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폭발하듯 발광하는 빛의 향연.
어둠에 잠식된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고, 생을 되찾은 나의 눈앞에는 ‘95’라는 숫자가 덩그러니 떠올랐다.
뒤를 이어 밀려드는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
긴 호흡을 마친 나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육체만으로 이런 수준이 가능하다니… 정말 경이롭네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에스카였다.
감탄이 섞인 그녀의 음성에 흐트러진 의식이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서서히 맞춰지는 기억의 파편들.
되돌아온 나의 시간대는 정확하게 일주일 전이었다.
‘모두 그대로인가…….’
회귀한 시간의 모습은 기억 속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반투족과 눈을 빛내는 에스카까지.
야물게 다문 저 입술에선 이제 곧 도전적인 말들이 이어질 것이다.
“어때요? 저는 준비돼 있는데.”
역시나 에스카는 똑같은 말투로 대련을 신청해 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으니.
“…….”
의욕으로 가득 찬 에스카를 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어야 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선명한 느낌.
정수리를 가르던 검의 기억은 되살아난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지금 몸 상태가…….”
나는 에스카의 청을 거절하며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표현하기 힘든 불편한 감정이 치밀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한계를 마주한 깊은 절망감이었다.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부탁할게요.”
거절당한 에스카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허리춤에 매달린 기이한 곡도.
일주일 전 그녀는 저 작은 검으로 나의 해머를 꿰뚫었었다.
그 순간…….
나는 예감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면 결과는 죽음일 거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지.’
당시의 나는 막연한 희망으로 불안함을 떨쳐 냈다.
고작해야 일곱 명이니까.
에스카보다 강한 사람은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다섯 명의 7성과 두 명의 8성.
빅터를 제외하면 여섯 명이니, 지례 겁먹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마주했다.
― 먼저 가 있어라. 네놈의 스승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나의 해머는 거짓말처럼 잘려 나갔고… 오러가 없는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후배님,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다친 겁니까?”
“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상태를 묻는 베르의 말에 나는 적당히 답하며 외면했다.
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을 거른 나는 점심에 이어 저녁 식사도 거부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가 맞을라나?
처음 겪는 죽음이 아니었으나, 이번만큼은 회복이 쉽지 않았다.
분함, 또는 적개심… 다시 일어서야 할 그 어떤 동기도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치미는 감정은 기껏해야 무력감.
노력만으론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깊은 수렁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
이유는 모르겠으나 문득 빅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영감이 있었다면 뭐라고 말해 줬을까.
멍청한 놈.
혹은 얼빠진 놈?
뭐가 됐든 간에,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속은 뻥 뚫렸겠지.
빅터의 퉁명스런 잔소리가 괜스레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긴 밤이 지나 다시 찾아온 아침.
밤새 뒤척이던 나는 충혈된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똑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후배님, 아침 식사 합시다아아아아아아악!”
방문을 열고 들어온 베르는 경기를 일으키며 고함을 질러 댔다.
“뭐야, 얼굴이랑 눈이 왜 그래요?! 밤새 귀신이라도 왔다 갔나? 아니, 귀신에 씐 건가?”
게다가 멀쩡한 사람을 빙의로 몰아가기까지.
“그제 저녁부터 영 이상하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호들갑을 떨던 베르는 곁으로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잔뜩 찌푸린 미간.
베르는 충혈된 나의 눈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잠을 설친 거예요.”
간단히 대답한 나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도 그러지 않았나요? 하루 종일 식사도 안하고…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런 거 없어요.”
계속되는 베르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하나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심각해 보였나 보다.
“고민이란 고민할수록 더욱 고민이 되므로, 고민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고민의 해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혼자 끙끙거릴 필요 없다는 거죠. 의외로 해답은 늘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대화로 해결될 고민이라면 죽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와요. 뭐가 됐건 먹으면서 고민합시다.”
끌려가듯 식당으로 향한 나는 모래알 같은 식감을 느끼며 억지로 식사를 마쳤다.
이후의 행적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방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고, 반투족 3인이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이유야 말해 뭐 하겠는가.
부족에서 쫓겨났으니 책임지란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만남을 피했고.
― 흐음… 알겠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돌아가란 베르의 말에 그들은 내일을 기약했다.
하지만 내일은 모레로 미뤄졌고, 모레는 또 다른 내일로 미뤄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찾아온 반투족은 나를 만날 수 없었다.
* * *
마력 등이 수놓은 도시의 야경은 늘 그렇듯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회귀한 이후 나의 유일한 낙은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취미가 될 줄이야.
덕분에 나는 소모되는 감정을 추스르며 버려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연에 인연이 겹치며 시작된 나의 여정.
세상을 내려다보게 해 준다는 빅터의 말에 나는 여기까지 달려왔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해 온 나는, 누구보다 치명적인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약점은.
장점을 포기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곱 명이다.
그 일곱 명만 무시하면 그럭저럭 세상을 주무르며 살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만으론 부족한 걸까?
그래서 이토록 좌절하는 걸까?
배부른 소리다.
이미 과분할 만큼 많은 것이 변했고, 또한 변해 가는 중이다.
고아에서 대장장이로.
이후 마스터의 제자가 되었고, 그 마스터는 나의 후견인이 되길 약속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인생 역전의 꿈을 이루었다.
정점이 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렇다고 못써 먹을 놈도 아니다.
유력 가문의 영애가 호감을 보내고 있고,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눈높이만 낮추면…….
난 이미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왜.
왜 나는 이토록 서운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모르겠다.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후…….”
형형색색의 마력 등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갈등도 한 호흡에 사라지면 좋으련만.
달라진 건 없었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노란 마력 등 아래로 익숙한 얼굴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창틀에 기댄 나를 바라보며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못한 나의 손끝이 덩달아 움직였고.
“답답할 텐데 내려와요. 뒤뜰에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베르와 나는 뒷마당 한편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뭡니까?”
“뭐가요.”
“지금 후배님을 괴롭히는 그 녀석 말이에요.”
다짜고짜 무슨 말인가 싶지만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 또한 나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내 스스로가 외면하며 피했을 뿐, 베르와 에스카는 늘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작정하고 온 느낌이랄까.
적극적인 베르의 태도에 나는 헝클어진 속내를 슬며시 드러냈다.
“실패해 본 기억이 있나요.”
“더럽게 많죠.”
“뒷감당은요?”
“감당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냥 털어 내고 다시 시작하는 거죠.”
역시나 베르는 대수롭지 않은 느낌으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
베르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이런 무겁지 않은 진지함일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실패라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질문의 난이도를 높여 다시 의견을 물었다.
지금의 좌절은 이것으로 시작된 체념의 결과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극복할 수 없으면 안고 가는 거죠.”
“안고 간다고요?”
“네.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요. 후배님은 포기할 생각인가요?”
갑작스런 반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포기하려는 건가?
아니면 답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것일까.
“인간의 의지는 때론 믿기 힘든 일을 해내곤 합니다.”
“…….”
“그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하죠. 스스로의 미래를 단정 짓지 마세요, 후배님.”
나지막한 베르의 말은 죽어 가던 나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 * *
서 있으면 땅이지만 걷는 순간 길이 되는 법.
‘길이 없으면 찾는다.’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여정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 남짓.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고, 미래를 논하기엔 지나온 시간이 하찮았다.
그러니 일단 가 보는 거다.
리베에 있다는 치료사도 찾아보고, 묵철보다 단단한 금속도 찾는 거다.
그조차도 안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
‘받은 건 돌려줘야지.’
뭐가 됐건.
그 자식만큼은 반드시 찾아내 으깨 버릴 것이다.
“후배님, 저 사람들 또 찾아왔는데 어쩔 겁니까? 돌려보낼까요?”
그리고 그 시작은 이것부터.
“아니요. 만나러 갈게요.”
뒤뜰로 내려간 나는 찾아온 반투족 3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왜 웃는가?!”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피식거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나름 반가운 얼굴이랄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귀 직전의 그들은 엄연한 나의 동료였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수밖에.
“허허… 그 웃음은 우리에 대한 경멸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이번 회 차에도 녀석들은 투박하게 다가왔다.
“계속 그리 웃는다면 다시 한번 결투를 신청…….”
“반가워서 그래.”
“…엉? 그게 무슨 소린가? 그대와 우리가 반가울 게 무에 있다고…….”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부족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대화의 상대는 자연스레 곁으로 넘어갔고.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반라의 여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내용이야 다르지 않을 터.
“나를 책임져라.”
앞뒤 자른 그녀의 말은 다짜고짜 책임지란 얘기였다.
“나의 몸과 마음은 그대의 것이다.”
거기에 오해 사기 딱 좋은 이런 말까지.
“어우… 후배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곁에 있던 베르는 나의 옆구리를 찌르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이젠 내가 대답할 차례.
“좋아. 책임질게.”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요구를 수용했다.
시원한 대답에 동공을 키우는 별 보러 갈래는 당황한 표정으로 부족장을 바라보았다.
“어흠… 혹시 착각할까 싶어 말하네만, 나와 저기에 있는 형제도 그대를 따를 생각이라네.”
이때다 싶었는지, 곁에 있던 부족장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
“…설마 여인만 취할 생각은 아니겠지?”
부족장은 조심스런 말투로 나의 생각을 캐물었다.
“그래, 너도 책임질게.”
당연한 얘기 아니겠는가.
카슈타르에서 보여 준 부족장의 행동은 약속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한걸음 뒤에 있던 쌍도끼 녀석뿐.
“우리를 갈라놓을 순 없다! 우린 똥 쌀 때 빼곤 평생을 함께했단 말이다!”
갑자기 홀로된 녀석은 다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절실해 보였는지, 측은함을 넘어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누가 갈라놓는데?”
나는 울기 직전인 녀석을 보며 살갑게 대답했다.
순간 환해지는 쌍도끼의 얼굴.
“크흐흠, 사실 나는 쫓겨난 게 아니다. 궁금해서 따라왔다가 이렇게 됐을 뿐.”
녀석은 한결 느슨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을 보탰다.
“그래, 술이 원수지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어어? 그건 우리 아버지가 자주하는 말인데. 그걸 그대가 어찌?”
어찌 알긴 뭘 어찌 알았겠나.
이름이 모든 걸 다 말해 주고 있는데.
술김에 태어난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동료로 마주하게 되었고.
“가슴을 가릴 바엔 차라리 벗고 다니겠다!”
나는 벗어 재끼는 놈들을 붙잡아 방어구 상점에 처넣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