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너무 자주 죽는 거 아니야?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이렇게나 흔한 일이었어?
정신이 돌아온 나는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떠오른 숫자는 이제 94.
“무슨 일인가? 왜 가다 말고 자빠지는 건가?”
투덜거리는 여인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돌아온 이곳은 안전 가옥의 입구였다.
푸륵거리는 말들을 보니 출발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하…….”
뭐 이런 지랄 맞은 경우가 있는 걸까.
예견된 죽음을 피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거늘, 오히려 나는 더욱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머리가 터져?
몸이 반으로 갈려?
단언하건데.
불타 죽는 것에 비한다면, 앞선 두 종류의 죽음은 편안하고 안락한 죽음이었다.
하나 그 누가 알고 있겠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초개처럼 타 죽었다는 것을.
“염병… 오크를 피하려다 트롤을 만난 격인가.”
기가 막힌 작금의 상황에 나는 입술을 곱씹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작게 읊조렸을 뿐인데.
“트, 트롤? 지금 우리의 자매에게 트롤이라고 말한 것이냐!”
“뭐라? 나에게 한 말이었나!”
귀마저 밝은 삼인조는 핏대를 새우며 달려들었다.
“흐음… 트롤보다는 오우거에 가깝지.”
“닥쳐라! 음주 사생아!”
“사생아라니! 엄연히 부모님이 계시거늘!”
“내 자식 아니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시는데 자식인 네가 그 사실을 모르는가!”
“크윽, 젠장맞을 노인네. 또 낮술에 정신을 놓은 건가?!”
미래를 모르는 녀석들은 안타까울 만큼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르는 게 약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랄까.
[화염 내성]
나는 새롭게 얻은 항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충격 내성에 이은 두 번째 내성.
내성의 뜻이 다르지 않다면 효과는 예상 가능했다.
최소한 불에 타 죽진 않을 터.
‘좋아해야 하는 건가?’
덕분에 유용한 효과가 생겼으니 마냥 낙심할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생생한 기억의 잔재는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준비됐으면 출발하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 등에 올라탔다.
선택지 따윈 없는 완벽한 외길.
해야 할 일은 전에 없이 명료했다.
* * *
“이반 님은 땀도 안 흘리네요? 안 더워요?”
발을 맞추던 에스카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땀구멍이 막혀서 그런 것이다. 그대는 씻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군.”
그에 부족장은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나의 특별함을 부정했다.
“뭐래, 너야말로 땟국이 줄줄 흐르는구만.”
“신성한 반투족의 땀을 욕보이다니!”
“육수겠지. 너 멧돼지 냄새나.”
킁킁대는 부족장을 두고 나는 주위를 둘러 상황을 살폈다.
곁에 있는 에스카와 게브네는 물론이요.
뒤를 따르는 다른 반투족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땀에 젖어 축축한 모습.
‘더위가 안 느껴져.’
내성이 생긴 나는 저들과 다른 세상을 홀로 걷는 중이었다.
이유라면 역시 그것일 터.
화염 내성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게 적용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선선한 숲길을 산책하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둥지에 도착했다.
이후의 전개는 다르지 않았다.
결계를 사용한 우리는 둥지에 진입했고, 적당한 숯덩일 골라 안전 지역에 모아 뒀다.
사람들의 역할은 여기까지.
“결계가 약해졌어요. 입구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나는 작업 중지를 알리며 일행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이반 님은요?”
“제 결계는 아직 괜찮아요.”
에스카의 반문을 일축하며 나는 다시 둥지로 향했다.
반투족 3인이 뒤를 따라붙었다.
“너희들도 여기에 있어.”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형제를 위험에 혼자 두지 않는다!”
“너희가 따라오는 게 더 위험하다고.”
따라붙는 삼인조를 밀어내고 홀로 둥지에 도착했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백염의 향연.
“무슨 도자기냐…….”
타오르는 백염탄을 보며 나는 쓰게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었으니까.
하얗게 변한 이 녀석은 숯이란 이름의 유리병이었다.
― 이거 집어던져도 되나요?
처음 도착했을 당시, 우리는 운반이 아닌 투척을 선택했다.
시간과 위험을 줄이기에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결과는 대실패.
포물선을 그린 백염탄은 유리병처럼 박살 났다.
결국 손으로 들고 나를 수밖에.
그사이 결계는 위험한 수준으로 망가지고 말았다.
결국 홀로 남은 나는 5인분을 해내야 했다.
“후…….”
작전은 단순하게.
잔뜩 쌓아 들고 죽어라 달리는 것이다.
힘이야 넘쳐 나니까.
“버텨라 버텨…….”
나는 주문처럼 웅얼거리며 쌓아 놓은 숯덩일 들어 올렸다.
걱정되는 건 결계의 접촉면.
중량이 늘어날수록 결계의 훼손은 급속도로 빨라졌다.
치이이이익―
이렇게 말이다.
이제 막 들었건만 맞닿은 결계는 벌써부터 위태로웠다.
순식간에 물드는 주홍빛 결계.
치솟는 수증기는 포기를 종용했고, 멀리서 들리는 외침은 나의 무모함을 지탄했다.
“미쳤어요?! 그렇게 많이 들면 결계가 못 견뎌요!”
비명에 가까운 에스카의 외침이 가려진 시야를 대신해 방향을 알려 왔다.
이제 믿는 건 몸뚱어리 하나뿐.
얼굴까지 쌓은 백염탄을 들고 보이지 않는 길을 미친 듯이 달려갔다.
파지직―
순간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
기억 속 장면이 재현되며 나의 결계는 파편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바아아아알!”
나는 똑같은 욕지거릴 다시 한번 내뱉었고.
화르륵―
몸을 휘감는 백염의 열기는 끔찍한 고통으로 보답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대략 20보.
[화염 내성으로 인해 발화가 차단되었습니다.]
[화염 내성으로 인해 발화가 차단되었습니다.]
[화염 내성으로 인해 발화가 차단되었습니다.]
[화염 내성으로 인해 발화가 차단되었습니다.]
붙었다 꺼지길 반복하며 화마는 끈질기게 나의 몸을 탐했다.
하지만 불꽃은 이어지지 못했고.
“끄아아아아아―”
지옥 같은 고통만 남아 나의 통각을 지배했다.
[화염 내성으로 인해…….]
여전히 계속되는 경고문.
끝이 없을 것 같던 문자의 향연에 나의 의식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반 님!… 정… 차리세…….”
꿈결처럼 다가오는 여인의 목소리.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의 얼굴에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뜨겁다.
아니, 아픈 건가?
전신을 삼키던 백염의 기운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내 몸에 스며들었다.
“크허어어어어억!”
얼마나 아프기에 여전히 계속되는 걸까?
회귀를 했음에도 선명한 통증이 나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오오, 의식이 돌아왔다!”
“허허! 요란하게도 일어나는군!”
“이반 님! 정신이 드세요?”
“내말이 맞잖은가! 내가 죽지 않을 거라고 했거늘!”
어렴풋이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시끄럽게 오가는 대화에 감은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회귀한 시간대가 달라진 걸까.
가물거리는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내가 있어야 할 그곳이 아니었다.
“내가 오이풀 뿌리와 진흙을 개어 발라놨지. 화상엔 이게 최고라네!”
“아, 그거 진흙이 아닌데…….”
“그럼?”
“그거 말똥이다. 사방이 마른 땅인데 진흙이 어디 있겠나.”
똥이라는 남자의 말에 희미한 의식이 제자릴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나 반투족.
말똥을 주워 온 녀석은 술김에 태어난 그놈이었다.
“저예요, 에스카. 몸은 견딜 만한가요?”
시끄러운 녀석들을 뚫고 에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걱정스레 상태를 살피며 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없는 걸 보니 염증이 생기진 않은 것 같네요.”
“그게 다 나의 특제 약 때문이지.”
“그거 말똥인데…….”
뒤섞여 오는 말을 들으며 그제야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곳은 화염 계곡의 오두막.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를 환자 다루듯 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백염탄은 다 모은 건가요?”
“네. 그 대신 이반 님이 죽을 뻔했죠.”
나는 회귀한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던 것이었다.
“하… 그랬었구나.”
밀려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나는 해냈고.
걸음을 붙잡던 무거운 족쇄를 드디어 끊게 된 것이다.
“다행이 피부는 녹지 않아 일단 포션으로 치료했어요. 하지만 하급이라 추가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에스카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의 상태를 알려 왔다.
아무렴 어떤가.
치료는 받으면 되고, 이까짓 고통쯤이야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다.
몸을 추스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 입구로 향했다.
“빨리 갑시다. 더럽게 아프니까.”
나는 사람들을 재촉하며 귀환을 서둘렀다.
하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고, 알 수 없는 대화만이 오두막을 채워갔다.
“허허… 내가 졌네.”
“변태…….”
“저게 정녕 인간의 것인가?”
이렇게 말이다.
중얼대는 삼인조를 지나 홍조를 띤 에스카가 우물쭈물 다가왔다.
손에는 얇은 이불을 든 채.
“갑옷이 다 손상돼서… 치료도 해야 하고… 일단 이걸로 가리세요.”
에스카는 입술을 깨물며 새초롬히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여 바라본 허리 아래.
‘이런 시부럴…….’
백염의 화마를 견딘 웅장한 녀석이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
일주일 뒤.
화염 계곡에서 돌아온 우리는 여러모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해머와 고블린 대검은 게브네에게 넘어갔고, 여분의 굴담비 가죽은 다시 가죽 공방에 맡겨졌다.
그리고 나는.
― 이 집이 외상 치료로 유명합니다.
유명한 치료사에게 화상을 치유받았다.
그렇게 지나간 일주일.
나의 화상은 깨끗이 회복되었고, 새로 맞춘 경갑은 더욱 기품 있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 백 허그해 주면 1골드만 받을게.
턱주가릴 돌리려다 꾹 참고 2골드를 줬다.
갑옷은 기똥차게 뽑았으니까.
가죽 공방을 나온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며 대장간으로 향했다.
옅은 미소로 반기는 게브네.
“오래 기다렸네.”
그의 두 손엔 달라진 모습의 해머가 들려 있었다.
“아…….”
나오는 건 그저 감탄뿐.
그저 두껍고 크기만 했던 해머 모양은 이전과는 달리 양면이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쪽은 넓고 두툼한 면으로 되어 있었고, 자루 쪽으로 이동할수록 점차 좁아지는 모양이었다.
낮아진 무게 중심 탓일까.
‘가벼운데 더 묵직해진 느낌이야.’
무게는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파괴력은 더욱 강해졌다.
슈아아악―
게다가 속도까지.
빨라진 속도로 인해 나의 해머는 검과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다면 무게에 따른 약점은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
“그 반대쪽도 유용할 테니 잘 써 보게나. 중갑을 뚫는데 저만한 것도 없을 걸세.
게브네의 말에 따라 넓은 해머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곡괭이처럼 솟아 오른 두툼한 창끝.
그 뾰족한 창을 만지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걸리면 갑옷이고 뭐고 없겠네요.”
제아무리 육중한 판금이라 해도 이건 견딜 재간이 없어 보인다.
“판금 따위 무용지물이지. 크흐흐흐.”
이것은 뚫으라고 만든 무기니까.
게다가 이 해머는…….
절대로 베어지지 않는다. 아니, 벨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시험해 볼 수밖에.
“어때요?”
나는 곁에 있는 에스카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발톱을 감춘 야수.
나의 의도를 알아챈 에스카는 곡도를 꺼내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세 번 안에 끝내드리죠.”
같은 말을 내뱉은 에스카는 곡도를 내밀며 그림자처럼 쇄도했다.
이미 경험한 패턴이다.
카앙―
가볍게 들어 올린 나의 해머는 들이치는 그녀의 곡도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눈빛을 바꾸는 에스카.
스아아아아―
곡도를 둘러싼 짙은 오러가 예리한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두 번째.”
그와 동시에 에스카의 모습이 다시 흐려졌다.
승부는 이제부터.
에스카는 감춰 둔 본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카아앙!
그녀의 짧은 곡도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나의 해머를 쳐 올렸다.
드디어 드러나는 진짜 6성의 힘.
“…….”
하지만 나는 덤덤히 다음 동작을 이어 갔다.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6성의 공격에 놀라던 애송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어질 그녀의 공격은 허수.
하지만 나는 에스카의 흐름대로 공격을 받아 냈다.
이제부터 변칙적인 공격이 들어올 터.
좌측으로 들어오던 곡도의 궤적은 솟구치듯 방향을 바꾸며 나의 턱밑을 파고들었다.
똑같았다.
그날과 똑같은 공격의 흐름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노린 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이니까.
슈아아아아아악!
두 사람의 무기는 한 점으로 향했고.
채엥―
해머를 찌르던 그녀의 곡도는 허공으로 튕겨 날았다.
부르르 떨리는 에스카의 빈손.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나는 승자의 예를 갖춰 가벼운 인사를 전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