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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51화 (51/203)

51화

“오래간만이구려, 빅터 공.”

“그간 격조했습니다, 폐하.”

“격조라……. 그래, 그대가 좀 심하긴 했지.”

안부를 전하는 빅터의 말에 황제는 푸념 섞인 말로 덤덤히 대답했다.

빅터가 서 있는 곳은 황제의 집무실.

“짐은 그대의 충심이 의심스럽구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의 관심은 오로지 제국의 안위에 있습니다.”

잔잔히 답하는 빅터를 보며 황제는 쓰게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

지금도 빅터는 제국의 안위를 핑계로 황제의 이름을 기피했다.

그의 충성은 오롯이 국가를 향했으니까.

“제국의 안위라…….”

빅터의 맹세는 늘 황제가 아닌, 제국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소리 없는 시위랄까.

“짐의 근심을 덜게 하는 것이 제국의 안위임을 모른단 말이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른 척했다.

빅터가 없는 브라함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력한 노구가 바쁜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그렇구려. 하면 짐을 위한다는 그 일이나 들어 봅시다.”

두루뭉술한 빅터의 대답에 황제는 집요하게 다음을 추궁했다.

확실히 달라진 황실의 분위기.

황제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경해 보였다.

“일선에 나서야만 충성이겠습니까? 안을 좀먹는 벌레를 잡는 것도 신하된 자의 도리일 것입니다.”

빅터는 유려한 말솜씨로 황제의 노림수를 피해 나갔다.

“오, 그래서 벌레는 찾으셨소?”

“노력 중이니 머지않아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흠… 벌레나 잡기엔 귀공의 이름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데. 놔두고 본래 자리로 오는 게 어떻겠소.”

드디어 황제는 감춰 둔 속내를 꺼내 마주한 빅터를 압박했다.

요구 사항은 간단했다.

황제가 원한 것은 빅터의 총사령관 복귀였다.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사라센에 새로운 7성이 등장했다오. 그만 복귀해서 나라를 지키시오.”

복귀는 핑계일 뿐, 종잡을 수 없는 빅터의 행보가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카리프의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적임자를 곁에 두시고 왜 한물간 노구를 찾으십니까.”

빅터는 시선을 돌려 황제의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폐하의 곁엔 스벤 자우어 공이 있지 않습니까.”

빅터는 야전 사령관인 스벤을 지목했다.

“상대가 떠오르는 신성이면 그에 걸맞은 인재가 나서야 하는 법. 스벤 공이야말로 최고의 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크흠…….”

갑작스런 빅터의 추천에 스벤은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와 빅터는 정적의 관계.

빅터가 있는 한, 스벤의 미래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사이었다.

그런 빅터가 자신을 추천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빅터의 행동에 스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의도 파악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대는 사사건건 나의 말을 거부하는구려. 따지고 들면 이것도 역심이 아니요?”

그에 황제는 꼬투리를 잡으며 빅터를 다그쳤다.

농담으로 듣기엔 의미심장한 얘기.

“허허… 역심이라니요. 하찮은 노구에게 너무 거창한 죄목이십니다.”

빅터는 너스레를 떨며 부드럽게 대화를 돌렸다.

“아시다시피, 저는 코어를 다쳐서 예전처럼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벤 공을 중용하셔서 혹시 모를 전란에 대비하시지요.”

빅터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간언했다.

황제 데드릭은 미간을 찌푸리며 빅터를 바라보았다.

핑계라는 걸 알지만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빅터의 부상 소식은 공론화된 지 오래였으니까.

부상의 이유조차 제국을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 추밀원 의장을 습격한 자객이 빅터 공에게 패퇴했다고 합니다. 한데… 빅터 공의 부상이 심각한 듯합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나.

이 모든 건 카이 형제를 잡기 위한 빅터의 조작된 정보였다.

실상을 아는 것은 빅터의 측근뿐.

세간에선 빅터의 무공이 예전만 못하다며 떠들어대기 바빴다.

그러니 고민될 수밖에.

‘본심을 드러내라 늙은 여우야.’

사정을 모르는 황제는 빅터를 바라보며 속에 품은 생각을 꺼냈다.

서자.

패륜아.

그리고…….

찬탈자.

이 모든 수식어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황제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빅터 크로제가 있다는 사실도…….

빅터의 황제는 데드릭 폰 케이사르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허울뿐인 남부의 패왕.

이 지랄 같은 사실은, 끝내 말할 수 없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제국의 황제와 제국 최강의 군벌은 대립해선 안 되는 관계였다.

“빅터 공의 충정이야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최근의 행보 역시 국익을 위함일 것입니다.”

미묘한 긴장을 깨며 스벤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

그의 입장에선 당사자가 있을 때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했다.

“이를 말입니까. 스벤 공이 저의 마음을 아시는군요. 그러니 스벤 공께서 폐하를 설득해 주시지요. 총사령관의 자리는 스벤 공 같은 분이 맡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이다.

스벤은 기다렸다는 듯 빅터의 말에 화답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제가 감히 빅터 공을 두고… 하하하.”

스벤은 두툼한 광대를 끌어 올리며 멋쩍게 웃어 댔다.

하나 훈훈한 모습도 잠시,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에 탐욕스런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고집스런 황제뿐.

“저와 빅터 공이 긴밀히 협력해 안위를 도모하겠습니다. 폐하께선 염려 놓으시지요.”

스벤은 에둘러 자신의 욕심을 황제에게 전했다.

양대 군벌의 의기투합이라…….

황제는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멍청한 놈.’

가지고 놀기엔 스벤이 적격이었으나, 속을 알 수 없는 빅터의 행보가 그의 목을 조여 왔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네놈은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냐.’

빅터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여전히 온화한 얼굴의 빅터.

주름진 그의 눈가에서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

황금빛으로 물든 리베의 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빛을 발하는 게 어디 풍경뿐이었겠나.

“정말로 관심 없어요? 진짜로?”

“네. 그리고 지금은 갈 곳이 있어서 안 돼요.”

“그럼 볼일 보고 와서는 어때요? 집에 선물받은 좋은 술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봐요.”

감출 수 없는 나의 외모는 수많은 여심을 흔들며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나란 남자.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여심 강탈자라 불러야겠군. 이 정도면 범죄가 아닌가 싶은데.”

곁을 지키던 부족장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다.

특히나 이곳 리베는 여성들의 태도가 유달리 적극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흠잡을 곳이 없다. 얼굴도 잘생기고, 힘도 세고, 체격도 큰데, 그것도…….”

술김에 태어난 녀석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걷고 있는 나와 별 보러 갈래.

“자매는 왜 그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건가?”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지? 요즘 들어 얼굴을 자주 붉히는군. 갱년긴가?”

“뒈져라!”

별 보러 갈래는 매서운 주먹을 휘둘러 녀석의 턱을 돌려 버렸다.

그 한방에 술김에는 뻗어 버렸고.

“와우!”

지켜보던 나는 별 보러 갈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

또다시 붉어지는 얼굴.

아마도 갱 머시기는 저런 증상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족장에게 갱년기가 뭐냐고 물어봤다.

“음…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부족 어른들께서 쓰시던 말인데, 중년이 넘으면 찾아오는 증상이라더군.”

처음 들어 본 저 말의 뜻은 대충 그런 거였다.

그러니 처맞을 수밖에.

해롱거리는 술김에를 끌고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도착한 상점의 이름은 현자의 돌.

골렘 계곡에서 인연을 맺은 샤샤 남매의 연금 상점이었다.

“우와아∼ 오래간만입니다. 형님! 그간 더욱 잘생겨지셨군요!”

요란하게 반기는 녀석의 이름은 페드로.

샤샤의 남동생이자, 연금 상점의 주인인 당찬 녀석이다.

“진즉에 찾아뵀어야 하는데, 오자마자 납품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됐어, 일이 먼저지. 지나가는 길에 소식 듣고 들려 봤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곤 상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알기 쉽게 정리된 진열장과 신기한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경을 마친 나는 페드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납품은 잘된 거야?”

애초부터 우리의 인연은 이것을 위해 시작된 관계였으니까.

“네! 형님 덕분에 무사히 납품했습니다!”

페드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신나게 대답했다.

“수량은 안 모자랐어? 그거 다 해 봐야 20개 정도밖에 안 됐을 건데?”

“마력석을 통째로 쓰는 게 아니니까요. 정제 과정을 거쳐 필요한 크기로 재가공을 하는데, 저희가 수율이 높아서 여유 있게 했어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들려오는 좋은 소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도와준 보람이 생긴 상황.

“누나는?”

나는 샤샤의 안부를 물으며 진열대로 다가갔다.

“아, 누나는 조합에 갔어요. 조합이 추천한 관용 납품이라 완료 증서를 제출해야 하나 봐요.”

“흐음, 절차가 까다롭구나.”

“단체장 발주였으니까요. 아무튼 이게 다 형님 덕분입니다! 누나도 매일 형님 얘기만 해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심드렁한 말투로 녀석의 호들갑에 대응했다.

“아참! 잠시만 계세요!”

말을 마친 페드로는 부산스럽게 내실로 향했다.

쿠당탕!

으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거 받으세요, 형님.”

돌아온 페드로는 나에 손에 작은 주머니를 쥐어 주었다.

“뭔데?”

“마력석 매입금이요. 섭섭지 않게 챙겼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녀석은 내내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호오, 그랬단 말이지.”

나는 받아든 주머니를 품안에 챙겨 넣었다.

“확인 안 해 보세요?”

“섭섭지 않게 넣었다며. 그럼 됐어.”

녀석의 동그란 눈을 보며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했다.

어차피 돈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 의미 없는 일이었다.

“수고해라.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페드로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곤, 고개를 돌려 상점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라? 형님 턱 근처에 그거 뭐에요? 얼룩인가? 지난번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가까이 다가온 페드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흉터야.”

딱히 숨길 만한 일도 아니잖나. 나는 별거 아닌 말투로 가볍게 대답했다.

“흉터요? 어떻게 다쳤기에 이렇게 얼룩이 남았데요?”

“그냥 조금 데었어.”

“조금이라니! 홀랑 타 죽을 뻔했는데 그게 조금이란 말인가?!”

대수롭지 않은 나의 말에 부족장이 정색을 하며 나섰다.

그에 보태 충고까지 전했으니.

“치료를 하다 하다 안 돼서 남은 흉터가 아닌가. 그대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자다. 자신의 몸을 조금 더 귀히 여기는 게 어떻겠는가.”

이어진 부족장의 말에 페드로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화상이라고 하셨나요?”

“뭐, 그런 일이 있었어.”

경위를 물어본 페드로는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더니.

“형님, 내일 시간되세요?”

“음… 일단 내일까진 리베에 있을 생각이니까. 여유 시간은 있지.”

“아, 잘됐네요. 그럼 내일 다시 와 주시겠어요?”

페드로는 나에게 재방문을 요청했다.

“그건 어렵지 않은데… 왜?”

그에 나는 반문했고.

“제가 아는 치료사분이 계셔서요. 엄청난 분이거든요……. 그 정도 흉터는 간단히 치료해 주실 거예요.”

페드로는 엄청난 누군가를 나에게 소개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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