 다를 겁니다.”

도로시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바쁘게 음식을 퍼 담았다.

반박할 수 없었다.

어제 먹었던 화덕 구이는 도로시의 게살 집착을 완벽하게 납득시켰다.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과 폭발하는 감칠맛의 향연.

며칠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었다.

“아침 식사하세요!”

낭랑한 도로시의 외침에 일행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고.

“크어어…….”

“캬아!”

“후아아…….”

“흐음…….”

“커어어어어!”

첫 수저를 뜬 우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동을 표현했다.

한마디로 미친 맛.

“한 그릇 더!”

“나도!”

“여기도!”

“내거 먼저!”

“하… 이러면 살찌는데.”

그렇게 우리는 정신없이 바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식사도 기분 좋게 마쳤겠다.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마을 수색에 나섰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찾아야 할 목표가 에르텔이라는 건 알겠다.

잘 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생긴 거죠?”

“아 그게… 저도 잘……. 엄청난 마력을 품은 광물이라고…….”

생김새도 모르는 우리들은 파편 같은 정보에 의지한 채 무작정 마을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얘기했듯, 빅터와 이곳을 왔을 때 나는 그 어떤 광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특이한 것을 말하자면 바로 저것.

“여기 수상한 반응이 있다!”

별의 탐지봉이 가리키는 투박한 결계석이 전부였다.

“그건 아니야.”

기대에 찬 시선들을 뒤로 하고 나는 냉정하게 사실을 고했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몬스터의 침입을 막아 주는 돌이야. 마계의 입구를 봉인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돌이지.”

나는 결계석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호오, 그거 신통하군.”

호기심 어린 별의 시선이 결계석을 살피기 시작했고, 뒤늦게 도착한 로제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마계요? 마계가 진짜 있어요?”

“네.”

“세상에… 그런 건 지크의 영웅담에 나오는 옛날 얘기 같은 거잖아요.”

역시나 로제의 반응도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결계석으로 다가간 나는 금이 간 부분을 뜯어 한 번 더 반으로 잘랐다.

날카로운 면을 적당히 다듬은 뒤.

“번거롭겠지만 이걸 품에 지니고 다니세요. 몬스터가 싫어한다니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로제와 도로시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 이렇게 챙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잘 간직할게요.”

로제는 화사한 미소로 답하며 수색을 이어 갔다.

찾았던 곳을 또 들어가 열고, 뒤집고, 헤집으며 온 마을을 탈탈 털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지나 한낮이 넘어갔다.

“에르텔이 여기 있는 게 확실한가요?”

수색을 멈춘 나는 로제에게 정보의 신뢰성을 되물었다.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르텔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고 들었어요.”

돌아온 로제의 대답은 살짝 결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영 잘못된 접근도 아니었다.

“그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이곳은 마족과 싸우기 위한 전초기지였으니까요.”

에르텔을 다루던 사람이 모여 있었다면 그에 대한 정보도 가장 많을 터였다.

다만,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갔을 뿐.

“전초기지의 역할이 끝난 순간 어디론가 옮겨진 건 아닐까요?”

머쓱해하는 로제에게 솔직한 생각을 얘기했다.

애초에 이곳은 주거를 위한 마을이 아니었으니까.

목적을 이뤘으니 철수하는 과정에서 따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른다.

“음, 그랬겠네요. 바보 같이… 그런 귀한 물건을 두고 갔을 리가 없었을 텐데.”

“실망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활동했던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요.”

풀죽은 로제를 위로하며 나는 빅터를 떠올렸다.

어머니와 이어진.

게다가 로제가 찾고 있는 에르텔의 행방까지.

이제 멀지 않았다.

고작 이틀 거리에 있으니까.

이동을 결정한 나는 표시된 지역을 향해 분주히 걸음을 내딛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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