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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62화 (62/203)

62화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이다.”

“왜? 놓친 거야?”

“아니다. 놈들은 여기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갈림길에서 만난 술은 막대기를 손에 든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런대 왜 이러고 있어. 어느 한쪽을 정해서 따라가야지.”

“이것 때문이다.”

채근하는 나의 말에 녀석은 손에 쥔 막대길 땅에 세웠다.

“이놈이 넘어가는 방향으로 가려했는데…….”

녀석은 말끝을 흐리며 막대에서 손을 떼었다.

스르르 기울어지는 나무 막대기.

“…….”

“이것 봐라! 아까부터 계속 중간으로만 넘어진다!”

녀석은 이곳에 머물러 막대기와 이 짓거릴 하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상황을 보고 네가 판단했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아니다. 나는 아버지와 부족 어른들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다.”

막대를 주워 든 술은 입술을 삐쭉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셨는데?”

“…나대지 말고 시키는 것만 잘하라고 하셨다.”

“…….”

“손대는 일마다 사고투성이라고…….”

샐쭉해진 술은 애먼 땅바닥에 대고 막대길 휘적거렸다.

측은지심이랄까.

녀석이 만든 너저분한 선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뭘 말하는 건가.”

“막대기 말고 네가 가고 싶은 방향이 어디냐고.”

생각을 묻는 나의 말에 녀석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낯선 느낌이라니.

주눅 든 녀석의 모습에서 어색함이 밀려왔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넌 그냥 네 판단을 말하라고.”

쭈뼛거리던 술은 갈림길 위로 나섰다.

그러곤 서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이쪽으로 간 사람은 싸움 잘하던 그 남자다. 그리고 저쪽을 향해 간 사람이 노이의 일행이다.”

“그래?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어?”

“아니다. 내가 봤을 땐 여기서 그냥 헤어졌다.”

“왜 그렇게 느꼈는데?”

“노이의 입모양을 보고 알았다. 녀석은 준비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게 보였다고?”

“확실하게 봤다.”

가까운 거린 아니었을 텐데.

입모양을 봤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읽어 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재능이 아닌가.

저 말이 사실이라면 감시나 추적에 최적화된 인재인 것이다.

‘베르가 알면 좋아하겠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지우고, 이어지는 술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양쪽 다 거처로 향하는 것 같으니, 한쪽을 택하라면 나는 노이의 뒤를 쫓겠다. 아직까진 놈의 땅이고, 녀석의 뒤를 쫓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좋아. 그럼 앞장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의견을 묻고 책임져 주기로 했으면 결과를 볼 때까지 가면 된다.

그렇게 우린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고.

“이쪽으로 계속 가면 왕도예요.”

이어진 로제의 말에 우리는 추적을 멈추고 의견을 나눴다.

계속 쫓을 것인가, 아니면 복귀할 것인가.

“왕도로 향한다면 우리도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그곳에서 저놈이 할 짓은 안 봐도 빤하니까요.”

로제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복귀를 결정했다.

이제부터 놈이 하는 짓은 주색잡기일 터.

그 틈에 사실을 알리고 다방면으로 준비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 * *

그날 저녁.

내성 식당으로 향하던 나는 들려오는 큰 소리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오∼ 여전히 훤칠하구먼. 다시 만나서 반갑네!”

소리의 근원지는 식당 입구였다.

안으로 들어서던 반크스가 걸음을 멈추었고, 살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방금 도착했다네.”

왕도에서 돌아온 반크스는 밝은 표정으로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 그사이에 진전이 좀 있었는가?”

곁으로 다가온 반크스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진전이라…….

핑크빛 무드는 몰라도 로제와의 대화는 한층 편해지긴 했다.

그 외에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흠…….’

일단 별을 의식하는 로제의 눈빛이 예리하고 집요해졌다.

주로 가슴을 힐끗거리며 한숨을 내쉬지만, 내 옆자리를 지키려 아등바등 무리도 많이 했다.

“녀석이 연애 경험이 없어서 좀 답답할 걸세. 자네가 잘 리드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보게. 내가 응원하겠네.”

나라고 뭐 특별한 게 있겠나.

생긴 것과 연애를 잘하는 건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였다.

“훠이!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요!”

어디서 다가온 걸까.

갑자기 나타난 로제는 반크스를 밀어내며 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어진 저녁 만찬 시간.

상석에 자리한 제논 백작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반크스, 좌측엔 로제가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론 내가 있었고, 맞은편에 부족장과 별, 그리고 술이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헤미르 영지와 이어진 던전도 그랬고, 남쪽의 오지 마을도 그랬습니다.”

설명을 듣던 반크스는 미간을 좁히며 침음했다.

“하면 누군가 일부러 마기를 침투시켰다. 이건가?”

“네. 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마족의 뼈가 그리 흔한 물건은 아닐 테니까요.”

용맥이 흐르는 건 수많은 자연현상 중에 하나다.

그 와중에 마굴이 생기고, 여러 조건이 맞으면 던전으로 진화한다.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미 말했듯 자연의 일부분이고, 토벌을 반복하며 원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마족의 뼈라니.”

“게다가 각 장소에 하나씩만 놓여 있었죠. 헤미르 던전에선 용맥 근처에 숨겨 두었고, 오지 마을에선 주민들 식수원에 감춰 뒀습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도대체 어떤 우연들이 겹쳐져야 저런 현상이 만들어지는 걸까.

“그 사실을 전달해야 할 순찰대원마저도 마인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보고서가 순찰대장을 통해 작성되었죠.”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건, 부정하는 게 더 힘들만큼 명료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순찰대장마저도 노이의 손에 죽었습니다.”

끄나풀 노릇을 하던 녀석조차 자신의 주인에게 버림을 당했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

이쯤 되면, 그냥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속편할 것이다.

“하면 노이가 연관되었단 말인가?”

“아직까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드러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주시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하긴… 그 파락호 같은 놈이 오지의 땅을 사서 뭐에 쓰겠나. 차라리 그 돈으로 유곽을 인수하겠지.”

반크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논 백작을 바라보았다.

“페이소스 후작가는 접으시지요. 제가 보기엔 썩은 동아줄에 불과합니다.”

그러고는 노골적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

하지만 백작은 대답이 없었고.

“발 빼는 게 늦어지면 남는 건 공멸뿐입니다.”

반크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충고하듯 말을 이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식당의 분위기.

침묵하는 백작을 보며 반크스는 입술을 곱씹었다.

아니, 화가 나 보였다.

“내 누이는…… 그런 놈에게 시집보내려고 로제를 지킨 게 아닙니다.”

감춰 둔 본심을 꺼낸 반크스는 제논 백작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원망.

또는 책망.

“외삼촌…….”

침묵을 가르는 로제의 말이 식당을 울리며 흩어졌다.

그에 반크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에 있는 와인 좀 다오.”

곁에 있던 도로시가 와인을 들어 반크스에게 내밀었다.

“가득 부탁하네.”

들어 올린 와인 잔을 향해 갈색 유리병이 입구를 맞췄다.

두툼한 유리병이 높낮이를 바꿨고, 식탁 위를 투영하던 굴곡진 와인 잔은 채워지는 붉은 빛에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저와 로제가 브라함에 다녀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가문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작님이 아닌 저 녀석을 위해서요.”

백작과 반크스의 시선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부딪쳤다.

한쪽은 이해를 구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결단을 강요하고 있었다.

“일단 잘 지켜보시고 수상한 낌새가 발견되면 알려 주시지요. 왕실 기사단 훈련을 핑계로 탈탈 털러 갈 테니까.”

반크스는 가득 채워진 와인 잔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 * *

온통 하얀 벽이라서 그럴까.

똑같은 달빛이건만 유달리 이곳은 밝게 느껴진다.

이름 모를 꽃들과 조화롭게 놓인 조각상들.

햇살 아래 화사했던 후원의 밤은, 달빛을 받으며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글쎄요. 스승님이 오실 때가 됐으니 다시 가보긴 해야겠죠.”

향후 일정을 묻는 로제의 말에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카잔으로 떠난 추적대의 소식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세 번째 지점으로 가고 있겠죠?”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

맥락 없이 던진 나의 질문을 로제는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회귀 전에 확인된 것이 두 번째 지점이니, 내일 시작되는 세 번째 경유지가 본격적인 추적의 서막이다.

“새로운 소식이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렇게 머무는 동안 찾게 되면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

“그나저나 백작님 마음이 바뀌실까요?”

나는 분위기를 바꿔 로제의 고민에 동참했다.

“이미 많이 바뀌셨어요. 사실 가문만 아니었다면, 가장 크게 반대했을 사람이 아버지였을 테니까요.”

하기야 외동딸을 위해 법령까지 바꾸려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하나만 생각하면 될 반크스와는 달리, 제논 백작의 짐이 조금 더 많고 복잡했을 것이다.

“아참, 아까 반크스 님이 한 얘기 말인데요.”

“어떤 거요?”

“브라함에 갔었다고 한 거요. 그거 화전민 마을, 거기 얘기하는 거 맞죠?”

나는 반크스의 말을 떠올리며 로제에게 질문했다.

매번 잊어버려 물어보지 못했던 내용인데 이때다 싶어 말을 꺼낸 것이다.

“아! 네, 맞아요. 그때 뭔가 찾을 게 있어서 어느 마을을 찾아다녔었거든요.”

“마을이요? 이름이 뭐였는데요.”

“시작의 마을이요.”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뜻밖에도 영웅의 마을이었다.

인마대전을 위해 만들었다던 대수림의 전초기지.

“그런데 헛소문이었나 봐요. 외삼촌이 찾아갔었는데 그냥 평범한 역참 마을이었데요.”

하지만 로제가 찾아낸 시작의 마을은 대수림 바깥에 위치한 가짜 마을이었다.

한데 그곳에서 무얼 찾으려 했던 것일까.

“에르텔이란 걸 찾고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엄청난 마력을 담고 있는 돌이래요.”

그녀와 반크스가 찾던 물건은 마력을 지닌 돌이었다.

언뜻 들어 보면 마력석인데, ‘엄청난’이란 수식어가 뜻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국가급 마법도 시전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마력석은 아니다.

내가 아는 마력석은 램프를 만들거나 잡다한 장치에 사용됐으니까.

국가급 마법이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스케일이 다르다는 건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용을 떠나서 찾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다.

가짜 시작의 마을은 물론이요, 대수림 안에 있던 진짜 마을에서도 그런 돌을 본 기억은 없었다.

‘결계석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시작의 마을에서 본 돌이라곤 주춧돌과 맷돌… 그리고 불붙일 때 쓰는 부싯돌과 탑으로 만든 엄청나게 큰 돌이 전부였다.

“시작의 마을에 있는 게 확실해요?”

“저희가 입수한 정보로는 그랬어요. 하지만 이미 말씀 드렸듯, 그냥 평범한 마을이었대요.”

“아니요. 절대 평범하지 않아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로제에게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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