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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57화 (57/203)

57화

먼저 간 술과 부족장을 따라 남은 일행들도 마을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작아 보이는 아담한 규모의 마을.

띄엄띄엄 지어진 오두막들을 보니 마을이 아닌 촌락에 가까운 형태였다.

문제는 인기척이 없다는 것.

“사람이 안 보인다.”

먼저 도착한 부족장과 술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상하다 얘기했다.

“집집마다 다 두드려 본 거야?”

“입구 근처의 집은 다 찾아봤다. 그런데 형제가 한 번 봐라. 이 시간에 밥 짓는 연기 하나 없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부족장의 말마따나 살림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연기 나는 굴뚝은커녕 열려 있는 창문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게 뭔 대수냐 싶겠지만, 그냥 닫힌 게 아니라 판자로 막아 놨으니 하는 말이다

마을 전체가 그랬으니까.

유일하게 멀쩡한 집은 정면에 보이는 작은 오두막 한 채뿐.

그 외의 다른 집들은 모두가 똑같이 판자로 막혀 있었다.

“이상한 마을이네.”

괴의쩍은 심경을 달래며 성한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려진 마을일까?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버려진 그런 거 있잖은가.

그렇게 하나둘씩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집을 폐쇄해 둔 거지.

지금 향하는 오두막은 마지막 주민의 집인 거고.

…라는 상상은 이쯤에서 접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우리는 아담한 오두막에 들어와 여장을 풀었기 때문이다.

딱히 거슬리는 게 없는 평범한 내부.

들어온 오두막은 흔하디흔한 시골 오두막 그 자체였다.

“특이점이 없는 게 특이점인가?”

굳이 트집을 잡자면 어수선한 실내와 활짝 열린 창문 정도다.

하나 마을을 버리고 가는 마당에 그깟 뒷정리가 뭔 대수였겠나.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문제될 만한 구석은 딱히 없는 집이었다.

“일단 저녁을 해 먹자고.”

“좋아, 그렇다면 내가 특별 보양식을 해 주지.”

“술 너는 빠지고.”

저 녀석에게 맡겼다간 무슨 해괴한 음식이 나올지 모른다.

부족장은 할 줄 아는 게 밀가루 부침뿐이고, 나 역시 호밀 빵 뜯기와 고기 굽는 게 가능한 요리의 전부다.

그리고 별은…….

“또 내가 나설 차롄가.”

주방으로 향하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동작 그만.”

요리는 개뿔.

무슨 엄청난 요리를 하려고 대검을 뽑아 든단 말인가.

그러니 별도 탈락.

로제는 정신부터 차렸으면 좋겠고, 남은 후보는 도로시뿐이었다.

그런 도로시의 요리 실력은.

“크아… 국물이 그냥!”

끝내주게 훌륭했다.

숙련도가 느껴지는 뛰어난 맛.

이거야 말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상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니 있는 대로 긁어 먹을 수밖에.

괴상한 점심으로 허기졌던 몸은 도로시의 음식으로 위안을 찾아갔다.

맛은 사치라던 부족장도.

생식이 최고라던 술 녀석도.

“와… 배터지겠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기분 좋은 포만감에 배를 두들겼다.

그야말로 등 따시고 배부른 행복한 상황이다.

적당한 자리에 앉은 나는 피곤한 몸을 기대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벌써 어두워졌네.’

때를 맞춰 켜지는 마력 등의 노란 불빛.

누군가로 시작된 작은 수다는 너도나도 끼어들며 대화의 장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지금 나의 옆에는.

“계속 거절했죠!”

어느새 다가온 로제가 핏대를 새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대상은 후작가의 망나니였다.

“하여간 노이 그 인간은 말종이에요. 생각과 행동 모두가 정상이 아니죠.”

노이 데 페이소스를 향한 로제의 감정은 거부를 넘어선 혐오의 수준이었다.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바.

“거참 몹쓸 놈이군요.”

로제의 말에 동조하며 거친 감정을 쏟아 냈다.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내 목숨을 가져간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명문가에서 쓰레기를 키웠네.”

“바로 그거예요! 가문의 명성이 인격을 대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빈정대는 나의 말에 로제는 손뼉을 치며 격하게 공감했다.

개울가의 충격은 이제 벗어난 걸까.

로제의 신랄한 노이 때리기는 새로운 화제와 함께 도마 위로 올라왔다.

“며칠 전 후작가에서 땅을 매입했어요.”

“땅을요?”

“네. 저희 영지 인근인데 여기서 멀지 않아요.”

“아, 그랬군요.”

사실 이 대목에선 적당히 반응하고 넘어갔다.

귀족이 땅 사는 게 무슨 큰일이겠나. 그런 것까지 물고 뜯기엔 감정 낭비가 너무 심한 것이다.

이를 테면 집착이랄까.

하나 설명을 이어 가는 로제의 표정은 그런 감정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어차피 영지 용도로 사용하진 못해요. 페이소스 후작가는 왕도에 속해 있으니까요. 기껏해야 개인 사유지인데…….”

로제는 말끝을 흐리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심각한 뭔가가 있는 건가?

저토록 고민할 내용이라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예를 들자면 바로 이런 것.

“그 땅의 소유주가 노이에요.”

이 의문의 핵심은 ‘땅을 샀다’가 아니었다.

“데릴사위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노이의 이름이 나온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사전 준비였다.

나쁘게 말하면 설레발이랄까.

궁극의 목적은 모르겠으나, 로제와의 결혼이 전제임은 확실해 보였다.

그도 아니라면 곁에서 괴롭히려는 치졸한 수작이든가.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서야, 외딴 접경지를 사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관심 있게 살펴보는 게 좋을 같아요.”

“그래야 할까요?”

“네. 노이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아닌 것 같거든요. 뭔가 찝찝하네요.”

땅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결정과 판단은 그녀 가문의 몫.

“이반 님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 녀석이 생각이란 걸 했을 리가 없죠.”

그 이상을 논하기엔 주어진 정보가 부족했다.

그렇게 대화는 정리되었고.

결론을 내린 로제와 나는 고개를 돌려 떠들썩한 식탁을 바라보았다.

“이 얘기는 사실이다.”

“말도 안 돼. 진짜로 그랬다고요?”

요란한 대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술이었다.

녀석의 주위로 별과 부족장, 그리고 도로시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가끔씩 술에 취해 이상한 걸 사오시곤 했다. 한번은 똥개를 워 울프 새끼라고 사 와서 애지중지 키우셨지.”

“워 울프? 워 울프가 뭐예요?

“선택받은 전사만 태운다는 전설의 늑대다.”

“아, 늑대.”

도로시의 친화력은 의외로 뛰어났다.

반응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장단 맞추는 재주가 뛰어나 말하는 상대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다분히 훈련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게 뭐 어떤가.

저런 모습이라면 어딜 가도 환영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좌우지간… 흠,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똥개를 사 온 부분까지요.”

“아, 기억력이 훌륭하군. 하여간 두 달을 꿋꿋하게 키우시더니 어머님과 함께 솥을 들고 산으로 가셨다.”

“설마…….”

“그렇다. 부모님은 저녁에 돌아오셨고, 10개월 뒤 동생이 태어났다.”

“와우…….”

“그날 개만 안 잡았어도…….”

“강아지가 불쌍해요.”

“아니, 내 동생의 이름이다.”

하여간 자식에 대한 후회가 참으로 많으셨던 모양이다.

술과 똥개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생명이라니…….

“먼저 잘 테니 순서 되면 깨워 줘.”

불침번을 당부한 나는 구석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누굴까.

늘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는 여인은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던 걸까.

해맑게 웃던 날이나.

슬프던 그 어느 날에도.

신비로운 이 여인은.

감춰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느낌으로 마주할 뿐.

―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구나.

안부를 묻는 여인의 목소리는 소리도 없이 나에게 전해졌다.

그냥 생각이 들어온 건가.

들려오는 건 확실한데 어떤 음성인지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또한 막연한 느낌.

실체 없이 파고드는 이 소리는 가슴을 뒤흔들며 애잔한 감정을 이끌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보고 있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나 알 수 있었다.

― 보고 싶었단다.

늘 그리워했다는 걸.

짧게 스치는 이 한마디는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이며, 왜 나를 찾아오는 건지.

당신 뒤에 선 그 남자는 어째서 아무 말도 없는 것인지.

그리고 나는.

왜 이토록 뭉클해지는 건지.

― 사랑한다, 아이야.

가끔씩 찾아오는 나의 꿈은 늘 같은 말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야심한 시간.

잠에서 깬 나는 이마 위로 팔뚝을 올려 깊은 여운을 달랬다.

하나 부질없는 일.

이렇게 눈을 뜬 날에는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적당한 얼굴로 보여 주면 될 것을.

‘쓸데없이 진심이네.’

본 적 없는 부모의 얼굴은 꿈에서조차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현실 반영이라니.

씁쓸함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은은하게 퍼지는 마력 등의 불빛…….

로제와 도로시가 근처에서 잠들어 있었고, 반대편 벽 쪽으로 부족장과 술이 구겨져 있었다.

왜 저렇게 자는 걸까.

자는 모습이 불쌍해 보이는 건 저놈들이 처음인 것 같다.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불침번 중인 별의 모습이 보였다.

현관 옆 창가에 기댄 장신의 여인.

흉갑을 벗은 별은 먼 곳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교대하자. 그만 가서 쉬어.”

곁으로 다가선 나는 해머를 내려 벽에 기댔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없었고, 창밖을 응시하던 별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꼿꼿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엇을 저리 열심히 보는 걸까.

“가서 쉬라니까?”

재차 휴식을 권유하며 덩달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나 보이는 건 새카만 어둠뿐.

“아무것도 없구만.”

구시렁거린 나는 고개를 돌려 별을 바라보았다.

둥그런 이마와 곧게 뻗은 콧날.

선명한 별의 이목구비는 날렵한 턱선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려 내고 있었는데…….

“서서 잔다고?!”

선 채로 잠든 녀석은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터.

다재다능한 일족의 능력은 구겨져 잠자는 놈들과 서서 자는 녀석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일어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리 가서 자.”

나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잠든 별을 깨웠다.

반응이 없으니 똑같이 다시 한번 더.

“일어나라고.”

움찔거리던 별은 그제야 감은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

하지만 별의 눈꺼풀은 다시 내려앉았다.

“야야!”

나는 무너지는 별을 붙잡아 창틀에 기대 세웠다.

순간 휘감겨 오는 긴 팔.

비몽사몽 중인 별의 두 팔이 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좋은 향기가 나는군…….”

그러고는 진한 숨결을 내쉬며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허어억…….”

갑작스런 별의 행동에 나는 통나무가 되어 버렸다.

좋은 향기라니.

‘뭐, 뭐지?’

사내놈이라 여겼던 별의 모습은 밤이라는 시간 속에서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해야 했다.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니까.

들러붙는 별을 밀어내며 가까운 벽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조심스레 한 걸음… 또다시 한 걸음.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숨죽이며 창문을 지나쳤다.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나 싶던 그때.

“왁! 시발 깜짝이야!”

무심결에 바라본 창밖으로 시뻘건 눈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솟아오른 검은 혈관들…….

“마, 마을 주민?”

그랬으면 좋으련만 나의 추측은 틀린 것 같다. 인간의 입이 저렇게 벌어지진 않을 테니까.

예민해진 나의 감각은 경종을 울리며 대비를 강요했다.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고.

크아아아아아아악!

이빨을 드러낸 괴인들이 창문을 부수며 달려들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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