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카슈타르의 영애시군요. 곁에 계신 분들도 신분증 부탁드리겠습니다.”
국경에 도착한 나는 첫 번째 시험을 마주하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이분들은 반투족입니다. 세속적인 문물을 거부해서 신분증이 없죠.”
로제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반투족을 국경 수비대에게 소개했다.
“저희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규정상 신분 증명이 안 되면 입국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 불가하다였다.
하나 이 정도 저항이야 이미 예견된 일.
로제는 제논 백작의 서명이 담긴 증명서를 수비대에게 전달했다.
[영애의 호위로 특별히 반투족을 고용하는 바. 그들의 신원을 카슈타르의 영주인 나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이 보증한다.]
서류의 내용은 문제없었다.
가문의 직인을 확인한 수비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증명서를 되돌려 줬다.
여기까지도 예상했다.
이제 남은 건 내가 반투족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뿐.
“하면 이분들이 반투족이라는 건 어떻게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이어진 수비대의 말에 나는 손을 내밀어 덩치 큰 녀석을 지목했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한눈에 봐도 힘 꽤나 쓰게 생긴 녀석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오러 유저군.’
게다가 어깨 위로 흐르는 옅은 기운은 녀석이 오러 사용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서 재물로 안성맞춤이다.
저 정도는 돼야 증명이 될 테니까.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과장 같단 말이지. 어디 손맛 좀 볼까.”
“방패 들어.”
건들거리는 녀석을 향해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길게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플 뿐.
쾅―!
실실 웃는 녀석의 방패를 향해 잿빛의 해머를 내리찍었다.
결과는 봐서 무엇 하겠나.
“크허억!”
녀석이 들고 있던 타워 실드는 종잇장처럼 우그러들었다.
“똑바로 잡아라. 대가리 터지니까.”
경악하는 놈을 보며 나는 다시 해머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좀 더 세게.
부들거리는 방패를 향해 해머의 머리를 조준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쿠! 이러다 사람 잡겠네요.”
지켜보던 수비대장이 기겁을 하며 뛰어들었다.
두 손을 내밀어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알겠습니다. 이분들이 반투족이란 건 확실하게 알겠군요.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나 이제와 그만두기엔 너무 많이 몰입해 버렸다.
“나의 해머는 피를 봐야 멈추지. 반투족을 의심한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유치한 말투의 중독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찌나 입에 짝짝 달라붙던지, 정체성이 의심될 만큼 나는 역할극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뻔뻔함이랄까.
나는 턱 끝을 치켜들며 오만한 눈으로 수비대를 노려보았다.
덤빌 테면 덤벼라 이거다.
“죄송합니다. 반투족을 본 게 처음이라 못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중한 사과였다.
이게 먹히다니.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들어 기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특히나 이 녀석!
“난 처음부터 네가 남 같지 않았다.”
히죽거리며 속삭이는 술을 보니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손에 쥔 통행증이 의미하는 건.
녀석과 내가 다를 바 없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떨어져서 걸어라.”
“후후… 말투마저 똑같아졌군.”
그렇다.
나는 이제 몸과 마음이 반투족화 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우린 목적을 달성했고.
“저 능선을 지나가면 랑방이에요.”
우리는 1차 목적지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약속 장소는 어딘지 아세요?”
“네, 잘 알죠. 이반 님을 처음 만나고 돌아오면서 들렀던 곳이니까요.”
대답을 마친 로제는 먼 산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듯.
“그날 이반 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로제는 미소 띤 얼굴로 우리의 첫 만남을 얘기했다.
고작해야 두 달 남짓일까.
“전 아직도 어제 일 같아요.”
그렇게 로제와 나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복된 삶과 죽음이 주는 시간의 외곡은, 반쪽짜리 기억으로 나의 머릿속에 쌓여 가고 있었다.
* * *
단정히 빗어 넘긴 금발 장년의 남자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선으로 연결하며, 누군가의 이름은 가위표로 지워 내기도 했다.
“로이드 님 사라센 흑마탑이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
“최근에 도는 소문 있잖습니까. 강화 인간이라는 거요. 그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감색 로브를 걸친 사내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사견을 드러냈다.
시술받은 사람의 능력을 강제로 승급시키는 것이 소문의 주요 골자.
이 황당한 소문의 진원지는 사라센일 거라고 추측되고 있었다.
“적어도 사라센은 흑마탑 활동이 자유롭잖습니까.”
박해받는 이곳 브라함과는 사정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흑마법에 대한 개념과 시선이 다르니, 최근 사라센의 흑마탑들은 다양한 사술을 발표하며 위세를 키우고 있었다.
“실제로 사라센에 가 보면 급성장한 용병들이 꽤 눈에 띤다고 합니다.”
“그렇다더군.”
하나 로이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관심은 오직 끄적거리던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번 의식도 그랬고, 저희가 너무 많이 양보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주도권을 완전히 잃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감흥 없는 로이드의 모습에 감색 로브의 사내는 보채듯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불만이었다.
고생해서 에르텔을 가져갔더니 의식의 결과물인 능력자는 사라센의 차지가 됐다.
좋게 말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덕분에 엄청난 능력자가 등장했으니까.
그런 특별한 능력자를 두고 온 것도 신경 쓰이는데 강화 인간이라니.
“저희 모르게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검성의 아들이 강화 인간이란 소문도 있고, 의식 이후의 상황에 대해선 소식조차 없지 않습니까.”
평소 말이 없던 감색 로브의 사내는 작정한 듯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능력자가 나타난 게 누구 덕분인데요. 그 녀석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소식은 들어야겠지.”
“그 정도론 안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능력자를 빼앗기게 될 텐데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지 않느냐. 필요한 만큼만 함께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 로이드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있었고, 특정 이름에 동그라미를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건 누가 능력자를 많이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아지는 가다. 어차피 모든 일들은 마지막 하나를 위함이니까.”
그러고는 창가로 다가가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렇긴 하지만…….”
“도망친 그년을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라.”
서릿발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 갈색 로브의 사내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 * *
랑방에 도착한 우리는 접선지를 향해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데 상황이 좀 그랬다.
은밀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건만, 지금 우리는 눈에 띠어도 너무 크게 띠었다.
“엄마, 왜 자꾸 저 아저씨만 봐?”
나는 여전히 가정을 파괴하고 있었고.
“흠흠……”
남자들은 헛기침을 남발하며 별의 자태를 훔쳐보고 있었다.
이러니 어딘들 편히 갈 수 있겠나.
“도저히 안 되겠네요.”
결국 우리는 챙겨 온 방어구로 의상을 교체했다.
사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다.
통행증도 받았겠다. 변장하고 다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힐끔거리던 로제의 말에 우리는 복장 전환을 뒤로 미뤘다.
정말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속옷 같은 옷을 걸친 채 이곳까지 와야 했다.
“다 됐으면 가죠.”
경갑으로 갈아입은 나는 이제야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
한데 이 축 늘어진 분위기는 뭘까.
다들 아쉬운 눈치를 보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나 로제.
훔쳐볼 복근이 없다는 게 그녀로서는 꽤나 안타까운 일이었나 보다.
“아깝다…….”
“뭐가요.”
“네? 무슨 소리예요?”
“아깝다면서요.”
“속으로 생각,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무래도 이건 버릇인 것 같다.
속에서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그런 거.
“방금 속으로라고.”
“누가요?”
표정 하나 안 바뀌는 걸 보면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일단 가 봅시다.”
하여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위치는 대략 도시의 반대편 끝자락.
“저기에요.”
로제의 손끝이 향한 곳엔 폐쇄된 작은 집회소가 있었다.
“지역 토속 신을 모시던 곳인데 내부는 텅텅 비었을 거예요. 지난번에 지나갈 때 짐 빼는 걸 봤거든요.”
상세한 로제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집회소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로제의 작은 손이 뒷문을 두들겼고.
― 남자는?
“얼굴이지.”
괴상한 말을 주고받더니 닫혀 있던 뒷문이 활짝 열렸다.
“그게 암호예요?”
“완벽한 암호죠.”
질문에 답한 로제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집회소로 들어갔다.
나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힘?
아니면 그거?
내 입장에서야 자랑할 게 너무 많으니까.
‘후후후…….’
덩달아 뿌듯해진 나의 발걸음도 집회소 내부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나는 특징 없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의 상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명색이 추적대가 아닌가.
솔직히 암살자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궁금해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했다.
존재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모르고 마주하면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마주했다는 사실마저도.
‘그래서 추적이 쉬운가.’
달리 생각하면 이 방면에 특화된 완벽한 사람들이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네, 괜찮았어요. 한데 그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저 안쪽 방에 계십니다.”
로제와 추적대는 질의문답을 하며 내실로 향했다.
드디어 마주하게 되는 잃어버린 시간들.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아이작을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나의 부모님은 누구인지.
지금은 어디 있는 건지.
그리고 나는.
왜 홀로 남겨져야 했는지.
대답 없는 질문을 떠올리며 돌아올 말들을 예상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
상상으로 마주한 아이작은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똑똑―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가 집회소 가득 울려 퍼졌다.
이제 시작이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단절된 나의 시간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끼이이익―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
나는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중년의 나이에 안대에 가려진 두 눈.
고작 두 가지 뿐이던 막연한 단서는, 이렇듯 실체가 되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아이작인가요?”
멈칫거리던 나의 입에서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나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 줄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너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나?”
“글쎄요.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 상태라… 다들 이반이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했던 것 같네요.”
남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찾아 나선 사람은 나인데, 왠지 내가 발견된 기분이다.
“데릭은 여전한가?”
“그 양반이야 뭐, 늘 정정하시죠.”
“그렇군. 그 친구 껍질째 볶아 먹는 강낭콩을 참 좋아했는데. 식성은 여전한가?”
남자는 보이지 않는 눈을 움직여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 누구야?”
해머를 들어 올려 남자의 머리를 겨눴다.
“똑바로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나갈 테니까.”
“…….”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긴장된 상황.
“데릭은 콩을 먹지 않아. 아니, 애초에 먹을 수 없는 몸이지. 두드러기 때문에 큰일 나거든.”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해머를 까딱였다.
그러곤 싸늘한 말투로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당신 누구야?”
정체를 밝히라고.
또다시 헛소릴 지껄이면 이곳은 고문실로 변하게 될 것이다.
“훗…….”
하지만 남자는 미소를 지었고.
“내 이름은 아이작 헤링거. 너의 엄마인 미리암의 오랜 벗이다.”
이어진 여인의 이름에 나의 머리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