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귀한 손님 모셔다 놓고 그게 무슨 소리냐.”
철없는 둘째 아들의 망발에 남자는 얼굴을 구기며 쓴소리를 뱉어 냈다.
노성을 지르는 남자의 정체는 마론 후작.
페이소스 가문의 수장이자 궁내부 장관인 마론 데 페이소스 후작이었다.
“그렇게 화를 내실 일이 아니라니까요?”
“긴말할 것 없다. 당장 나가거라.”
평소 체면을 중시하는 페이소스 후작이었다.
그런 그가 귀한 손님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이유는 그만큼 아들의 말이 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얘기나 들어 보시죠.”
“아닙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귀담아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괜찮다는 손님의 말에 마론 후작은 정색하며 대화를 정리했다.
하나 호기심이 동한 걸일까.
“저는 괜찮습니다. 저런 부탁을 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크흐음…….”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허튼소리가 분명합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헛소리라면 그때 가서 처벌하면 그만이지요.”
손님이란 남자는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느긋한 그의 시선은 아들인 노이에게로 향했고.
“자, 어디 들어 볼까? 만약 나를 능멸한 것이라면 팔 한 짝 정도론 안 끝날 거다.”
남자는 덤덤한 말투로 속사정을 청했다.
어깨를 으쓱이는 노이.
“이 결투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겁니다.”
노이는 여유 있는 말투로 양측의 이득을 약속했다.
“자네야 이겨서 좋다 치자고. 하지만 내가 좋아야 할 이유는 뭔데?”
남자는 눈썹을 끌어 올리며 차갑게 반문했다.
당기는 구석이 전무한 상황이니까.
하나 노이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상대가 빅터의 제자거든요.”
거절할 수 없는 이름이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
“빅터 크로제요.”
이어지는 노이의 말에 남자의 눈이 돌변했다.
서재 가득 울려 퍼지는 섬뜩한 광소.
“크하하하핫! 빅터라고? 그게 정말인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스승을 닮아서 버르장머리도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친 손을 내밀었다.
노이는 그 손을 맞잡았고.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주세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특별한 부탁을 추가했다.
* * *
빠르게 지나는 시간을 가리켜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사용하곤 한다.
눈 깜빡할 사이라고…….
결투가 확정된 직후, 나에겐 4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시간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사라졌고, 숙련도를 위한 나 자신과의 싸움은 집요하리만큼 길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산 너머 산이라고 했던가.
수련의 조건은 더욱 가혹해져 숙련도의 증가는 사실상 미비한 수준이었다.
전반적인 수치는 대략 2,300대 전후.
하나 수련은 헛되지 않았으니, 동작의 속도와 예리함은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크윽, 이런 짐승!”
가볍게 휘두른 나의 공격에 별 보러 갈래는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난히 크게 들썩이는 흉부의 움직임.
여전히 선명한 그녀의 깊은 계곡은 땀으로 번들거리며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어디서 개수작이야! 빨리 안 일어나?”
저런 모습에 흔들리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칫, 역시 안 먹히는군.”
툴툴거리던 별 보러 갈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그렇다.
드디어 녀석들에게도 정상적인 의복이 생긴 것이다.
― 반투족에게 방어구는 수치! 차라리 죽음을 달라!
― 가슴을 가릴 바엔 차라리 벗고 다니겠다!
― 나도 벗어?
물론 크고 작은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심지어 홀딱 벗어 버리는 사태까지 있었으니,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저항을 이겨 냈고, 결국엔 익숙해졌다.
그러니 발가벗고 널을 뛴다고 한들, 이제 나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나 로제는 달랐다.
그날 이후로 로제는 별 보러 갈래의 곁을 의식적으로 피해 다녔다.
자괴감이 든다던가?
그녀의 엄청난 굴곡을 목격한 로제는 한동안 식음을 전패하며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이해한다.
나의 웅장함을 목격한 남성들도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삶의 의욕을 잃곤 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수련 상대였던 반투족 3인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이유라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실력과 능력의 차이.
그들은 대련 상대일 때보다는 측정 도구로써 더욱 빛을 발했다.
“다음은 술김에.”
“크으윽! 숭고한 이름을 더럽히다니. 나의 쌍 도끼가 용서치 않으리!”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나는 묵직한 한 방을 선사했다.
녀석은 시원하게 날아갔고.
“끄아아아아아…….”
허공을 가르는 녀석을 따라 부족장은 바쁘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널브러진 녀석의 곁에 다가가 밝은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아까보다 한 걸음 더!”
그렇게 나는 성장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후…….”
이것으로 예정된 수련은 모두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휴식을 취하며 심신을 정리하는 것뿐.
하지만 휴식의 시간은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오, 이렇게 화끈한 대련은 처음 보는군.”
기척도 없이 나타난 반크스가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간 잘 지냈는가? 하찮은 직책 덕분에 시간을 내기가 영 어려웠다네.”
반크스는 너스레를 떨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 하찮은 직책이란 무려 왕실의 기사단장.
그의 거처는 왕실에 있었고, 이렇게 마주하는 건 4일 만에 처음이었다.
“오러가 보이지 않던데, 혹시 기색을 감추는 기술인가?”
역시나 무인답게 그의 관심은 조금 전의 일격으로 향했다.
순수한 힘으로 휘두른 묵직한 한 방. 하지만 그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할 수밖에.
“그냥 없는 건데요.”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 농담이구만.”
하지만 반크스는 나의 얘기를 믿지 않았다.
“그래, 빅터 공의 새로운 비기인가 보군. 시간 날 때 나에게도 좀 알려 주게. 하하하.”
확실히 반크스는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해는 한다.
나의 움직임은 상식의 선을 넘었으니까.
오러를 감추는 기술이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 차라리 그런 말이 더욱 신빙성 있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결투 전에 쉬어야 할 텐데 내가 방해가 됐구먼. 이만 가 볼 테니 나중에 보세.”
그렇게 반크스는 사라졌고.
“컨디션은 어떤가요.”
그를 대신해 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상입니다.”
“다행이네요. 계획대로 된다면 아버님의 생각도 바뀌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처음 마주했던 그날 이후, 제논 백작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궁금해할 법도 하건만,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열어젖혀 로제를 도울 생각이다.
따라서 평범한 승리로는 부족할 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아참, 카잔으로 떠난 대원에게서 방금 연락이 도착했어요.”
각오를 다지는 나에게 로제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그것은 상단을 따라나선 아이작의 행방.
“두 번째 경유지는 소득이 없었고, 지금 세 번째 지점으로 이동하는 중이래요.”
3일 전에 출발한 로제의 부하들은 상단의 행적을 따라 아이작의 흔적을 쫒고 있었다.
“벌써요?”
추적에 특화된 인력이라더니 정보를 모으는 방식이나 범위가 나의 생각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경유지는 기본이요, 경로에 포함된 지역이라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낱낱이 조사했다.
게다가 신속함은 말해 뭐 할까.
“대단한 친구들이네요. 그 넓은 지역을 그리도 빠르게 찾아다니다니.”
걱정 말라던 로제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문가라고 하는 거겠죠. 오늘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라니 새로운 전서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로제는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고마움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던 그때, 연무장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가온 내성의 경비대원은 굳은 얼굴로 결전의 시간을 알려 왔다.
* * *
도착한 고대의 무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그저 넓은 평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덩이가 길게 파여 있었는데.
“저게 다 사람 뼈라고요?”
깊은 구덩이 바닥에는 풍화된 하얀 뼈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원초적인 무덤.
이곳의 정체는 오래된 과거의 처형장이었다.
“와 보니 어때? 죽기에 딱 좋은 장소지?”
뒤엉킨 백골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음성이 어깨 너머로 들려왔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생긴 것부터 시작해 목소리까지, 이토록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녀석이 가진 특별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너도 저기에 휙∼ 던질 거야. 그러니까 잘 싸우라고.”
피부에 뭘 처바른 건지, 노이는 번들거리는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대로 모가지를 붙잡아 구덩이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
나는 노이가 아닌 뒤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해야 했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나의 시선을 받아 내는 정체불명의 사내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 대리 참가자?’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나의 본능은 그를 지목하고 있었다.
이토록 생소한 위압감이라니.
저 남자의 아우라에는 무언가 특별한 기세가 숨어 있었다.
“왜 쫄려? 안 돼. 이젠 취소도 못한다고.”
진지해진 나를 보며 노이는 한층 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쫄릴 것까진 아니더라도 수상했기 때문이다.
저게 6성 중반이라고?
실제로 그의 옆에는 이 사달의 주범인 긱스가 함께 서 있었다.
그의 경지 역시 똑같은 6성.
비록 초입이라곤 하나, 두 사람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선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꼬인 것 같은데…….’
완벽했던 우리의 계획이 뒤틀린 게 분명했다.
로제가 말한 후작가의 전력에는 저런 특이점을 가진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결과는 빤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노력은 해 보라고. 보는 눈들이 있잖아.”
노이는 피식거리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진영으로 향했고, 나와 로제는 정체불명에 남자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내세웠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네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똑 부러졌던 로제 역시, 이 순간만큼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반크스도 몰랐으니까.
그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난색을 표해 왔다.
“붙어 보면 알겠죠.”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결투를 준비했다.
이제 믿을 것은 오직 내 자신뿐.
비록 마스터리 레벨을 올리진 못했지만, 지난 4일간의 수련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니 스스로를 의심치 말자.
나는 분명히 빨라졌고.
나의 해머는 확실히 강해졌다.
주문처럼 각오를 다지며 해머의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지금부터 합의된 내용에 따라 정당한 결투를 시작하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제논 백작이 결투의 시작을 선언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늘어지는 그림자를 밟으며 고대의 무덤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와 정체불명의 남자는 지근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한층 짙어진 위험한 분위기.
꿀꺽…….
정신을 차렸을 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이후였다.
“시작하게.”
정적을 깬 제논 백작의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그에 신호수의 활이 하늘로 향했다.
쏴아아악!
한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잠시 후면 바닥으로 떨어질 터.
그 순간이 바로 격돌의 시작이 될 것이다.
“…….”
1분 같은 1초가 쉬지 않고 지나갔다.
나의 모든 청각은 떨어질 화살 끝으로 향했고, 정면을 향한 나의 시선은 한 점에 집중했다.
이제 시작된다.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전신의 근육을 수축했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근육.
준비를 마친 나의 몸은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마침내.
점처럼 보이던 화살이 선을 그으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슈아아아악―
지축을 박차는 나의 두 발은 놈을 향해 사납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수필승!
불확실한 상대를 마주한 나의 전략은 사전 제압이었다.
애초에 실력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본 적 없던 오러에 헛숨을 내쉬며 눈을 부릅떴다.
이토록 농밀한 오러라니.
‘젠장.’
이 남자의 오러는 분명히 7성급 이상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대륙을 통틀어 고작 일곱 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귀한 고수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런 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나와 버린 상황.
시간이 지체된다면 나의 승리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부아아아악―
공기를 찢는 묵색의 해머는 놈의 얼굴을 향해 지체 없이 날아들었다.
닿아라!
이대로 뻗어 가 녀석의 머리를 짓이겨라!
나는 이어질 둔탁한 소리를 기대하며 해머를 휘둘렀다.
하지만 돌아온 소리는 낯설었고.
스르릉―
거대했던 나의 해머는 반으로 갈라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 시발…….”
눈앞에 펼쳐진 거짓말 같은 광경에 할 수 있는 말은 욕지거리뿐이었다.
칼날같이 예리한 오러.
푸르다 못해 백광을 띄는 오러는 차가운 빛을 발하며 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그렇게 다가온 남자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너… 빅터의 제자라며?”
예상치 못한 질문의 내용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니, 대답을 망설인 걸까?
넙죽 답해 주기엔 녀석의 정체가 너무도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질문의 요지는 호기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적의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먼저 가 있어라. 네놈의 스승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차가운 녀석의 말을 끝으로, 남자의 길쭉한 검이 나의 정수리를 지나갔다.
스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이거 왜 이러지?’
같은 곳을 봐야 할 나의 두 눈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쪽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노이의 모습.
또 다른 눈에 들어온 장면은 혼절하며 쓰러지는 로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이던 나의 몸은 둘로 나뉘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힘든 괴이쩍은 감각…….
조금씩 어긋나던 나의 세상은, 넓게 갈라지며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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