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뭐라고요?”
“저도 따라간다고요.”
“왜요?”
“왜는요. 저희 가문의 영지인데 이반 님께만 의지할 순 없잖아요.”
갑옷을 차려 입은 로제는 성문 앞에 서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보다시피 동행하기 위해서였다.
화전민 마을에서 보았던 그날의 모습이 이곳에서 재현되는 것 같은데…….
나는 조용히 도로시를 바라보았고.
“…….”
도로시는 먼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말리지 그랬어요.”
“말린다고 안 가면 아가씨가 아니죠. 결심하면 아무도 못 막아요.”
그래, 저 친구가 무슨 힘이 있겠나. 주인이 가면 따라나서는 거지.
나는 시선을 돌려 로제를 바라보았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다만.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반 님이 구해 주세요.”
수줍던 로제의 모습은 지난밤을 끝으로 사라진 듯했다.
모든 것이 폭로됐으니까.
반크스의 입에서 가슴 얘기가 나왔을 땐, 서서 기절하는 로제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갑옷을 입은 로제는 달라진 분위기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내숭이 사라진 느낌?
요조숙녀를 버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진 모습이었다.
‘나야 이쪽이 편하지.’
복잡한 귀족의 영애보단 솔직한 지금이 부담 없긴 했다.
“아버님께 허락은 받은 건가요?”
“물론이죠. 이제부터 우리는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거예요.”
“특혜는 없습니다.”
“당연하죠.”
모두 합해 여섯 명.
그렇게 우리는 카슈타르 남부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목적지는 소탕을 마친 던전 인근으로, 그곳부터 시작해 서쪽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그나저나 함께하는데 이름도 아직 모르네요. 이쪽에 계신 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나와 별 보러 갈래.”
“…갑자기요?”
이후의 과정은 생략하겠다.
나를 죽이고 가라는 부족장의 말에 ‘싫어욧!’ 하고 소릴 질렀고, 그날 밤 술만 안마셨어도… 라는 말에 ‘그래서요?’라고 대답했다.
예정된 수순이랄까.
저 얘기가 이름이란 걸 알기까진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야 했다.
그리하여 내려진 결론은 이랬다.
“‘별’님.”
이것은 나와 별 보러 갈래였고.
“‘술’님.”
이것은 그날 밤 술만 안 마셨어도였다.
“나는? 나는 왜 부르지 않는 건가?”
“부족장이라면서요. 부르기 쉬운 호칭이 있는데 굳이 이름을 줄일 필요가 있을까요?”
호명되지 않은 부족장은 뾰로통한 얼굴로 불만을 드러냈다.
“부족장의 자격도 이미 잃었다. 차기 족장은 ‘셋 셀 동안 눈 깔아’에게 갈 테니까.”
“그것도 이름인가요?”
“무얼 말하는 건가. 눈깔아를 묻는 건가?”
“이름이 맞구나…….”
심오한 반투족의 세계관에 로제는 이해하길 포기한 듯했다.
힘없이 주억거리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부족장님은 지금이 좋은 것 같아요. ‘나’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죽이라고 말하긴 더 이상하니까요.”
“흐음…….”
“자격을 잃었다는 부족장의 자리도 되찾아야죠? 안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니 호칭은 바꾸지 맙시다!”
하여 세 사람의 이름은 모두 더해 5글자로 통합 되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 걸.
긴 이름이 귀찮아 ‘야’ 또는 ‘너’라고만 불러왔었다.
줄어든 호칭도 평범한 건 아니지만.
“별아.”
“하… 이 다정함은 뭐란 말인가.”
“술.”
“왜 그러나?”
확실히 이건 혁명에 가까운 편리함이었다.
‘야’라고 할 때 셋이 돌아보는 건 공포에 가까웠으니까.
그 징글징글한 모습을 안 봐도 된다니 속이 다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계속 달렸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목적지에 도착해 탐색을 준비했다.
“그거 작동되는 건 맞지?”
“말이라고 하는가. 반투족 풍수사인 아버지의 비전이다.”
90도로 꺾인 쇠꼬챙일 들고 별은 앞으로 나섰다.
탐지봉을 들고 있는 높이는 대략 허리쯤.
앞으로 내민 양손 위로 두 개의 탐지봉이 가늘게 떨렸다.
“이걸로 어떻게 찾아?”
“용맥이 지나가면 탐지봉이 반응하는 원리다. 가까울수록 안으로 크게 움직이지.”
질문에 답한 별은 접경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시술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2일차.
극심한 고통을 감내한 카리프는 실험실을 나와 긴 사마르를 마주했다.
“수척해 보이는군.”
“…….”
상태를 묻는 그의 말에 카리프는 조용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지금 카리프의 몸은 금이 간 유리병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오늘은 유달리 힘들더군.”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잘 버티는 거라네.”
지친 카리프의 말에 사마르는 긴 흑발을 넘기며 무심히 대답했다.
사라센 제1흑마탑의 주인이자 흑마법계의 수장인 사마르.
촛불처럼 흔들리던 카리프의 삶은 이 남자를 만나 화염으로 변했다.
“자네의 정신력이 강해서 그렇겠지. 이대로라면 8성에 이를 날도 멀지 않았다네.”
축 늘어진 카리프를 보며 사마르는 희망적인 소견을 드러냈다.
“다른 지원자들은?”
“결과야 다양하지. 순조로운 녀석도 있고, 광인이 된 녀석도 있다네.”
“마살라는?”
“후자라고 봐야겠지.”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카리프는 조용히 이마를 감싸 쥐었다.
심장을 죄어오는 끔찍한 비보였다.
몰락한 주인을 지키던 마지막 충신은 믿을 수 없는 결과로 소식을 전해 왔다.
― 도련님… 우리 버팁시다. 개처럼 버텨서 보란 듯이 재기하는 겁니다.
그런 그가 광인이 됐다니…….
가슴 한구석이 떨어져 나간 듯,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설 순 없는 일.
“그를 만날 수 있겠소?”
표정을 지운 카리프는 냉랭한 말투로 만남을 요청했다.
이별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랄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혈육과도 같았던 그의 최후를 두 눈에 담길 원했다.
“좋을 대로 하게.”
카리프의 청은 수락되었고.
“적응에 실패한 사람들은 지하에 있다네.”
무저갱 같은 지하를 향해 끝없는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드러나는 바닥 층.
굳게 닫힌 철창 사이로 초췌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열어 주시오.”
“그 생각은 말리고 싶군. 자네가 다칠 수도 있다네.”
“상관없소.”
사마르는 말없이 카리프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에 흐르는 매서운 안광. 노년을 앞둔 사마르는 긴 흑발을 넘기며 철창으로 다가섰다.
덜컹―
큰소릴 내며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들어가게.”
철문을 젖힌 사마르는 낮은 목소리로 만남을 허락했다.
무엇을 망설일까.
내딛는 카리프의 걸음엔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그렇게 그는 유일한 친구 앞에 조용히 다가섰다.
서서히 고갤 드는 마살라.
“…….”
미쳐 버린 충신의 눈이 주인의 얼굴로 향했다.
“마살라.”
카리프는 마지막을 앞둔 부하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
거칠어진 카리프의 손이 마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마살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투박한 손길을 멈춘 카리프는 그대로 돌아서 묵묵히 지상으로 향했다.
철문은 다시 굳게 닫혔고.
“데스.”
남아 있던 흑발의 남자는 짧은 주문을 외워 검은 안개를 소환했다.
* * *
“이야, 이게 진짜 되네?”
“당연한 것 아닌가. 무려 30년을 이어 온 기술이다. 세속인들의 마법과는 괘를 달리하는 심오한 비법이지.”
30년을 묵은 심오한 비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신통한 것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처음이야 얻어걸렸다 쳐도 반복되면 입장이 바뀌는 법이다.
덕분에 소규모 마굴 하나를 쉽게 토벌할 수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마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아 하니 여기도 생긴 지 얼마 안 됐네.”
입구 자체가 좁은 것이 기껏해야 한 시간짜리다.
출몰하는 몬스터도 하급들뿐.
삼인조와 로제를 후방에 두고 나는 불붙은 망아지처럼 마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삼신기의 수련도 박차를 가했으니.
[내려치기 숙련도 2,938/10,000]
[휘두르기 숙련도 2,992/10,000]
[올려치기 숙련도 2,829/10,000]
삼천을 목전에 둔 숙련도는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성장을 반복했다.
실전의 효과랄까.
개인 수련이 없었음에도 숙련도의 숫자는 제법 상승해 있었다.
‘오래 놔두긴 했네.’
사실 화조의 둥지 원정부터 기본기 수련에 소홀하긴 했었다.
먼 거리를 이동 중이니 뒤로 미루고, 원정 이후론 화상 치료를 이유로 미뤄 두었다.
그렇게 흘러 카슈타르 원정까지.
3주에 가까운 시간을 설렁거린 건 변명할 여지없는 나의 게으름이었다.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숙련도 삼천이 코앞이니 이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뭔가 큰 보상이 나올 터.
케에에엑!
마지막 남은 마굴의 몬스터는 단말마와 함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늦은 오후.
마굴을 나온 우리는 다음 목표를 찾아 이동을 계속했다.
얕은 능선을 지나 짙푸른 숲으로, 그렇게 다시 걸어 너른 평원까지.
긴 이동에 지친 사람들은 자연스레 쉴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여 마주하게 된 작은 개울가.
신발을 벗어던진 나는 투명한 개울물에 두 발을 담갔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아…….”
혹사당한 두 다리는 천국을 노닐었고, 나의 입에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어지는 삼인조의 합세까지.
“우리도 간다!”
“어머! 옷은 왜?!”
드러누운 나를 따라 너도 나도 개울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고생 끝에 찾아온 소소한 행복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큼은 이 순간을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제 데 카슈타르.
유체 이탈 중인 로제의 시선은 흉갑을 벗은 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허얼…….”
벌어진 그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고, 극과 극의 여인은 상반된 표정으로 서로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1차전은 완벽한 별의 승리였다.
대충 봐도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별은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인가 보다.
아주 확실하게 말이다.
‘미친…….’
물속으로 들어간 별은 빠르게 고개를 들어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렇다.
저것은 봉인 해제의 순간이었다.
흉갑에 감춰져 있던 무시무시한 몸매가 물에 젖은 셔츠와 함께 환상적인 자태를 만들었다.
저 엄청난 모습에 나 또한 얼마나 큰 곤욕을 치렀던가.
흐르는 물기를 닦던 별은 셔츠를 붙잡아 가볍게 쥐어짰다.
밀착된 셔츠는 이제 터지기 직전.
“아가씨!”
달려온 도로시는 손수건을 꺼내 로제의 침을 닦아 냈다.
* * *
개울가를 떠난 우리는 또다시 말을 몰아 고즈넉한 공도에 발을 디뎠다.
넓진 않지만 잘 정비된 도로였다.
“이 일대는 잠잠하네.”
곧게 뻗은 길을 바라보며 나는 심드렁하게 말을 꺼냈다.
잠잠한 수준을 넘어섰으니까.
살아남은 생명이 우리뿐이라면 분명히 세상은 이랬을 것이다.
“그러게요. 저희야 지루했지만, 영주의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이죠.”
미소 짓는 얼굴이 슬퍼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영혼이 사라진 로제는 목각 인형 같은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까.
당신은 앞뒤가 똑같지만, 지적이고 아름다우니 기운 내세요.
…라고 말할까?
아니면, 앞으로 누워도 편하고 뒤로 누워도 편하니 이 얼마나 좋은가요.
…라고 위로할까.
젠장, 집어치우자.
애초에 내가 나설 영역이 아니니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다.
“아… 어쩜 이렇게 하늘이 푸를까요. 보고 있으니 제 마음도 맑아지는 것 같네요.”
이것도 대답하지 말자.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푸르름을 찾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지금 필요한 처방은 적당한 곳을 찾아 일찍 재우는 것뿐이다.
따듯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새벽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
멀쩡한 지붕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곳처럼 말이다.
“오∼ 마을인가 보군. 내가 먼저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는 부족장을 살피겠다!”
크게 외친 술과 부족장은 고삐를 채며 말을 달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