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랑방이면 카잔의 북서쪽이에요. 왕국의 수도와는 3일 거리에 있는데, 여기서 출발하면 2일 정도 걸릴 거예요.”
“국경 인근인가 보군요.”
“네. 국경 다음 도시죠. 지방 도시치고는 꽤나 번화한 지역이에요.”
연무장을 벗어난 나와 로제는, 고풍스런 서재에 마주 앉아 다음 일정을 의논했다.
목적지야 말할 것도 없다.
아이작의 행방이 드러났고, 추적대는 지속적인 감시에 들어갔다.
― 행적이 불안정할 경우 감금을 시도할 것.
카잔으로 보낸 답신에 나는 이런 단서를 추가했다.
일단 만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보다 더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 남자는 반드시 잡아 놔야 했다.
“실패하진 않겠죠?”
“그쪽으로 특화된 사람들이니까 잘해 낼 거예요.”
걱정하는 나를 향해 로제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하기야, 앞 못 보는 반노인 하나 못 잡는다면 추적대라는 이름이 울고 갈 터.
“랑방에서 이반 님이 찾으시는 분을 만나고, 그 뒤에 시작의 마을로 가면 돼요.”
계획을 설명하는 로제의 말에는 그 어떤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확정된 느낌이랄까.
“네, 그렇게 해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로제의 말에 수긍하며 나는 다른 내용을 질문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시작의 마을이요. 가려면 대수림을 지나야 하는데…….”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마경이 달리 마경이겠나.
영지 순찰이 전부인 로제에겐 오가는 여정 자체가 가혹한 도전이다.
“정말 백작님께서 허락하신 건가요?”
“물론이죠. 외삼촌이 강력하게 설득하셨어요. 에르텔만 찾으면 모든 게 달라질 테니까요.”
“대수림은 정말 위험해요.”
“알아요. 하지만 제 일이잖아요. 직접 처리할 순 없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싶어요.”
에르텔에 얽힌 사연이야 어젯밤에 들어서 알고 있다.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은 가지만.
“너무 위험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도전을 말리고 싶었다.
목적이 안전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거리를 단축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로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줄인다니.
설마 또 가고일을 타고 날자는 건 아닐 테고…….
“랑방을 지나서 2일 정도를 더 가면 용병으로 유명한 누벨이 나와요.”
다행이도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로제의 선택은 지상이었고, 그곳은 누벨이라는 도시였다.
“작은 도시인데 용병 산업이 발달해 있죠. 왜 그런지 아세요?”
“글쎄요.”
“대수림으로 가는 입구가 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그 선택은 편하기까지 했다.
누벨의 위치는 대수림 남동쪽이었고, 시작의 마을까지 일주일이면 도착 가능했다.
“그래서 대략 2주가량 줄어들게 되죠.”
물론 누벨까지 가는 시간이 있으니 실제로 줄어드는 시간은 그렇게 크진 않을 것이다.
하나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다.
문제는 안전.
이보다 안전할 방법은 없을 테니, 사실상 이 부분이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쪽 방향은 몬스터가 약하대요.”
그러니 이 루트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갈 수 있다면 말이다.
“흠… 다 좋은데요.”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계획은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기본 중에 기본이자 필수적인 조건.
“국경은 어떻게 통과하죠? 저는 브라함 사람인데.”
카잔 국경을 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야 뭐든 할 것 아닌가.
“훗… 그 정도야 방법이 있죠.”
하지만 로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로제는 갸름한 턱 끝을 치켜들며 도도하게 눈빛을 날렸다.
“대륙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분증이 있지요?”
그러고는 신분증이란 주제로 대화의 내용을 바꿨다.
“뭐… 그렇다고 봐야죠.”
그에 나는 떨떠름하게 답하며 로제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신분 위증 같은 말을 꺼낸다면 해 줄 얘기가 없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각인 마법으로 만든 신분증은, 위조는 물론이요, 변조조차 할 수 없는 특수한 기물이다.
“하지만 특정 부족 중에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반 님과 함께 다니는 반투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나 내용을 들어보니 위조 같은 빤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서요?”
예상치 못한 답을 기대하며 나는 간단하게 반문했다.
하지만 로제는.
“반투족으로 변장하는 거예요!”
신선함을 넘어선 충격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네?!”
미쳤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사라졌다.
반투족으로 변장이라니.
그냥 팬티 빼고 홀랑 벗는 건데 그것도 변장으로 쳐주는 건가?
아니, 애초에 그게 통하겠냐는 말이다.
“국경 수비대가 바보도 아니고… 옷차림 바꾼다고 속겠어요?”
나는 부정의 기운을 담아 로제를 바라보았다.
벗는다고 다 반투족이면, 수배자란 수배자는 죄다 반투족이 됐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글렀다.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싶었지만.
“반투족의 특징이 어디 그것뿐인가요?”
로제는 또 다른 질문을 나에게 던지며 끈질기게 설득을 이어 갔다.
“이름이 이상하다?”
특징을 묻는 로제의 말에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주저 없이 말했다.
괴팍한 걸로 따지자면 이름이 단연 최고였으니까.
나를 죽이고 가라는데 더 이상 무슨 비교가 필요하겠나.
“그리고요?”
그에 로제는 또 다른 생각을 물어봤다.
“말투가 특이하다?
“또 다른 거요.”
“의리 있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특징이네요. 그리고요?”
“모든 게 크다? 덩치도, 근육도, 가슴도… 아, 이건……!”
흙빛으로 변하는 로제를 보며 나는 두 손을 들어 파닥거렸다.
건드려서는 안 될 궁극의 역린.
하지만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타고난 힘이 다르잖아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힘. 그것보다 더 큰 증거가 필요할까요?”
그제야 나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야 말로 완벽한 변장일 터.
“이반 님이야 말로 누구보다 완벽한 반투족이 될 수 있는 거죠.”
하여 나는 팬티 한 장을 걸치고 카잔으로 향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여정의 준비는 꼼꼼히 살피셨소?”
내성 입구로 나온 나는 말쑥한 차림의 백작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옆에는 반크스가 있었고.
“허허, 이거 몸이 아주 실하구먼, 실해…….”
반크스는 팬티 바람인 나를 보며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왠지 특정 부위를 향하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느껴졌지만.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구려. 이렇게 모인 김에 내 몇 마디 전하고 가리다.”
이어진 제논 백작의 말에 나의 정신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주한 나를 보며 백작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우선 고맙소.”
그것은 감사의 인사말.
뜬금없는 백작의 말에 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바쁘게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네? 아… 네.”
고맙다고 하니 일단 대답했다.
대답은 했는데…….
당최 무슨 영문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영지 순찰에 대한 감사의 인사야 이미 받았고, 그 외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한데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덕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소. 내가 잃고 있던 게 무엇인지…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이요.”
제논 백작은 차분한 얼굴로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의 헌신과 노력이 닫힌 나의 눈을 뜨게 하는구려.”
“…….”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멍하니 얼굴을 마주할 뿐이었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고.
“다녀와서 봅시다. 로제를 잘 부탁하오.”
제논 백작은 여운이 담긴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내성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이 집입니다.”
낡은 집 앞에 선 베르는 현관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빅터가 그 뒤를 따랐고, 마지막으로 에스카가 현관문을 넘어왔다.
“제가 다시 찾았을 땐 이미 집을 비운 후였습니다.”
베르의 설명을 들으며 빅터는 집안 내부를 살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실내.
생활한 흔적이 사라진 이곳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낮선 이들을 맞이했다.
“흐음…….”
낡은 책상을 오가던 빅터가 작은 화병 앞에 멈춰 섰다.
화병의 입구는 그을려 있었고, 거꾸로 뒤집자 타다만 재가 쏟아져 나왔다.
“그게 뭡니까?”
근처에 있던 베르가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난번엔 이런 거 없었는데.”
“못 본 거겠지. 어쩐지 빨리 끝내고 나오더라니.”
하지만 돌아온 건 에스카의 핀잔뿐, 지켜보던 빅터는 타다만 종이를 들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라고 쓴 건가요?”
곁을 지키던 베르가 기웃거리며 물었다.
“…….”
하나 빅터는 침묵했고, 그 대신 불타 버린 종이를 베르에게 내밀었다.
“흠… 이거는 진, 그리고 이거는… 소환? 소환이라고 쓴 건가요?”
썼다 지운 흔적을 보며 베르는 추측해 낸 글자를 소리 내 읽었다.
“그런 것 같구나.”
그에 빅터는 주름진 미간을 당기며 낮게 대답했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수상함을 눈치챈 베르는 빅터를 바라보며 종잇조각을 넘겼다.
익숙한 이 느낌은 뭘까?
낙서하듯 가린 글자는 ‘진’, 또 다른 글자는 일부만 드러난 ‘소환’이라는 단어였다.
“진… 이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뭐였지? 어디서 들었더라.”
혀끝에 맴도는 진이란 단어에 베르는 에스카를 향해 눈짓으로 물었다.
그리고 에스카는 빅터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8인의 영웅… 그 남자 맞죠?”
인마대전의 영웅이자 최강이라던 그 남자가 맞느냐고.
“그래. 네 말이 맞다.”
간단히 답한 빅터는 시선을 돌려 집안 전체를 훑었다.
번뜩이며 빛나는 서슬 퍼런 안광.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구나.”
빅터는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허전했다.
그냥 허전한 게 아니라 미칠 듯이 허전하고 공허했다.
이 끔찍한 자유와 홀가분함이라니.
팬티 한 장에 의지한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영혼을 실어 멀리멀리 날려 보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아이고 저 총각 몸 좀 봐.”
“어머어머…….”
“저 복근에 얼굴을 문지르고 싶다.”
“꿀꺽…….”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엄청난 관심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겨 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꿀꺽하는 소리.
“아후…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두 뺨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로제는 벌써 수십 번도 넘게 꿀꺽을 연발했다.
수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훌륭하군.”
“…….”
“모든 반투족 여인이 바라던 완벽한 남자의 모습이다. 그러니 내 오늘 그대와 합방을…….”
야성의 반투족으로 돌아온 별은 콧김을 내뿜으며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무, 무슨 그런 말을! 혼인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합방을 입에 담을 수가 있죠?!”
당연히 로제는 펄쩍 뛰며 항변했다.
하지만 상대는 별이었다.
“그게 뭐가 문젠가? 내일 당장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거늘, 번거로운 절차 따위 우리 반투족에겐 필요 없다.”
로제가 말하는 인간의 관습 따위, 별의 입장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짐승도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어떻게 그걸 해요!”
“사랑이 밥 먹여 주나? 우리는 전투 민족이다.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고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설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 대신 우리는 훌륭한 후손을 남겨 피를 잇게 하지. 그것이야 말로 궁극의 연애! 이반은 후손을 만들기에 가장 완벽한 남자다.”
“아니죠! 사랑이 먼저예요!”
그렇게 로제와 별의 설전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 여편네가 미쳤나? 왜 길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난리야?!”
“우리 이혼하자.”
나는 수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며 국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