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70화 (70/203)

70화

책상 가득 놓인 각종 보고서를 보며, 사마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싶을 만큼, 계획하고 준비했던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갔다.

“이번 달 강화 인간 실적은 눈에 띠게 좋아졌군.”

“말씀하신 부작용 부분에 대해 다방면의 개선이 있었습니다. 특히 자의식 억제력이 높아지면서 강화 성공률은 90%에 육박한 상황입니다.”

“좋은 소식이군. 다음 달부터 지원자들을 대폭 늘려 보게.”

“네. 용병 조합을 중심으로 성장이 멈춘 자들을 적극적으로 섭외하겠습니다.”

지시를 옮겨 적는 부관을 보며 사마르는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때가 무르익어 간다.

인고의 시간을 바쳐 기다려 온 계획이 이제 비상의 시기를 앞두고 있었다.

끝없이 성장하는 고강한 기사들과 위대한 마법사들.

그런 인재들이 아낌없는 충성을 바치면 어떻게 될까.

강화 인간 계획은 그러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었다.

― 사마르 님, 언제까지 브라함 흑마탑의 눈치만 살피실 겁니까.

협력자이자 경쟁관계인 로이드를 이기기 위함이었다.

의식을 주관하는 로이드는 모든 면에서 사마르를 압도했다.

흑마법의 지식은 물론이요. 특별한 이능력자를 발견하며 주위에 거느렸다.

그런 로이드가 부러웠고, 미치도록 넘어서고 싶었다.

하나 10년 전 시작된 첫 실험은 참담했다.

실험 대상자는 모두가 사망했고, 유의미한 결과는 전무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또다시 1년이 지나갔다.

기적처럼 생존한 실험자가 6개월을 버티다 죽었다.

그 다음은 1년.

그리고 그 다음은 1년 반을 살다 죽었다.

그게 전부였다.

강화 인간 실험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브라함 흑마탑을 도우며 지리멸렬한 시간을 이어 갔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일 뿐, 애초에 로이드와 자신은 바라보는 세상이 달랐다.

끔찍한 동상이몽이었다.

로이드와 사마르는 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 다른 목표로 향했다.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했던 그때.

― 강해질 수만 있다면 목숨도 바치겠다.

독기 가득한 카리프를 만나며 계획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실험은 성공을 거듭했고, 몰락한 검술 가문의 장남은 재능 없는 둔재에서 7성의 괴물로 재탄생됐다.

하지만 아름다운 보석에도 티는 있는 법.

“카리프는 여전히 제어가 되지 않는 건가?”

“네. 첫 각성 당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방식보단 허점이 많을 시기다 보니…….”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카리프는 알고 보니 반쪽짜리였다.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사실상 실패작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자아가 있는 전투 인형이라니.

생각이 많은 개는 사냥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대로 키워 봐야 언젠가 주인 손만 물어 댈 터.

“그 녀석은?”

사마르는 얼마 전에 치른 의식의 주인공을 찾았다.

녀석이야 말로 진정한 전투 인형.

앞으로 탄생할 강화 인간 부대는 녀석을 위한 체스 말에 지나지 않았다.

태생 자체가 다르니까.

강화 인간은 인간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것이고, 의식의 결과물인 녀석은 세상에 없는 이능력을 가지고 나타나 것이다.

흠이라면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것.

사마르의 목표는 강화 인간으로 부대를 만들고 능력자들이 그들을 이끄는 것이었다.

“38호는 지금 대수림에 가 있습니다. 이제 복귀할 날짜가 다됐으니, 이번 주 안에 돌아올 것입니다.”

“벌써 실전 훈련인가?”

“네. 요즘 용병들 사냥하는 데 재미를 붙여서 자꾸 나가려고 합니다.”

“흠, 너무 이목을 끌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복귀하는 대로 보고하게.”

지시를 마친 사마르는 턱 끝을 매만지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능력자를 곁에 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였던가.

빅터에게 단서를 흘려 브라함 흑마탑을 압박했고, 빅터 크로제는 킁킁거리며 주위를 얼쩡거렸다.

작전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견디다 못한 브라함 흑마탑은 젓줄과 다름없던 에르텔을 이곳으로 넘겼다.

그 결과 등장한 이가 38호.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38번째 의식의 결과가 바로 녀석이었다.

“그럼 카리프는 어떻게 할까요?”

“당장은 손쓸 방법이 없잖은가. 지금은 그냥 즐기도록 놔두게. 나중에 38호의 사냥감으로 쓰면 될 테니까.”

사마르는 감정 없는 말투로 하명했다.

꿈꾸던 목표까지 이제 한 걸음.

“28년을 참았으면 됐지.”

이제 길을 막은 대가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 * *

오래간만에 마주한 마을의 풍경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넝쿨에 가려진 낮은 가옥과 이끼 가득한 석벽도 그대로였고, 마을 가운데 우뚝 선 탑도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오로지 내 모습뿐.

하찮았던 그때의 나는 번듯한 모습이 되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

빅터의 모습을 떠올리며 석탑의 거친 면을 보듬었다.

의미는 없다.

그냥 분위기 타서 그런 거니까.

석탑을 바라보던 빅터의 모습이 나에겐 꽤나 신비롭고 멋지게 보였나 보다.

세상을 구한 8인의 영웅.

그리고 사라져 버린 진실.

그 모든 시대를 관통한 빅터에게서 나는 동경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었다.

―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그날.

빅터가 던진 그 한마디에 나의 가슴은 진동했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최강자들.

신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기대했다.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언젠간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거라고.

전설의 8인과 견줄 만큼, 나는 강해질 거라고.

“…….”

지금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와아… 이런 곳이 숨어 있었군요.”

보잘 것 없는 나의 상념은 로제의 탄성과 함께 흩어졌다.

뒤를 이어 별이 모습을 드러냈고.

“…신비로운 기운이다.”

감탄스런 얼굴로 비밀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부터 찾아봅시다. 이 주위는 위험하니까요.”

두리번대는 사람들을 모아 낮은 석조 건물로 향했다.

이런 걸 본능이라고 하나.

“여기는 벽에 구멍이 났는데요. 다른 집으로 가 보죠.”

생각 없이 들어온 집은 빅터와 머물렀던 그 남자의 집이었다.

8인의 영웅이라던 그 남자.

심지어 그중 최강이라는 진이라는 남자의 집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예전에 여기서 스승님이과 머물렀었거든요.”

뻥 뚫린 벽을 바라보며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잠꼬대로 부셨다고 하면 믿어 주려나.

덕분에 그날 나는 다양한 등급의 오러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때는 5성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7성의 적에게도 겁 없이 도전한다.

내가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터.

“여기 집터가 좋다니까 그냥 짐 풀죠.”

시시한 농담을 던지며 먼지 쌓인 책상에 기대앉았다.

모두가 그러려니 넘겼지만, 한 사람만은 진지했다.

풍수사의 혈족인 별은 집터라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흠, 확인해 볼까?”

가방을 열어 뒤적거리더니, 용맥 탐지봉을 꺼내 탐색을 시작했다.

특별한 게 있을라나?

마을 중앙으로 나가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결계석이라는 것도 있고, 로제가 말한 에르텔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집은 깨끗하군. 하지만 집 바깥은 굉장히 복잡한 것 같다.”

역시나 결과는 내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내일 꼼꼼하게 찾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저녁 먹고 일찍 쉽시다.”

“네. 그럼 저는 저녁을 만들겠습니다. 저 좀 도와주실 분?”

일정 종료를 선언한 나의 말에 도로시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손에 들린 건 양념 통 상자와 다양한 식재료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건 자이언트 랜드 크랩이었다.

― 으… 너무 짓뭉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죠.

기절했다가 깨어난 도로시는 곤죽이 된 게를 주워 모았다.

야무지게 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어찌나 크기가 크던지, 멀쩡한 부위가 제법 남아 있었다.

“내가 도와주지.”

빈둥거리던 술이 두 팔을 걷어붙이며 도로시를 따라나섰다.

얼마나 맛있기에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대는 해 볼 생각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네 명.

로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별은 탐지봉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부족장은 구멍 난 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꼬투리라도 잡히면 놀려 줄 생각이었지만.

“벽에 적힌 서명을 보고 있다.”

돌아온 녀석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서명이라니? 너 그 글씨 읽을 줄 알아?”

“안다. 여기 반듯하게 적은 것은 ‘진’이라는 글자이고, 그 옆에 휘갈긴 건 이 사람의 서명이다.”

“네가 이걸 어떻게… 혹시 이게 반투족 문자야?”

태연하게 답하는 부족장의 말에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부릅떴다.

빅터도 모르는 글을 이 녀석이 알고 있다니.

“너도 이 사람 알아? 너희 부족 사람이었어?”

잔뜩 흥분한 나는 녀석을 붙잡고 따지듯 질문을 퍼부었다.

뭔가 그럴듯해서다.

진이라는 남자도 오러가 없었고, 나처럼 타고난 힘으로 최강이 됐다고 했다.

그러니 부족장이 말하던 진정한 반투족의 전사가 진일지도 모른다.

“우리 부족 사람이 아니다. 반투족 남자 중에 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접어야 했다.

저리도 단호하게 말하니 일단 진은 반투족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더 의문이다.

“…모른다고? 그런데 글자는 어떻게 읽은 거야?”

“아버지에게 배웠다.”

“아버지?! 그럼 별이나 술은? 저 애들도 다 아는 거야?”

“다른 형제와 자매는 모른다. 족장의 아들인 나만 배웠다.”

그렇다면 뭔가 특별한 전통이란 말인데.

이렇듯 족장에게만 내려오는 문자를 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배우셨겠네?”

“그건 아니다.”

“아니라고? 그러면 너의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셨는데?!”

족장에게 계승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뒤죽박죽인 녀석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며칠 전에 했던 워 울프 얘기를 기억하는가.”

“기억하지.”

“그때 나의 아버지 얘기도 했었다. 외부인의 도움으로 족장이 되었다는 얘기. 그것을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족장과의 싸움에서 외부인이 승리했고, 패배한 족장을 대신해 녀석의 아버지가 족장이 되었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 외부인에게 저 글자를 배웠다.”

“그 외부인이 누군데?”

“모른다.”

“아! 중요할 때마다 왜 자꾸 모르는 건데! 이름 말고 다른 건? 그냥 외부인이 끝이야?!”

“끝이다. 아버지를 도왔던 그 남자는 자신과 관련되면 위험하다며 정체를 감추고 떠났다고 한다.”

“허…….”

더 이상 기대하지 말자.

답은 얼추 나온 것 같으니까.

일단 족장과 결투했다면 그 외부인은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러가 없으면서 괴력을 낼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 반투족이 아닌 사람.

거기에 본 적 없는 특이한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

중간에 살짝 헛갈리긴 했지만 용의자는 너무도 선명해졌다.

그러니 결론은 나왔다.

‘진.’

과정은 모르겠지만, 이 집의 주인과 반투족이 만난 건 사실인 것 같다.

위에 열거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흔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 여럿일 거란 생각을 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멀뚱히 서 있는 부족장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를 족장으로 만들어 준 사람… 아무래도 이 집의 주인인 것 같다.”

너희 가문의 은인을 찾았다고.

“…….”

하지만 부족장은 그저 멍하니 침상 옆을 바라보기만 했다.

“반응이 왜 그래. 아닛! 그럴 수가?! 이래야 맞는 거잖아.”

나는 녀석의 곁으로 다가가 같은 곳으로 시선을 맞췄다.

뭐가 있는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알 수 없는 글자와 하트 모양의 낙서뿐.

미간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부족장은 말을 건넸다.

“아이작이란 남자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대의 모친 이름이 미리암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는 건데?”

“적혀 있어서 그런다.”

“…무슨 소리야.

반문하는 나의 말을 흘리며, 부족장은 벽에 적힌 낙서를 가리켰다.

“진, 그리고 미리암. 우리 사랑 영원히.”

녀석은 완벽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적힌 글자를 읽어 나갔다.

“…….”

뜬금없는 녀석의 말에 나는 멍청히 눈만 깜박였다.

하나 부족장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찾고 있는 아버지. 아무래도 이집의 주인인 것 같다.”

녀석은 내가 했던 말을 흉내 내며 점잖게 중얼거렸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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