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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55화 (55/203)

55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든 적든 마나와 이어져 있다.

마치 공기와도 같달까.

그것은 대기에 녹아 있고, 사람이나 식물, 혹은 몬스터를 통해 다시 자연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평범한 자연의 섭리다.

그렇게 순환을 반복하던 마나가 대지에 스며들고, 어느 한 점에 모여 응축되면 마력으로 성질이 변하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흐르는 것을 용맥이라고 하는데, 존재하는 모든 마굴과 던전은 이러한 용맥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형성된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러한 상식이 변해 생긴 일이었다.

“이 시커멓고 진득한 게 오염된 용맥이라는 거지?”

문제의 발단은 이것이었다.

순수한 마력의 집합체인 용맥에 마기가 스며들었고.

“여기가 그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

오염된 용맥이 이 던전을 만든 것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마기의 기운이 너무 강하다.”

부족장은 투덜거리듯 답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은 명백한 반항의 표현이었으니.

“긴장 풀렸네?”

“허억…….”

싸늘한 나의 말투에 녀석은 숨을 들이키며 눈동자를 굴려 댔다.

“아, 아니다.”

“뭐가 아닌데.”

“긴장… 그거 안 풀렸다.”

“안 풀렸는데 왜 그래?”

이어지는 녀석의 변명에 나는 꼬투릴 잡으며 끈질기게 압박했다.

또다시 시작되는 개미지옥.

“말하다 보니…….”

“말할 땐 긴장 풀어도 돼?”

“아니다.”

“아닌데 왜 인상 써?”

“그런 적 없다.”

“눈깔 흔들리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면 인상 써도 돼?”

“아, 아니다.”

“아닌데 왜 그랬어?”

“잘못했다.”

부족장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구원의 눈빛을 날렸다.

허나 그의 시선은 외면당했고.

“…….”

술김에와 별 보러 갈래는 먼 곳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어색해져 가는 세 사람의 공기.

“배신자 놈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부족장이었다.

그에 술김에가 반응했으니.

“아까 부족장이 이렇게 말했다. 이반은 힘만 센 돌대가리라고.”

“저 개색…….”

부족장은 고개를 돌리며 슬그머니 뒤돌아섰다.

“거기 정지.”

“살려다오!”

당연히 살려 주지. 설마 동료를 죽이기야 하겠나.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가자, 진실의 방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조용한 대화일 뿐이었다.

* * *

“제 얘기는 기회를 달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결정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주한 제논 백작을 보며 로제는 꼿꼿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칭얼대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가문만 번듯한 쓰레기에게 카슈타르를 넘기실 생각인가요?”

로제는 날선 비판을 섞어 가며 아비인 제논 백작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부녀 간의 신경전.

“뜻한 바가 있으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니요. 생각이 너무 많으셔서 올바른 생각을 못 하시네요.”

처음 보는 로제의 태도에 제논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투정을 부리긴 했어도, 이런 적은 없던 딸이었다.

하물며 이런 강경한 모습이라니…….

“아버지는 조금 쉬셔야 해요.”

전에 없는 로제의 모습에 제논 백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노이가 정치적 야심이 없는 건 저도 인정해요. 머리에 똥만 들어찼으니까요. 하지만…….”

흐려지는 로제의 말에 제논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질 말이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더럽힐 가문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끝내세요. 최소한 명예는 남을 테니까요.”

차마 말할 수 없던 그의 본심은 제 엄마를 닮은 로제의 입에서 명료하게 흘러나왔다.

가문의 보존과 딸의 행복을 두고 그 얼마나 고심했던가.

수많은 시간을 자문자답하며 법률까지 바꿔 보려 했던 그였다.

하지만 기득권 가득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그의 목숨은 시한부 판정마저 받게 되었다.

하여 비장한 심정으로 내린 마지막 선택.

후작가의 망나니라면 그의 뜻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문을 지키며 로제의 정치력을 유지하는 것.

파락호 같은 놈이었기에 가능한 상상이었다.

녀석이 원하는 건…….

오로지 술과 여자였으니까.

그저 돈 몇 푼과 방임이면 해결될 일이었고, 후작가는 커다란 배경이 될 터였다.

분명히 그리될 것인데.

결심을 실행에 옮길수록 제논의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하기만 했다.

“데릴사위로 이어 가 봤자 우리 혈통도 아니잖아요. 핏줄이 바뀌는데 가문의 이름은 무슨 소용일까요?”

로제는 굳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백작의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과연 옳은 결정인 걸까…….

가문은 그저 핑계일 뿐.

어쩌면 이 모든 건… 죽음을 앞둔 남자의 하찮은 아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바뀔 혈통이면 행복이라도 찾고 싶네요. 아니면 태어난 걸 후회하면서 살든가요.”

돌아서는 로제의 뒷모습에 제논 백작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 * *

던전을 나온 우리는 성도를 향해 말을 몰았다.

다소 느긋하게.

거리야 멀지 않으니 이렇게 가도 충분했다.

적어도 해질녘엔 도착할 터.

터벅거리는 말 위에서 우리는 오염된 용맥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주된 내용이라면 역시나 파급력.

문제는 용맥이 흐르는 방향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범위를 유추할 방법은 없다. 의심 가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밖에.”

“이 접경 지역을 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땅속이 보이는 것도 아닐 테니까.”

우악스런 방식이지만, 달리 대체할 수단도 없었다.

그저 예측하고.

즉시 움직인다.

헤미르 영지야 내 알바 아니니, 범위는 얼추 정해진다.

이후로는 마물이 생기기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서는 것.

이를테면 묘지나 옛 사냥터, 또는 인적이 끊긴 곳이 대상이 될 것이다.

“일단 그런 곳을 찾아가서 도구를 사용하면 된다.”

“무슨 도구?”

“용맥 탐지봉이다. 용맥을 찾으면 탐지봉이 반응하는 것이지.”

부족장은 덤덤한 얼굴로 쓸 만한 정보를 꺼내 놓았다.

저게 사실이라면 탐색은 훨씬 수월할 터.

“형제의 해머가 오러에 저항하듯, 탐지봉 또한 마력에 민감한 물체로 만든 것이다. 우리 부족에선 집터를 잡을 때 꼭 그걸로 살펴 봤지.”

부족장의 말을 받아 술김에가 설명을 보탰다.

“별 보러 갈래 아버지가 부족의 풍수사였다. 자매가 거기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 그녀에게 맞기면 된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별 보래 갈래는 턱 끝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훗…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코웃음을 친 녀석은 잔망스런 모습으로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뜸들일 게 뭐 있겠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고, 저 표정은 주먹을 부른다.

그러니 후딱 대답할 수밖에.

“너를 원해.”

성급하게 나온 나의 대답은 도움이란 주어를 빼먹은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순간 흔들리는 녀석의 눈동자.

“비겁하게 기습이라니…….”

별 보러 갈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요즘 들어 자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갱년기군.’

툭하면 빨개지는 얼굴이, 부족장이 말한 증상과 많은 부분 일치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중년의 병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녀석의 어깨를 다정이 토닥였다.

“후… 날씨가 덥군.”

시원한데 뭐가 덥다는 걸까.

앞서가는 녀석을 따라 우리는 성도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날 오후.

예상대로 우리는 해질녘에 이르러 카슈타르 성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목적지는 성내의 식당.

집사를 따라나선 술김에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랑했다.

“내 팔자엔 먹을 복이 많다고 했다.”

식복을 타고났다고.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저녁 식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벌써 돌아오다니, 다들 실력이 대단한가 보오.”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겸손이오. 던전으로 진화했다면 규모가 꽤나 확장됐을 터. 그것을 하루 반나절만에 소탕했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식탁에서 마주한 제논 백작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노고를 치하했다.

어딘가 모르게 살가워진 느낌이었다.

‘영지 사정이 많이 빠듯했나 보네.’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백작의 태도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랄까.

형식적인 귀족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옅어졌다.

내 입장에서야 환영할 만한 일.

“소탕은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나는 이룬 성취를 뒤로하고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었다.

중요한 건 소탕이 아니니까.

“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형성되니 방심할 순 없겠구려. 하지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니 우리가 잘 관리해 보겠소.”

제논 백작은 모범적인 대답으로 나의 말에 반응했다.

하나 인간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것.

“그것보다는 대수림 접경 지역을 꼼꼼히 살펴보시면 좋을 듯싶습니다.”

나는 의심되는 정황을 백작에게 전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접경 지역을 통해 오염된 용맥이 유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염된 용맥이라 했소?”

“네. 던전 심층부에서 확인했습니다. 마기가 침식하여 심하게 오염됐더군요.”

설명을 듣던 백작의 표정이 일순 무거워졌다.

이유는 아마도 마기 때문일 터.

짙은 마기의 침식은 마주한 모든 것을 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

“접경 지역을 확인한 뒤 인근 마을들도 살펴봐야 합니다.”

주시하는 제논 백작을 향해 우리의 결론을 전달했다.

“흐음…….”

백작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파병으로 인한 인력 부족이 더욱 크게 다가올 터였다.

그러니 또다시 나설 수밖에.

“영내의 상황이 편치 않으시니 저희에게 맡겨 주시죠.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편안하게 탐색을 자처했다.

도움이란 상대가 아쉬울 때 가치가 매겨지는 것.

“허허… 이렇게 계속 신세를 지게 돼서야… 면목이 없구려.”

제논 백작은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나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대가는 화기애애한 시간.

가벼운 담소와 함께 저녁 식사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식당을 나왔고.

“저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로제는 나를 작은 후원으로 안내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로제는 자신이 당면한 사정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내용이야 이미 알고 있는 바.

“좋아요. 제가 아버님의 마음을 돌려 보도록 하죠.”

“네. 저는 카잔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서로의 입장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런데, 이반 님.”

“네?”

“만약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시면… 그때는…….”

말끝을 흐리던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조몰락거렸다.

묘하게 흘러가는 수상한 분위기.

“…….”

심호흡을 한 로제는 결심한 듯 나와 눈을 마주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갔고.

“저와…….”

망설이던 붉은 입술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순간.

“오, 여기들 있었구나!”

힘겹게 시작된 로제의 말은 난입한 불청객으로 인해 허무하게 사라졌다.

“외…삼촌?”

황당한 표정을 짓는 로제.

“그래, 아빠는 아니니 네 말이 맞을 게다.”

로제를 지나친 남자는 그대로 걸어 나에게 다가왔다.

8성의 검사 반크스였다.

아리안의 혼이라 칭송받는 그는, 큰 체격은 아니지만 단단한 느낌으로 내 앞에 멈춰 섰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무릇 시간은 변해도 사람은 변치 않는 법.

외조카의 말을 귓등으로 날리며 반크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흠… 자네였구먼, 우리 로제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

내 조카가 널 좋아한다고…….

이번 회 차의 반크스는 회귀 전보다 더욱 강력했다.

거침없는 반크스의 폭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니.

“삼초오오오오온!”

후원을 가득 채운 로제의 비명은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내성 곳곳에 울려 퍼졌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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