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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44화 (44/203)

44화

각자 원하는 것을 놓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을 협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하는데.

“좋아요. 아이작이라는 그분, 제가 알아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로제와 나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서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말하자면 상부상조랄까.

나는 로제의 정보력을 원했고, 로제는 진행 중인 혼담에 변수가 생기길 원했다.

“진짜 결혼하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로제는 아리송한 말로 정확한 대답을 피해 갔다.

하지만 그 대신.

“일단 아버님의 관심부터 돌리고 나서 얘기해요.”

묘한 뒤끝을 남기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일단이라…….

명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달리 캐묻진 않았다.

이런 건 동화 속의 이야기니까.

첫눈에 반한 평민과 귀족 여인의 로맨스 따위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걸 구분 못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고, 로제란 여인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애타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젊음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다니 안타깝군. 내가 그 나이 때는 눈만 마주쳐도 물레방앗간이었는데…….”

반크스는 미적지근한 나와 로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 허튼 꿈을 꾸며 살아가기엔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상황은 저희가 만들어 볼게요. 이반 님은 멋진 모습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논 백작의 호감을 얻는 일이었다.

거기에 정치에 무심한 모습까지 보여 주면 완벽할 터.

“개새끼와 평민의 대결이라… 흥미진진하겠군.”

얘기를 듣던 반크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곧장 걸어 나의 앞으로 다가왔고.

“응원하겠네, 이반 군.”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이제 다시 둘만 남은 상황.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까 얘기한 거요. 만들어 보겠다는 상황이 어떤 건가요?”

대충이라도 알아야 뭐든 준비할 것 아닌가.

나는 임기응변의 달인도 아니고, 복잡한 귀족 사회는 더더욱 모른다.

그러니 사전 정보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음… 우선은요.”

질문을 받은 로제는 덤덤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반 님을 검증할 기회부터 만들 거예요.”

“어떤 걸 검증하는데요?”

“무엇이든요.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와 외삼촌이 아버님을 설득할 거예요.”

똑 부러진 대답과 달리 정해진 계획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들겠다는 기회도 실행 여부가 불투명한 일… 부친이 거절하는 순간 모든 건 부질없는 계획이 된다.

하지만 왜일까.

걱정하는 나완 다르게 로제의 얼굴은 편안하기만 했다.

“아참!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여쭤보지 못했는데, 후작가의 사람들과 다툼이 있으셨다면서요?”

“아… 제 동료를 희롱하기에 손 좀 봐줬어요.”

“희롱을 했다고요?”

로제는 오후에 있었던 싸움을 언급하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는데.

“그 왕 가슴 언니…….”

“왕 뭐요?”

중얼거리던 로제의 입술은 분명히 가슴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왕 가슴.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별 보러 갈래를 거론하는 것이 확실했다.

“아, 아니에요. 하여간 노이 그 자식은… 쯧.”

말을 돌린 로제는 혀를 차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미묘하게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큰 걸 좋아하시나…….”

“무슨 큰 거요?”

“…네? 뭐가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로제는 자기가 한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방금 큰 걸 좋아하냐고.”

“예? 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속으로 생각, 아니!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로제는 가슴을 가리며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

물씬 풍기는 역린의 냄새.

가슴이 어쩌고는 이제 묻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캐물었다간 큰일이 날 테니까.

“흠… 저희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아닌가요?”

하여 나는 사건의 요점을 바꿔 찝찝하던 부분을 거론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백작가의 손님이니까.

몰랐을 때야 상관없었지만, 사실 관계를 알고 나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괜찮아요. 기왕 손봐 주는 거 노이 그 자식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로제는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흘러 넘겼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사고를 치거든요. 이참에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동네 건달 대하듯 말을 하니 일을 저지른 내가 더 의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로제 아가씨, 빨리 접견실로 가 보셔야겠어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사건의 흐름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도로시.

헐떡이며 등장한 도로시는 나와 로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뭔데, 왜 또 난리야.”

그러고는 영문을 묻는 로제의 말에 두 발을 구르며 대답했다.

“노, 노이, 그 후작가의 망나니가 왔어요!”

“노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후작의 차남 노이 데 페이소스.

“네! 지금 접견실에 찾아와서 이반 님을 내놓으래요!”

뒤를 이어서 나온 것은 황당하게도 나의 이름 두 글자였다.

결국 올 것이 온 건가?

미간을 찌푸린 나를 대신해 로제는 동그란 눈을 키우며 도로시에게 되물었다.

“이반 님을?”

“네. 자기 수하들을 해코지했다고 당장 내놓으래요.”

답을 들은 로제의 시선은 당사자인 나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어쩌겠나.

“가시죠.”

나는 덤덤한 얼굴로 앞장서 후원을 나섰다.

* * *

“너냐? 우리 애들 건드린 게?”

접견실에서 마주한 노이는 보자마자 반말을 지껄였다.

맘 같아선 그대로 턱주가리를 돌려 버리고 싶었지만.

“댁의 애들인지는 모르겠고, 시비 거는 이상한 놈들 손봐 준 기억은 있습니다.”

나는 녀석의 눈을 노려보며 적당히 돌려 말했다.

“기분 나빠…….”

그에 노이는 낮게 웅얼거리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왜 그랬냐?”

여전히 반말을 지껄이는 빌어먹을 자식.

턱을 치켜든 녀석은 거만한 얼굴로 따지듯 나에게 되물었다.”

“부하들이 얘기 안 하던가요? 쓰레기 같은 짓을 하다가 혼났다고.”

“쓰레기?”

“좋게 말해서 그 정도죠. 직접 보셨으면 이곳에 못 오셨을 겁니다.”

짧은 문답이 지나가며 접견실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굳게 다문 녀석의 입술.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차라리 지금이 좋았다. 녀석이 계속 입을 열면 없던 화도 치밀 테니까.

‘거래만 아니었어도.’

녀석의 못생긴 면상 따위 진즉에 부셔 놓고 리베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나 이제 와선 그럴 수도 없는 상황.

로제와 나는 서로의 요구를 수락하며 각자의 이익을 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니 꾹꾹 눌러 가며 참을 수밖에…….

“모시는 분의 얼굴에 똥을 뿌려도 유분수지, 어디 가신 따위가 주군의 체면을 그렇게 망가뜨린 답니까?”

그 대신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녀석의 부하를 비꼬았다.

“대로변에서 희롱이라뇨. 그것도 다른 귀족의 영지에서요. 그래서 쥐어패 버렸습니다. 후작가의 사람이 그럴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신랄하게 말이다.

오늘 뭔가 되는 날인지, 입술에 기름칠을 한 듯 술술 잘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브라함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랬다면 저는 스승님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죠.”

분위기가 오른 나는 한껏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네 스승이 누군데?”

그제야 녀석은 입을 열었고.

“빅터 크로제, 귀가 있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터져 버린 입담은 결국 빅터마저 소환해 버리고 말았다.

“아, 빅터 크로제라……. 좋아, 병신 같은 내 새끼들은 돌아가는 즉시 목을 따 주지. 그런데 너…….”

노이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한 호흡이 지나 다시 말을 이었으니.

“카슈타르 가문과는 무슨 사이냐?”

녀석은 나와 로제의 관계를 물으며 못생긴 얼굴을 구겨 댔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적당한 말을 찾아 고민하는 사이, 앞으로 나선 로제가 상황을 정리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시면 저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네요.”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개 쌍놈이 아니던가.

“그래서 같이 잤어?”

녀석은 지 얼굴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지껄였다.

“뭐, 뭐라고요?!”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이 미친 새끼가.’

머릿속에선 놈을 두들겨 패는 상상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명예를 모르는 인간이군.”

미친개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문답무용!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결투 아니겠는가!”

구석에 있던 부족장은 어느새 다가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두 미친개가 서로 통한 것일까.

“결투라… 그거 재미있겠네. 한번 해보자고.”

노이는 입꼬리를 비틀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냥은 시시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녀석은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대리 결투.

“나 같은 귀한 혈통이 천한 네놈과 칼을 섞을 순 없잖아. 억울하면 네놈도 하나 구해 와.”

놈은 히죽거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역겨운 표정은 덤이었다.

“왜? 무서워? 쫄리면 무릎 꿇고 빌어 보든가. 싹싹 빌면 살려는 줄게.”

놈은 경망스레 다리를 떨며 시답지 않은 소릴 내뱉었다.

그 순간 접견실의 문이 열렸고.

“아, 마침 나오시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이는 가식적인 표정으로 제논 백작을 맞이했다.

“오셨구려.”

“격조해서 죄송합니다. 로제 양이 워낙 바쁘셔서 찾아뵐 명분이 없었지 뭡니까. 하하하.”

영혼 없는 인사를 나눈 녀석은 자리에 착석해 대화를 이어 갔다.

내용이야 빤하지 않겠나.

녀석은 자신의 부하와 나의 다툼,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까지 상세히 고해바쳤다.

마치 고자질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제가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타국의 사람인데다가 백작가의 비호를 받고, 거기에 빅터 경의 제자라니 더욱 껄끄럽더군요.”

그렇게 녀석은 쉴 새 없이 주절거리며 밑밥을 뿌려 댔다.

그리하여 나온 본론은 이것.

“결투를 하시겠다?”

녀석은 합법적인 살인의 제물로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가문이 받은 수치를 지울 수 없으니까요. 제논 백작님께 참관을 요청합니다.”

이어지는 노이의 말에 백작은 턱을 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갔고.

“그럴 수도 있겠구려, 좋소. 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백작은 날카로운 시선을 돌려 나의 두 눈을 마주했다.

미묘하게 이어지는 정적.

말없이 바라보던 백작은 노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날짜는 합의된 것이오?”

“내일 저희 가문에 큰 손님이 오십니다. 이래저래 모시고 나면 4일 정도 걸릴 듯한데, 그 이후라면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어깨를 으쓱이던 노이는 나를 바라보며 턱짓을 날렸다.

너는 어떠냔 뜻일 터.

“5일째 되는 날 하면 되겠네요.”

나 역시 문제될 부분은 전혀 없었다.

남는 시간이야 수련에 매진하면 그만이니까. 그 정도 시간이면 능력치 상승도 기대할만 했다.

“좋소. 그럼 5일 뒤에 하는 것으로 합시다. 장소는 고대의 무덤이 어떻겠소?”

“오, 기발한 생각이십니다. 어차피 무덤가니 사체 처리도 쉽겠네요.”

장소를 정하자는 백작의 말에 녀석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밉살스레 빈정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는 일.

“그거 편리해서 좋네요. 돌아가실 땐 혼자 가야 할 테니 넉넉히 데려오시죠.”

나는 피식거리는 놈을 향해 하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도발은 계획된 움직임이었으니…….

― 그 인간 성격상 분명히 허락할 거예요. 원래 깊게 생각하고 말하는 녀석이 아니거든요.

작금의 상황은 로제와 내가 만든 결투라는 이름의 함정이었다.

― 하지만 검을 다룰 줄 모르니 본인이 직접 나서진 않겠죠.

거기에 대리 결투를 신청할 거라는 정확한 예상까지.

로제의 예측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하나 이것만으로 이런 계획을 세웠을까?

― 페이소스 후작 가문은 전형적인 정치가 집안이에요. 왕도에 기거하는 귀족이라 호위 기사 말고는 사병도 없답니다.

의외로 약한 후작가의 무력은 이 작전을 결심하게 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보유한 호위 기사의 수준은 6성이 최대치.

그중에 한 녀석은 이미 두들겨 패 버렸고, 그보다 뛰어난 녀석은 6성의 중반의 기사였다.

그러니 결투의 승산은 나에게 있을 수밖에.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둬라.’

그 다음은 지옥일 테니까.

철없이 실실대는 노이를 보며 나는 애잔한 마음을 담아 미소를 건넸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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