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반 님은 가 보셨어요?”
“네. 리베에 가기 전에 스승님과 함께 들렀죠.”
당시에 빅터는 분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진짜 시작의 마을이라고.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인마대전과 찬탈자의 이야기는 아직도 선명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면 에르텔… 아니, 뭔가 수상한 돌이나 광물에 대한 기억은 없으세요?”
“글쎄요. 에르텔이란 이름도 처음이고, 마력을 품었다는 돌도 그 마을에선 보지 못했어요.”
“아…….”
“저도 샅샅이 살펴본 건 아니라 장담은 못 하겠네요. 아무튼 평범한 장소는 아니에요.”
설명을 듣던 로제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본래 예쁜 얼굴이라 그런가.
찌푸리며 인상을 쓰건만 그 모습조차 귀엽게 보였다.
‘어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잡념을 떨쳐 내듯 도리질을 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로제는 생각을 정리했고.
“외삼촌에게 다시 말씀드려 봐야겠네요.”
로제는 원정에 대한 의지를 차분하게 드러냈다.
한데 그걸 찾아서 무얼 하려던 것이었을까.
“거래를 하려고 했던 거죠.”
“누구와요?”
“왕국이요.”
찾는 물건의 스케일도 컸지만, 이후의 목표는 더욱 거대했다.
왕국과의 거래라니.
백작 가문쯤 되면 저런 발상도 가능해지나 보다.
“아리안의 가장 큰 약점은 빈약한 무력이죠. 중립국을 표방하며 안위를 도모해 왔지만… 사실 이 부분은 왕국의 오랜 숙원이었어요.”
“흠…….”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랜 숙원일 정도라면 진즉에 어떤 조취가 있지 않았겠나.
국가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으니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건, 정책 이상의 뭔가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일 터.
“이게 참 설명하기 힘든 부분인데, 뭐랄까… 소질이 없이 태어났다고 해야 하나. 아리안 국민의 대부분은 오러와 마력에 재능이 없어요.”
쉽게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타고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강한 신체를 타고났으나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반투족이라든가, 신장은 작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소인족.
그 외에 유달리 마법을 잘 다루는 알브족 등이 대표적인 혈족 계승일 것이다.
“그 대신 인문, 과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어요. 덕분에 중립국의 위치는 확보할 수 있게 되었죠. 기술제휴를 빌미로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것과 에르텔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타고난 재능이 적을 뿐이지 마법사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에르텔의 도움을 받으면 능력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얘기였다.
왕국의 입장에선 마법 수준을 높일 수 있고, 그 대가로 로제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면제받는 것이다.
계획은 좋았는데.
“에르텔이라는 게 어떻게 생겼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게 있다더라… 해서 찾아 나선 거예요.”
문제는 그것에 대한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었다.
생김새조차 모르는데 어찌 찾을 수 있겠나.
존재 여부는 둘째 치고, 눈앞에 있어도 지나칠 판이었다.
“당장 결혼해야 할 상황이라서 일단 핑계를 대고 시간을 번 거죠.”
어쨌거나 로제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혼담은 정체되었고, 제논 백작의 선택지는 늘어났다.
그 모든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나.
“이반 님.”
“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저도 도움받고 있는데요.”
우연히 시작된 로제와의 인연은 서로의 삶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크흠, 아주 고약한 놈을 보내 왔구나. 이걸 어디서 발견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먹는 샘물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돌아온 베르의 대답에 빅터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마기를 계속해서 음용했다면 필시 오염됐을 터인데. 발견한 마을은 무사했다더냐?”
“아니요. 마을 주민 모두가 마인이 됐다고 합니다.”
“쯧쯧… 악독한 놈들이구나. 한데 놈들은 이 뼛조각을 어디서 구했을꼬.”
“드물지만 유통되는 것도 있잖습니까?”
“그건 하급이지. 이건 진골 마족의 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빅터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뼛조각을 나무 상자에 되돌려 넣었다.
이런 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상자를 바라보는 빅터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해졌다.
저 희귀한 진골의 뼈를 어떻게 찾았을까.
인간의 귀족과 상통하는 계급이 마족의 진골이다.
그 숫자는 인간보다 훨씬 적고, 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행여 전사했더라도 사체가 방치되는 경우가 없으니 진골의 뼈를 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이라면…….
굳이 가능성을 만들어 내자면, 떠오르는 지역이 한군데 남아 있긴 했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사실상 잊혀진 지역이었고, 흘러간 세월만 30년이다.
어쩌다 보니 발견된 건가.
술잔을 기울이던 빅터는 이어진 베르의 말에 상념을 떨쳐 냈다.
“찾아보라고 하신 사람 있잖습니까.”
“치료사를 말하는 것이냐.”
“네, 그 사람을 찾은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소식에 빅터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래, 이반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더냐.”
빅터의 관심의 이반의 코어로 향했고.
“그게 좀 특이하게 돼서…….”
베르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코어를 고칠 수 없다더냐?”
“못 고치는 게 아니라,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일찍 망가진 게 다행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글쎄요. 오러보다 더 큰 기운이 몸을 가득 채우고 하던데 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듣고 있던 빅터의 반응은 덤덤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느낌일까?
이반의 비상식적인 힘과 성장 속도를 설명하기엔 그게 가장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말해 보거라.”
“치료사 말입니다. 그 실력에 은둔하는 것도 수상하지만, 마지막에 꺼낸 말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베르는 코끝을 훔치며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후배님의 부모님을 묻더군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관을 향하던 이반을 향해 익명의 치료사는 이렇게 말을 보탰다.
― 분명히 뭐가 있을 텐데, 내가 자네 같은 몸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거든…….
본 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반을 통해 본 것이 무엇이기에 부모의 정체를 물어보며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왠지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드리워진 침묵을 깨며 베르는 자신의 추측을 설명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제가 보기엔 연결 고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베르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야기의 서두를 열었다.
“무엇을 이어 준다는 게냐?”
반문하는 빅터를 보며 베르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하다.
이것은 수상한 사람과 이상한 사람이 만나, 머나먼 과거와 연결되는 기이한 인연인 것이다.
“일단 후배님 특별하다는 건 스승님도 인정하시죠?”
“그야 그렇지.”
좋게 말하면 특별하고, 다르게 말하면 이상하다.
상식을 벗어난 신체 능력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성장 속도는 보면서도 믿을 수 없고, 보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시잖아요.”
“흠… 그것도 그렇지.”
“한데 그 치료사는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심지어 진찰도 없이 말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든 걸 간파한 그 남자는, 이름은 물론이요, 일정한 거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이상한 사람의 특별함을, 수상한 사람이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
“후배님의 특별함과 그 힘의 근원, 더 나아가 스승님이 찾고 계시는 과거의 그분들까지요.”
이어지는 베르의 말에 빅터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지금하고 있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베르의 추측이 맞는다면.
“살아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급된 수상한 치료사는 찬탈자의 마수를 벗어난 과거의 영웅일지도 모른다.
“다시 찾아갈 수 있겠느냐?”
“위치는 아는데, 지금은 그곳에 없습니다.”
장소를 묻는 빅터의 말에 베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자취를 감췄단 게로구나.”
“네. 저희가 다녀간 뒤로 거처를 옮긴 모양입니다.”
그에 빅터는 말없이 앉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디어 찾은 것 같다.
서클을 고친 치료사의 소문을 듣던 날, 빅터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뽀얀 피부에 짙은 눈썹… 그리고 선명하게 그어진 쌍꺼풀까지.
‘그레이시…….’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 그 모습에 주름진 빅터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 * *
“아직 새로운 소식은 없죠?”
“아이쿠, 또 오셨네요. 아직까진 조용합니다.”
“그렇군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그냥 계시면 저희가 알려 드릴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가만있자니 좀 쑤셔서 그래요.”
내성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는 전서조를 관리하는 사육장이 있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네 번째.
리베에서 날아온 답신 이후, 나는 또 다른 소식을 기다리며 들락거리길 반복했다.
“때가 되면 부를 텐데 뭐가 그리 조급한가.”
“혹시나 싶어서 그러지.”
타박하는 부족장에게 나는 투덜거리듯 속내를 드러냈다.
몸은 하나인데 가야 할 방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리베의 일은 그대의 스승에게 맡기면 될 일 아닌가.”
“흠, 그렇긴 한데…….”
손 떼고 바라보기엔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 남자를 찾는다고?’
베르가 보낸 전서구엔 빈민가에서 만난 치료사가 등장했다.
페드로가 소개해 줬던, 나에게 이상한 기운이 있다고 말한 이름 모를 그 남자였다.
― 내일 저희는 스승님과 함께 치료사를 찾으러 갈 예정입니다.
조급해진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빅터가 나섰으니까.
그 영감이 나섰다는 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얘기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 아이작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고, 로제는 시작의 마을을 두고 반크스와 논의 중이었다.
그러니 조급한 것이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왔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한꺼번에 들이닥치니 머리가 복잡했다.
‘오늘까지만 기다리자.’
카잔에서 소식이 날아오면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될 터.
흔적을 찾았다면 남는 것이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간다면 빅터와 합류한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수련이나 해라.”
“그럴까?”
타박하는 부족장의 말에 우리는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나, 나는 왜?!”
“수련하자며. 너 요즘 살찐 것 같더라. 옆구리가 피둥피둥하다고.”
끌려온 부족장은 버둥거리며 완강히 저항했다.
저항했지만.
“크어어어어어억!”
녀석은 이렇게 날아갔고.
“허어어어어어억!”
저렇게 나뒹굴었다.
“흥미진진하군.”
어느새 모여든 술과 별은 연무장 입구에 앉아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잠시 후 나의 훈련 파트너는.
“오랜만에 붙어 보는군.”
뻗어 버린 부족장을 대신해 앉아 있던 별로 바뀌었다.
“방어구는?”
“필요 없다.”
“다치면 어쩌려고?”
“책임져라.”
오래간만에 보는 녀석의 투기에 리베에서 보았던 별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임지라는 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칼은?”
“오늘은 맨손 격투다.”
도전적이고 거침없던 그때가 떠올라 나는 흔쾌히 녀석의 요구를 수락했다.
“안 봐준다.”
“건방진 소리.”
그렇게 대련은 시작됐고.
파앗―
날카로운 별의 주먹이 귓가를 스쳐갔다.
이 저릿한 풍압이라니.
슛―
슛―
이어지는 연타를 피해 나는 가볍게 상체를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큭!”
회피를 예측한 별의 무릎이 해머처럼 솟아올라 나의 이마를 강타했다.
몇 수 앞을 내다본 건가.
노련한 녀석의 격투 운영에 나는 완벽하게 말려들었다.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승기를 붙잡은 별은 기세를 올려 더욱 거칠게 파고들었다.
“너 격투가 주 종목이냐?”
“대련에 집중해라.”
절정에 이른 별의 투기는 실전을 방불케 할 만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해 받아 줄 수밖에.
“타아아아!”
뻗어 오는 주먹을 흘려 내며 별의 몸을 붙잡았다.
밀고 들어오는 힘을 이용해 가볍게 매치기를 시도.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별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으읏!”
살짝 위험한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수고했어.”
나는 밑에 깔린 별의 몸에서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겹쳐 있었어…….”
때마침 나타난 로제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쪽지를 떨어뜨렸다.
곁에 있던 술이 쪽지를 주워 들었고.
“목표 발견. 현 위치 3번째 경유지. 랑방 외곽 3지구.”
술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작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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