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을을 나온 우리는 지체 없이 말을 달려 성으로 향했다.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단축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아껴 무조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러다 말이 먼저 퍼지겠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잠깐이라도 쉬어 주지 않으면 아예 못 달릴 수도 있다.”
경고에 가까운 부족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따라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이동속도는 확연하게 느려졌다.
이대로 무리했다간 정말 멈출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 언덕 아래에서 쉬다 가자.”
휴식을 결정하곤 속도를 줄이며 언덕을 내려갔다.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뭘까.
남은 일정마저 포기하게 된 것은 로제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 죽었다니요? 순찰대의 보고는 이미 받았는데요? 며칠 전에 복귀해서 내성에 있을 거예요.
의아해하는 로제의 말에 나는 불안한 상상을 지우며 마을로 돌아갔다.
로제가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할 테니까.
―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여기에…….
하나 로제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나의 상상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살아 있어야 할 순찰대가 외딴 마을에서 마인으로 발견된 것이다.
심지어 성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인데 말이다.
하면 며칠 전에 받았다는 그 보고서는 뭐란 말인가.
― 조작이군.
이어지는 술의 말에 우리는 정신없이 말을 달려 성도로 향하게 됐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부쩍 늘어난 마굴도 그렇거니와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까지.
축복의 땅 카슈타르를 향해 정체 모를 마수(魔手)가 뻗어 오고 있었다.
* * *
“아버님은?!”
내성에 도착한 로제는 한달음을 달려 집무실로 향했다.
제논 백작은 변함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했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그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렇게 이어진 사실 확인의 순간.
“맞네요. 순찰 보고서는 죽은 에든이 작성한 걸로 돼 있어요.”
로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논 백작은 순찰대장을 호출했다.
하지만 얼마 후.
“순찰대장님은 어제부터 계속 결근이라고 합니다.”
돌아온 경비대의 대답은 나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를 찾지 못한다면 상황은 점차 심각해질 터.
“지금 당장 찾아와라!
제논 백작은 고함치듯 외치며 사라진 남자의 수배를 지시했다.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근심 가득한 그의 얼굴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잠적한 순찰대장이 쥐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려면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군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알려 줄 테니, 그동안 푹 쉬시는 게 좋겠소.”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를 말이겠소. 내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요.”
잔류를 청하는 나의 말에 제논 백작은 흔쾌히 답하며 말을 이었다.
“고맙소. 내 언젠가 꼭 보답하리다.”
보고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나와 삼인조는 휴식을 위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창가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향했다.
고급스런 마감이 돋보이는 티 테이블에는 미리 준비된 차와 소소한 간식이 손길을 기다리며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은 나는 찻잔을 홀짝이며 향후 일정을 정리했다.
카슈타르에 온 지도 벌써 5일째.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한 나의 여정은, 한 번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목표가 늘어났다.
하나는 상단을 따라서 이동한 아이작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고.
‘카리프…….’
또 다른 하나는 카리프와의 재회였다.
아이작은 카잔 왕국에.
카리프는 사라센 제국에.
아쉽게도 두 사람은 나의 노력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내가 가진 국적으로는 그 나라의 국경을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가능했다.
비록 내가 아닌 대리인이지만 말이다.
똑똑―
“이반 님, 잠깐 들어갈게요.”
경쾌한 노크 소리 뒤로 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에 헤어졌는데 또 무슨 일인 걸까.
아직 대답하지 않았건만, 로제는 이미 방문을 열어 버렸다.
“카잔으로 떠난 추적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러곤 내실로 들어와 환한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
바로 아이작의 관한 추적대의 보고서였다.
“지금 두 번째 지점으로 이동하는 중이래요.”
작은 쪽지를 펼친 로제는 들뜬 목소리로 내용을 전했다.
“빠르네요.”
“추적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니까요.”
감탄하는 나의 말에 로즈는 당연한 듯 대답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경유지가 총 여섯 개인데 두 번째 지역이 좀 넓은가 봐요.”
추적대의 동선은 상단의 이동 경로였다.
말했다시피 경유지는 총 여섯 군데.
운이 좋다면 경유지 어딘가에서 발견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카잔의 수도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색 범위는 대폭 확장될 터.
가능하다면 경유지에서 찾아내길 바랄 뿐이었다.
“마인들이 나온 마을과 노이의 땅이 가깝다고 했죠?”
나는 화제를 돌려 노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네. 카슈타르 남부의 경계선이 그 마을이거든요. 그 너머가 노이의 땅이에요.”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녀석의 땅은 막연하게 신경 쓰였다.
주색잡기 말고는 아무 관심 없는 놈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 녀석이 변경의 땅을 구입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 일대도 한번 살펴보고 싶은데.”
“사유지이긴 한데 사실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예요.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건물이 지어진 것도 아니니까요.”
요는 상관없을 거란 얘기였다.
“그렇다면 살펴보고 와도 될까요?”
“안 피곤하세요?”
“저야 뭐… 익숙하니까.”
“아, 그럼 저도 준비할게요. 언제 출발하실 거죠?”
로제는 자연스럽게 동행을 확정지었다.
“내일 아침에 갈까 하는데, 로제 님이야 말로 안 피곤하세요?”
출발 시간을 묻는 로제의 말에 나는 다시 반문하며 상태를 물었다.
“네, 저도 괜찮아요.”
사실 누가 동행하든 상관없다.
걸을 줄만 알면 되니까.
시키는 대로 말만 잘 들으면 그걸로 동행의 조건은 만족된다.
하지만 로제의 경우는 조금 다른 듯했다.
“그 왕가슴… 아니, 그 세 분도 함께 가시겠죠?”
“왕 뭐요?”
“뭐가요? 저는 그 세 분이라고 했는데요? 아무튼 다들 가시는데 제가 감시, 아니, 빠질 수 없죠.”
“방금 감시라고?”
“감사하다고 한 거예요.”
하… 이거 개울가에서부터 느낌이 싸하다 했다.
별 보러 갈래도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더라니.
“아무튼 출발 전에 말씀해 주세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방식은 다르지만 두 여자의 경쟁이 시작된 건 확실한 것 같다.
이 죄 많은 인생을 어찌할까.
마주하는 여자들마다 죄다 이런 식이니 존재 자체가 큰일이다.
“아참, 리베에 소포를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반짝거리는 로제의 눈을 보며 나는 다시금 화제를 바꿨다.
“아, 집사에게 부탁하시면 돼요. 작은 거라면 전서조를 통해 보낼 수도 있어요.”
돌아온 로제의 말에 나는 엉성한 나무 상자를 꺼내 로제에게 내밀었다.
상자라고 말하긴 좀 그런가?
신령목 조각으로 대충 조립한 것이니 조악한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음이다.
하지만 그 안에든 내용물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발견한 뼈예요. 진짜 마족의 뼈인지 확인해 보려구요.”
이런 거라면 역시 베르 아니겠나.
일단 보내 놓으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알아서 찾아내 줄 것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가는 길에 집사에게 맡길게요.”
하여 나는 상자를 맡겼고,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창가로 다가가 생각을 이어 갔다.
노이 데 페이소스.
놈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 녀석을 움직인 흑막은 분명히 따로 있을 것이다.
나의 예감은 자꾸만 카리프를 떠올렸다.
접점이 없던 사라센의 카리프와 페이소스 후작가의 만남.
한쪽은 망해 버린 귀족의 적자이고, 다른 한쪽은 왕실에 묶인 세도가였다.
아니, 고상한 표현은 때려 치자.
그냥 돈이 필요한 놈과 무력이 필요한 놈들이 만난 것이다.
마치 불과 기름처럼.
그리고 나는 불나방이 되어 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언제 나타날래.’
타 버려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다.
놈을 만나서, 무력했던 그날의 기억을 바꾸고 싶었다.
* * *
다음 날 오전.
아침 일찍 성을 나온 우리는 노이의 땅을 향해 말을 달렸다.
선두를 달리는 나의 곁엔 로제가 있었고, 도로시와 반투족이 후미를 따라오고 있었다.
“저 마을에서 쉬었다가요. 노이의 땅에 들어가면 정말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휴식을 권하는 로제의 말에 우리는 말머리를 돌려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아이고 아가씨께서 어쩌자고 이 누추한 곳을!”
촌장의 극진한 환대와 함께 마을 유일의 객점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나저나 오늘 귀한 분들이 저희 마을을 찾아 주시네요.”
“귀한 분들이라니요?”
“아가씨 오시기 직전에 한 분이 더 오셨습니다요.”
촌장의 대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객점의 문이 활짝 열렸고.
“어라? 이게 누구야.”
우리는 기름기 가득한 면상을 보며 표정을 구겨야 했다.
“노이?”
곁에 있던 로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말해 뭐 하겠나.
로제의 저 얼굴은 두말할 것 없는 혐오감의 표현이었다.
“옆에 있는 이놈은 뭐지? 왜 남의 신부 옆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하지만 노이는 그런 로제를 가리켜 신부라고 말했다.
“누구 맘대로 신부예요!”
격노에 가까운 로제의 반응에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내 앞으로 다가와 눈알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아리송한 말까지.
“아, 시발. 뭐가 이렇게 잘생겼어……. 이 새끼 뭐하는 놈이야?”
녀석은 나와 로제를 번갈아 보며 막말을 뱉어 냈다.
살기 싫은 모양이다.
가당치 않은 녀석의 작태에 나의 이성이 서서히 비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가문의 귀한 손님입니다!”
참다못한 로제가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항의했다.
그에 노이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으니.
“이 반응은 뭐지? 설마, 둘이 붙어먹은 거야?”
녀석은 지난 회 차와 마찬가지로 저열한 속내를 마음껏 드러냈다.
개가 똥을 끊지.
타고난 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여간 녀석은 선을 넘었고.
“미쳤네.”
“아가리 닥쳐라, 오크 대가리.”
두 여자를 열받게 만들었다.
말투만 들어도 감이 온다.
‘미쳤네’는 로제였고, ‘오크 대가리’는 별이었다.
씩씩거리는 로제를 밀치며 별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앞으로 나서서는.
“누구 맘대로 저 둘을 교미시키는가?! 이반의 처음은 나의 것이다!”
이런 개소릴 지껄이며 턱 끝을 치켜들었다.
“미친놈…….”
황당한 별의 외침에 객잔은 폭풍한설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아우, 교미…….”
로제는 두 뺨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고, 멍하게 서 있던 노이가 주둥일 삐쭉거렸다.
“훗, 애송이였군.”
이거 왜 이렇게 초라해지는 걸까.
“누가 처음이래!”
알 수 없는 자괴감에 고함을 지르며 곁에 있던 별을 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노이와 나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초면에 함부로 나불거리면 안 되지.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빈정대는 놈의 면전에 대고 차갑게 말을 건넸다.
급격하게 치솟는 살벌한 긴장감.
대답 없는 녀석의 뒤에서 은빛 검이 소리 없이 뻗어 나왔다.
“네놈이야 말로 큰일 나겠네. 이분이 누구신줄 알고 까불어? 너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어?”
칼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긱스였다.
지난 회 차의 그놈.
반투족을 괴롭히던 노이의 최측근이었다.
“아니야. 너는 아니라고.”
나는 손을 저으며 녀석을 돌려보냈다.
급이 다르니까.
“조무래기들 다 빠지고 진짜를 데려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노이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 네 글자.
“이 새끼가.”
긱스는 칼을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가볍게 해머를 휘둘렀고.
“더 센 놈 데리고 오라니까?”
허공을 가르던 녀석의 검은 객점 구석으로 처박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