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게 뭐야?”
“보면 모르겠나. 저녁 식사다.”
“저녁밥이 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건데?”
나는 수상한 고기를 쿡쿡 찌르며 녀석에게 따져 물었다.
오늘의 식사 당번은 술김에.
녀석은 피가 흥건한 고깃덩어릴 내밀며 저녁 식사라 우기고 있었다.
“그렇게 먹어야 좋아진다.”
“뭐가 좋아지는데?”
“남자에게 좋은 건데 설명할 수가 없군. 후후후…….”
팔짱을 낀 녀석은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씨… 완전 날 거잖아.”
“그래서 몸에 좋은 거다. 아버지께선 이걸 드시고 한 방에 나를 만드셨다.”
“뭘 한 방에 만들어!”
펄쩍 뛰는 나를 보며 녀석은 태연하게 생고길 뜯었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선혈.
“아이쿠, 깜짝이야…….”
식탁으로 향하던 베르는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생식을 하면 죽는 병이 있어서 이건 안 되겠네요.”
“나도.”
“저도요.”
정색하는 베르에 이어 나와 에스카가 말을 보탰다.
거기에 다른 두 반투족까지.
“혐오스럽군.”
“야만스럽다.”
부족장과 별 보러 갈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진심이 가득 담긴 저 표정이라니.
“너희들은 왜? 다들 먹던 거 아니야?”
“누굴 짐승으로 아는가?! 저런 걸 먹는 건 녀석의 집안뿐이다.”
부족장은 핏대를 새우며 같지 않음을 주장했다.
결국 에스카의 수고로 식사는 계속되었고.
“후배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식사를 마친 베르는 손짓을 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그에 나의 걸음도 서재로 향했다.
기다리던 베르의 손엔 두 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스승님께 온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센에서 왔습니다. 어느 걸 먼저 열어 볼까요?”
“짧은 것부터요.”
그리하여 베르는 빅터의 편지를 펼쳐 들었다.
“지금 간다.”
“…….”
“…….”
“그래서요?”
“뭐가요?”
“그게 끝?”
“네.”
뭘 기대한 걸까.
짧다고 선택한 편지의 내용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고작 네 글자라니.
“종이가 아깝네.”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야 익숙하니까요.”
빅터가 빅터답게 쓴 거니까.
어깨를 으쓱거린 베르는 두 번째 편지를 열었다.
그러고는 낮은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이건 후배님이 읽어 보시죠.”
내용을 살피던 베르는 편지를 펼쳐 나에게 전했다.
[마론 후작과 교류 중인 신원 미상의 남자 발견. 이후 사라센으로 복귀. 추적 결과 카리프 무스타파로 확인됨. 현 등급 7성 초입 이상으로 추정.]
“원하시는 결과를 얻은 건가요?”
“확실하게요.”
편지를 돌려 준 나는 무심히 걸어 창가로 다가섰다.
카리프 무스타파.
생에 처음 생긴 나의 숙적.
“저 카슈타르에 다녀올게요.”
어둠이 깔리는 거리를 보며 나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 * *
사라센에 존재하는 흑마탑은 모두 합해 네 개.
흑마법을 배척하는 브라함과는 달리, 이곳 사라센 마법 학회는 흑마법의 존재를 용인했다.
이유라면 역시 브라함 제국.
다가올 그 어느 때를 기다리며, 그들은 금단의 사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마르님, 카리프에게 연락이 왔는데 방문을 앞당기고 싶다고 합니다.”
“카리프가? 앞당긴다면 언제를 원한다는 말인가.”
“내일 모레 오겠다고…….”
“그날은 일정이 안 나올 텐데?”
“그렇게 전하고 싶은데, 이미 오는 중이랍니다.”
“대답도 안 듣고?”
“네. 근래 들어서 도통 저희의 통제를 따르지 않습니다.”
보고를 받은 흑발의 남자, 사마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쓸어 냈다.
주름진 그의 얼굴이 차갑게 변해 갔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천천히 길들여 보자고.”
돌아선 사마르는 느긋한 걸음으로 책장에 다가섰다.
남자의 긴 흑발이 잔물결처럼 찰랑였다.
“브라함 흑마탑에는 계속 비밀로 하실 건가요? 로이드 님도 언젠간 아시게 될 텐데요?”
뒤를 따르던 남자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어봤다.
유달리 질문이 많았던 금발의 남자.
의식을 마친 이후에도 로이드의 호기심은 그칠 줄 몰랐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 금발 능구렁이 눈치가 보통이 아니거든.”
근심 섞인 질문에 가볍게 답하며, 사마르는 손을 뻗어 두툼한 책을 꺼내 들었다.
“하면…….”
“무슨 상관인가. 에르텔과 결과물 모두가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이제 로이드는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네.”
대답을 마친 사마르는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앙상한 손마디가 표지로 향했다.
두꺼운 양장본이 속지를 드러내며 깔끔한 목차가 눈앞을 채웠다.
첫 번째 단원은 소환술과 노예술.
“한배를 탄 몸이니 서로 잘 챙겨 줘야지.”
목차를 확인한 사마르는 털털히 읊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덧붙여 이어지는 나직한 한마디.
“아직은 유용한 늙은이라네.”
무표정한 사마르는 확대경을 들어 작은 글씨를 확인했다.
* * *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도시.
백색의 건물이 즐비한 이곳은 풍요의 신 에포나가 축복한 카슈타르의 도성이다.
“이곳은 뭐 하러 온 건가?”
두리번거리는 부족장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
녀석들과 나는 여기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유할 수 없는 추억이 됐다.
가슴 찡했던 그날의 감동은 나 혼자만의 기억으로 낡아져 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좋았던 모습을 가슴에 묻고 새로운 시간을 달려갈 뿐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모습을 드러낸 내성 경비대가 방문 목적을 물었다.
“로제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가씨를요?”
토끼 눈을 뜬 경비대에게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뜨악하며 입을 벌리는 남자.
“이, 이건… 잠깐만 계세요!”
펜던트를 손에 쥔 경비대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내성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들어오시죠!”
상기된 얼굴의 경비대는 앞장서 우리를 인도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익숙한 접견실이었다.
마주한 로제의 곁에는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논 데 카슈타르.
“처음 뵙겠습니다. 브라함에서 온 이반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시오. 카슈타르에 오신 걸 환영하오.”
백작은 가벼운 미소로 나의 인사에 화답했다.
나 역시 옅은 미소를 지었고.
“그래, 귀하의 소개를 조금 더 들어 봐도 되겠소?”
이어진 백작의 질문은 나의 신분과 가문에 대해서였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
나는 조금 더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1,000명을 홀로 대적한 검의 달인이자, 고고한 아케른의 별. 헤모니아의 야수 카르간을 쓰러뜨린 빅터 크로제 백작님이 저의 후견인이자 스승님이십니다.”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빅터의 이름을 먼저 꺼냈다.
“오호라, 빅터 공의 총애를 받고 계셨구려.”
그 이유는 이어질 개인사에 대한 일종의 현혹 작업이었다.
“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고명하신 스승님 덕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저런… 괜스레 힘든 기억을 건드렸구려. 그래, 빅터 공의 근황은 어떠시오?”
“여전히 정정하시지요.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저런… 영웅의 제자가 쉬운 길은 아니었구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식사부터 하십시다.”
보다시피 결과는 대성공.
빅터라는 이름 앞에 고아의 존재는 옅게 희석되었다.
역시 베르는 베르였다.
― 그게 대화의 핵심입니다. 환심을 살 만한 얘기가 먼저 나오면 이후의 소재는 미화되기 마련이죠. 그 대신! 절대로 여유를 잃어선 안 됩니다.
출발 전에 받았던 베르의 조언은 제논이란 거물 앞에서도 완벽하게 통했다.
“로제의 생명을 구했다 들었는데 참으로 고맙소. 이거 정말 큰 신세를 지게 되었구려.”
후광효과라고 했나?
고작 순서 하나 바꿨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제논 백작은 나의 출신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볼 것 없는 고아였던 나는 대견한 청년이 되어 백작을 마주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낸 뭐 그런 것 있잖은가.
아무튼 뒤바꾼 말 순서 하나로 첫인상은 나쁘지 않게 포장되었다.
하여 본론은 이제부터.
“오는 길에 소문을 들었습니다. 카슈타르 외곽에 마굴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이 또한 베르의 작전으로, 나는 오는 내내 외운 대사를 또박또박 정확하게 뱉어 냈다.
― 다음은 상대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꺼내는 것입니다. 지금 카슈타르의 상황을 보자면… 흠, 그래요. 외곽에 생긴 마굴이 신경 쓰일 겁니다.
베르는 나에게 해당 마굴의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 주었다.
“본래 헤미르 영지에서 생긴 마굴인데, 방관하는 사이 점점 커지고 말았소.”
“아… 그러다 카슈타르로 확장된 거군요.”
“그렇소.”
“한데 헤미르 영주는 계속 방치하는 중이고요.”
“맞소. 확장이 진행되면서 헤미르에 있던 마굴의 입구가 닫혀 버렸기 때문이오.”
결국 새로운 입구는 카슈타르에 열리고 말았다.
덕분에 마굴의 책임 소재가 애매하게 돼 버린 것.
문제는 카슈타르의 입장 또한 녹록치 않다는 것이었다.
― 아리안의 국방 정책 때문입니다. 각 영주의 사병들을 강제징용하거든요.
파병이라고 할까.
일정 주기에 따라 국경에 사병을 파견시켜야 했다.
그리고 현시점이 카슈타르의 차례.
하여 카슈타르는 애매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마굴을 소탕하자니 성도의 치안이 문제였고, 놔두자니 거슬리는 어정쩡한 상황인 것이다.
― 사실 마굴이라고 해서 만만히 볼 상황은 아닙니다. 보통 4성급 한두 명은 따라 붙어줘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카슈타르는 좀 사정이 복잡합니다. 이번 파병에 오러 기사들이 대부분 차출당했거든요.
물론 아리안의 혼으로 불리는 반크스가 있지만 그는 왕실 기사단장이란 중책이 있었다.
당연히 움직임엔 제약이 따랐고, 영지의 일로 오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니 나에겐 절호의 기회!
“소탕에 참여할 오러급 기사가 여의치 않겠군요. 모두 파병 중이니까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구려.”
상대의 아쉬움을 통해 나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고마움이란 그런 거니까.
“상관없으시다면 제가 돕고 싶습니다.”
행동의 크기가 아닌, 필요한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게 바로 감사의 마음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허허, 어찌 은인에게 그런 험한 일을 부탁하겠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맡겨 주시지요. 로제 님과의 인연도 있고 하니, 기꺼운 마음으로 돕겠습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도움으로 빚을 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대한 호감으로 이어질 터.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드믄 용기를 지닌 분이시죠. 가문만 믿고 설치는 어느 못난 녀석과는 정말 비교되지 않나요, 아버님?”
대화에 참여한 로제의 말에 백작은 조용히 끄덕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긍정의 표현이라는 걸.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소만.”
미묘했던 백작의 입에서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고.
“부담 갖지 마세요. 그저 마굴일 뿐입니다.”
나는 가볍게 대답하며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작해야 하급 마굴이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습니다.”
호기롭게 약속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발한 우리는 점심 나절에 이르러 마굴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의 모양은 평범했다.
베르의 꼼꼼한 설명처럼 흔한 동굴의 모습으로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아, 냄새…….”
내부로 향하던 나는 코끝을 가리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역하고 비릿한 악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초입부터 시작된 불쾌한 공기는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으로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것 아니었다.
“마굴이 이렇게 컸던가?”
두리번대는 부족장의 말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베르의 설명과 달랐다.
입구는 마굴이 맞았지만, 들어온 내부는…….
“이거 아무리 봐도 던전인 것 같은데.”
마굴이라 안내받은 동굴은 누가 봐도 완벽한 던전의 모습이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