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야, 이거 북적북적하니 사람 사는 집 같네요.”
반투족 3인이 합류한 안전 가옥은 1층부터 3층까지 조용할 틈이 없었다.
함께 기거한 지도 이미 3일째.
다시 시작된 나의 수련도 같은 날짜에 접어들고 있었다.
멈춰 있던 숙련도는 다시 오르기 시작해 이제 2,500을 넘기 시작했으니.
‘다시 가 볼까.’
나는 카슈타르를 떠올리며 수많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이작을 찾기 위한 로제와의 협력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결투까지.
나의 과거를 알기 위해선 결국 카슈타르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까놓고 말하자면, 배일에 가려진 결투 상대 때문이었다.
‘누구였을까.’
후작의 아들이 내세운 대리 기사는 상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몇 번을 마주한들 나의 패배는 기정 사실.
지금 당장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나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겠는가.
“흠…….”
로제와의 관계가 있는 이상 재회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역시 베르.
일단 던져 놓으면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 준다.
하여 나는 베르를 찾아갔다.
“마론 후작이요? 마론 데 페이소스?”
서류 뭉치를 살피던 베르는 내 얼굴을 보며 이름을 반문했다.
그러고는 깍지 낀 두 손을 턱에 괴고 의뭉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번엔 제논 백작을 물어보더니, 오늘은 마론 후작이네요. 대관절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기에 아리안의 귀족들을 그리 파헤치실까요?”
“후작이 궁금한 게 아니라 가신들이 궁금한 거예요.”
이어지는 베르의 질문에 나는 간략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페이소스 가문에 7성급 기사가 있나요?”
“그게 궁금한 건가요?”
“네. 가문의 혈족이나 가신 모두 합해서요.”
“흠… 없습니다. 왕도에 사는 귀족들은 무력 집단을 양성할 수가 없어요.”
베르의 대답 역시 로제가 한 말과 다르지 않았다.
“확실한가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아리안 왕국 자체가 무력 국가가 아니에요. 반크스 경을 제외하곤 모두가 6성급 이하입니다.”
“흠…….”
설명이 이어질수록 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분명히 나는 마주했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몸을 두 동강 냈던 그자는 분명히 7성 이상의 경지였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단 하나.
‘외부인…….’
타국에서 유입된 기사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 먼저 가 있어라. 네놈의 스승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나는 놈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나와 빅터를 향한 명백한 적대감.
마주한 처음부터 놈은 빅터와 나의 관계를 확인했다.
그 끝에 가서는 빅터의 죽음마저 암시했으니.
“혹시 스승님께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을까요?”
인과를 따진다면 범위는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원한이라… 과거로 돌아가면 수도 없이 많겠죠. 인마대전 이후로 사라센 전쟁까지 따지면… 아후, 손으로 다 꼽지도 못할 겁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이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전쟁이라니…….
따지고 들면 적국의 국민 모두가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7성급 이상으로 추린다면 어떻게 되나요?”
하여 나는 놈의 실력을 기준 삼아 범위를 축소시켰다.
그것도 아주 큰 폭으로.
“7성급이면 추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스승님 빼고 고작 여섯 명인데 이 사람들은 활동한 시대가 전혀 다릅니다.”
결론은 이것도 아니란 얘기였다.
심지어 현존하는 고수들과는 연결 고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한을 살 이유가 전혀 없지요. 굳이 갖다 붙이자면 사라센에 한 명이 있는데… 이것도 억지입니다. 전쟁 이후에 등장한 놈이라 스승님의 얼굴조차 못 봤을 테니까요.”
“다른 나라는요?”
자꾸만 어긋나는 베르의 대답에 나는 타국으로 범위를 넓혔다.
“글쎄요, 카잔과 아리안에서? 만약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 싶네요.”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반크스야 빅터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이었고, 카잔과의 관계는 정치인들 간의 문제였다.
그러니 그곳에도 없을 수밖에.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곳.
“리베에도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은 정치질이 싫어서 세상을 등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와서 나설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결론은 원점을 향해 나의 등을 떠밀었다.
‘지랄이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싸운 남자는 귀신이었나 보다.
이래도 아니고 저래도 아니라니, 용의자 한 명 추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혹시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건가?
거듭되는 문답 속에 베르에 대한 의심마저 싹틀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명 더 있잖아.”
생각지도 못한 용의자의 정체는 곁을 지나던 에스카의 입에서 나왔다.
역시 이인 일조.
두 사람이 한 팀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 명이 더 있다고?”
“아케른에서 온 서신 기억 안 나? 검성의 아들이 7성에 오른 것 같다고 말했잖아.”
“아아아아아! 맞다! 1년 만에 5성에서 7성에 올랐다는 그 녀석!”
고성을 지른 베르는 이마를 두들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겠군요.”
실마리가 잡힌 걸까.
잔뜩 달아오른 베르는 막힌 둑이 터지듯 가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 8성이 되신 건 18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지존은 사라센에 있던 카라얀 무스타파였죠.”
베르의 이야기는 케케묵은 과거로 넘어갔다.
시대는 인마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마계를 봉인한 영웅들이 사라진 땅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으니. 신세대의 지평을 연 그자의 이름은 카라얀 무스타파였다.
인마대전 이후 최초의 8성.
호시탐탐 브라함을 노리던 사라센은 카라얀을 앞세워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략이 부족한 카라얀은 갓 8성이 된 빅터에게 처참히 무너졌고.
이후 18년간 단 한 번의 도발도 없었을 만큼, 당시의 패배는 사라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검성이라 불린 카라얀의 목은 스승님의 손에 잘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급은 나무 상자에 담겨 사라센에 전달됐지요.”
아는 사람만 아는, 가려진 역사 속의 비화.
베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수급을 받은 카라얀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그녀의 곁엔 7살짜리 아들이 있었지요.”
“설마.”
“맞습니다. 카라얀의 아들 카리프 무스타파였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원한이 아니다.
철천지원수.
또는 불구대천의 원수랄까.
하여간 한 남자로 인해 부모를 잃었으니 사무친 원한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사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카리프는 엄청난 독종이었다고 합니다. 검술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는데… 안타깝게도 재능이 없었다더군요.”
“5성이 한계였겠네요.”
“네. 카리프는 5성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문은 몰락했다고 한다.
아비의 뒤를 잇지 못하는 아들.
틈을 노린 정적들이 군정권을 차지했고, 이후 무스타파의 가문은 철저히 박해당했다.
그런 수모를 당하던 그가.
“1년 만에 7성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스승님이 황궁에 가신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죠.”
타도 빅터 크로제를 외치며 전선에 복귀한 것이었다.
“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든 정황이 카리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의 용의자는 무의미할 정도.
하지만 이 모든 가설에 힘이 실리려면 마지막 한 고비가 남아 있었다.
“카리프와 마론 후작이 손잡을 가능성은요?”
두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가 성립돼야 나의 의문은 정리되는 것이다.
“갑자기요?”
“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의구심 가득한 베르의 눈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말없이 오가는 무언의 대화들.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일단 카리프는 재정적 도움이 절실했을 겁니다.”
베르는 질문 대신 대답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라센엔 카리프의 편이 없지요.”
“몰락한 경쟁자라서?”
“그렇죠. 그대로 망하는 게 편한 겁니다. 반면 마론 후작의 가문은 군사력을 키울 수 없죠. 왕도에 기반을 둔 귀족의 숙명 같은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엄청 불안한 일이거든요.”
“…….”
“아차, 하다간 반항도 못해 보고 사라지는 겁니다. 휘리릭∼ 하고 말이죠.”
마치 약장수를 바라보듯, 어느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어느덧 절정.
“이거…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손짓을 더하던 베르는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코끝을 훔치며 생각에 잠긴 베르.
날카롭고 직관적인 그의 추측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 같네요.”
뭉그적거리던 마지막 이야기는 이해관계를 넘어서 반역의 기운을 암시하고 있었다.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야?”
“흠, 하지만 후배님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확인해 볼만한 일이지.”
비약이 과하다는 에스카의 말에 베르는 고개를 저으며 반론했다.
또다시 이어지는 에스카의 의문.
“그런데 이반 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질문의 방향은 지켜보던 나에게로 향했다.
“일전에 스승님과 함께 로제 양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 사정을 들어 알게 됐습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나서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초면에 무슨 그런 대화를 나눴겠나.
“그랬군요. 하면 정보의 출처는 믿을 만하겠네요.”
그래도 회귀 같은 말보단 이편이 훨씬 설득력 있을 것이다.
“카리프와 페이소스라…….”
빈 종이와 펜을 꺼낸 베르는 깨알 같은 글씨로 대화의 요점을 적어 내려갔다.
사각거리며 들려오는 펜촉 소리.
서제를 나온 에스카와 나는 거실로 향하며 대화를 나눴다.
“이반 님, 지금 시간되나요?”
“네, 저야 늘 한가하죠.”
“그러면 같이 누구 좀 만나러 가요.”
하여 나와 반투족 삼인조는 대로를 가로질러 중심가로 향했다.
“걷는 게 왜 그래?”
“불편해서 그런다. 세속인들은 잘도 이런 방어구를 챙겨 입는군.”
엉기적거리던 부족장은 타박하는 나를 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동조하는 한 사람.
“이 갑옷은 답답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잘못 만든 것 같다.”
별 보러 갈래는 갑옷을 잡아당기며 이리저리 틈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갑옷은 정상이야.”
보통의 흉갑은 저런 사이즈를 예상하고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정상이라니. 세속인들은 모두 빨래판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너무 특별한 거다.
나는 이어지는 불편을 무시하며 에스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의 말 상대를 해 주기엔 해결해야 할 인간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태 나서지 않은 한 녀석.
이쯤 되면 술김에 태어난 녀석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툭툭―
이런 식으로 말이다.
뒤를 따라오던 녀석은 나의 어깨를 건들이며 말을 건넸다.
“나는 불편하지 않다.”
“축하해.”
“하지만 이 갑옷은 나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는 것 같군.”
“무슨 그런 헛소릴. 네가 제일 사람답게 변했어.”
“그, 그래?”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젠 짐승처럼 살지 않아도 돼.”
“오∼ 그거 좋군. 잠깐, 방금 그건 흉본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너 정말 사람됐다니까? 이건 칭찬이라고.”
갸웃거리는 녀석을 두고 나는 앞서 걷는 에스카에게 다가갔다.
“지금 가는 곳이 어디에요?”
따라나서긴 했다만, 생각해 보니 찾아가는 목적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용병 조합이에요.”
질문을 받은 에스카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 되는 곳.
“용병 조합이라면… 지난번에 들렸던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사라진 대장간 주인을 찾아 우리는 그곳에서 단서를 모았었다.
“네, 맞아요. 게브네와 함께 떠난 용병이 돌아와서 지금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지금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에스카는 게브네가 아닌 용병을 만나려 했다.
“왜요? 돌아왔다면 대장간으로 가면 되잖아요.”
맞잖은가.
용무가 있는 사람은 게브네지, 용병 따위가 아니었다.
우선순위가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이다.
“용병만 돌아왔다면 모를까…….”
납득되지 않는 현 상황에 나는 읊조리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 그런 푸념은 틀리지 않았으니.
“맞아요.”
“뭐가요?”
“함께 간 용병들만 돌아왔나 봐요.”
툴툴거렸던 나의 말은 현실이 되어 되돌아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