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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43화 (43/203)

43화

‘아… 시발. 큰일 났네.’

고급스런 카펫을 지나며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선 불안함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이 지랄 같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남자는 재수가 없다면 오늘 병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묵직한 문을 두드리며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은 카슈타르 성도에 위치한 고급 객점.

하지만 그는 괴물의 둥지를 향하는 아득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대로 다시 되돌아갔으면…….

아무런 답이 없길 간절히 바라고 원했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구야.”

결국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긱스입니다.”

“들어와.”

자주색 문 너머로 들려온 소리는 그를 작은 지옥으로 불러들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일이 좀 생겨서 그만…….”

방으로 들어선 남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유는 단하나.

“그래서 로제 그년은 뭐라고 했어?”

눈앞에 있는 미친개를 자극하는 건 최대한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말 똑바로 안 해? 혓바닥을 뽑아야 제대로 말할래?”

이 사람은 천하가 인정하는 쓰레기니까.

노이 데 페이소스라 쓰고, 개새끼라고 읽는 남자였다.

“건강 문제로 이번 주에도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소식을 전한 남자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이제부터 지랄을 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나 무슨 변덕일까.

“크크크… 그랬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어찌 해 보려 했으나 얼굴조차 볼 수 없어서…….”

“됐다. 애태운 대가야 돌려주면 그만이지. 화끈하게 말이야.”

후작의 아들 노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어지는 비릿한 미소.

“첫날밤이 기대되는군.”

노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런데… 너, 얼굴 꼴이 왜 그래?”

그제야 노이는 긁히고 멍든 긱스의 얼굴을 발견했다.

“맞았냐?”

노이의 추궁은 계속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놈에게 당했습니다.”

긱스는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설명했다.

“당했다고?”

“네… 처음 보는 놈이었는데 백작가에서 데려갔습니다.”

대답을 마친 긱스는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곧 날아올 귀싸대기나, 발길질 따윌 기다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노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긱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으니.

“흐음… 꼬투리 하나 잡았네?”

노이는 사악한 눈을 가늘게 뜨며 입맛을 다셨다.

* * *

“이반 님, 미안해요.”

식당을 나온 로제와 나는 다시 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식사 중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부끄럽다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니요. 괜찮아요.”

뜬금없던 로제의 속사정이야 그저 민망했을 뿐, 제논 백작의 무심한 모습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위세 높은 명문 귀족이 아니던가.

나 같은 평민과 겸상을 허락했으니,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보여 준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볼일도 없고.’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딱히 문제 삼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로제는 마음에 걸렸나 보다.

“원래 저리 차가우신 분이 아니신데… 저 때문에 예민해지신 것 같아요.”

계속해서 사과를 반복했다.

이래서야 도리어 내가 미안해질 지경.

“정말 괜찮아요. 백작님께서 평민인 저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 역시 손사래를 치며 로제의 말을 부정했다.

“게다가 결혼 얘기까지 나왔으니…….”

부쩍 줄어든 백작의 말은, 반크스의 폭로로 인해 더욱 줄어들었다.

차라리 냉랭해졌다고 할까?

얼굴 가득한 불편한 기색에 지켜보는 내가 다 조마조마했었다.

“이반 님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로제는 고개를 저으며 나의 말을 일축했다.

“일전에 제가 했던 얘기 기억하시나요?”

“어떤…….”

“사람의 가치를 신분만으로 논하지 않는다던 얘기요.”

기억난다.

건네주는 펜던트를 거부하자, 로제는 나에게 저런 말로 설득했었다.

“가문의 신조이자, 아리안 왕국의 통치 이념이에요. 아버지께서도 항상 그렇게 가르치셨죠.”

하나 현실의 괴리였을까.

신분이 정한 넘을 수 없는 벽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후작의 졸개부터 시작해 이곳까지. 카슈타르에 온 내내 뼈저리게 경험하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된 건 저 때문이에요.”

로제는 그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제가 여자라서 그래요. 가문을 이을 수 없는…….”

말끝을 흐리던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가문을 이을 수 없는 딸.

그리고 유력한 가문을 등에 업은 남자.

‘혼담이 오간다더니.’

그것이 데릴사위였던 모양이다.

한데 얼마나 급하기에 그런 평판 나쁜 녀석을 사위로 맞이하려는 걸까.

“아무튼 미안해요. 외삼촌이 제 편을 들어준다고 나섰는데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네요.”

로제는 다시 한번 사과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아비였다면, 그런 녀석을 상대로 딸과 가문의 미래를 시험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결혼 승낙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와서는 없던 측은지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대화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여기들 있었구나.”

어색한 침묵을 깨며 반크스가 나타났다.

“외삼촌!”

그에 화들짝 놀라는 로제.

로제는 나와 반크스를 번갈아 보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흠, 여전히 진전이 없어 보이는구나. 나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아니요. 절대로 필요 없어요.”

피식 웃는 반크스를 향해 로제는 결연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남자 역시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걸.

“이반 군, 신부감으로 우리 로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역시나 반크스는 앞뒤 자르고 훅 들어왔다.

“쿨럭…….”

“미쳤어!”

‘쿨럭’은 나고, ‘미쳤어’는 로제였다.

“저 녀석이 응석만 부릴 줄 알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네. 보아하니 이반 군이 로제의 첫사랑이 된 것 같은데… 삼촌인 내 입장에선 돕고 싶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랑곳없는 반크스는 또박또박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내 입장은 달랐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와는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격이 다르니까요.”

호감의 유무를 떠나, 로제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가분의 신조?

왕국의 통치 이념?

모두 다 의미 없는 허상이다.

그것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의 벽은 철옹성처럼 높고 단단하다.

귀족이 귀족일 수 있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 자네가 그 격차를 줄이면 되지 않겠는가.”

“왜 그래야 하죠?”

“조카의 행복을 바라니까. 노이 같은 쓰레기에게 희생될 바엔, 차라리 가문이 몰락하는 게 100번 옳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시작된 반크스의 말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출산 중 사망한 로제의 엄마로 시작해, 홀로 로제를 키워 온 제논 백작까지.

백작은 무남독녀인 로제를 위해 뿌리 깊은 관습마저 바꾸려 했었다.

목표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타파하는 것.

장남이 아닌 딸에게도 가문을 이을 수 있는 권리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굽혀야 했고, 가문을 잇기 위해선 딸인 로제를 대신해 데릴사위를 들여야 했다.

“그게 문제였던 거지.”

미간을 찌푸린 반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제를 바라보았다.

“귀족 가문에서 데릴사위를 뽑는다면 후보는 정해져 있다네. 보통은 가문을 잇지 않는 차남 이하의 형제들이나, 몰락한 가문의 아들이 후보라 할 수 있겠지.”

“그렇겠네요.”

생각보다 재미있는 반크스의 말에 어느덧 나는 귀를 세우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태생부터가 결함투성이라네.”

“결함이라니요?”

“부와 명예에 대한 열등감이지. 장남에게 모조리 빼앗겨 갈증만 남은 게야.”

“하면…….”

“결혼을 성공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네. 그런 놈들이 데릴사위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반크스는 냉소를 띄우며 호흡을 다듬었다.

어쩐지 다음의 이야기가 예상되는 상황.

“부인을 등지고 가문을 말아먹는다네.”

결과는 예정된 비극이었다.

“흠…….”

결말이 저렇게 되니 오히려 의문만 가득해진다.

저런 폐단이 있다면 제논 백작도 이미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백작은 후작의 아들을 데릴사위로 선택했다.

천하의 개 쌍놈이라 소문이 자자한 그 녀석을 말이다.

결국 긴 이야기 끝내 내린 나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너희들 다 이상하다고.

그래서 나는 반문했다.

“그럴 바엔 후첩을 들이면 되잖아요. 가문을 말아먹는 데릴사위보단 차라리 서자가 낫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면 방계도 있잖아요?”

혈통이야 부계를 따르는 것이니 이 방법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사연이 있었나 보다.

말없이 끄덕이는 반크스를 대신해 로제가 나서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저희 가문은 대대로 손이 귀했어요. 아버지가 7대 독자시니 사실상 방계는 없다고 보는 게 맞는 상황이랍니다.”

세상에…….

7대 독자란 로제의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대 간격을 20년으로만 잡아도 무려 140년이다.

거기에 이런 저런 변수를 합하면 200년에 가까운 세월인 샘이 아닌가.

방계가 있다 한들 외부인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재혼할 생각이 없으세요.”

“왜요? 가문의 후사가 걸린 일이잖아요.”

“그건…….”

답을 하던 로제는 말끝을 흐렸다.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고, 감정을 추스른 로제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게 첫 번째 이유예요.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시거든요.”

로제의 말에 반크스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이라 했으니 로제의 모친과는 혈연관계일 터.

반크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두 번째는…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아서예요.”

“남은 시간이라니요?”

“아버지는 오래 못사세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거든요. 그래서 서자를 포기하셨어요.”

내가 머리가 나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로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한부라면 더욱 서둘렀어야 했고, 지금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에 끼어든 반크스는 다른 견해를 드러냈다.

내가 몰랐던 귀족의 민낯.

“서자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아비가 모든 관계를 통재하기 때문이라네. 하나 그것이 안 된다면… 남은 건 처절한 살육뿐이지.”

이어지는 반크스의 말은 듣는 귀를 의심하게 했다.

“정실부인의 흔적은 여러모로 거슬리는 법. 후첩의 세력은 어떻게든 로제를 해코지할 걸세.”

참으로 기구한 팔자가 아닌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하나는 배 다른 동생에게 당하고, 다른 하나는 신랑에게 모든 걸 빼앗긴다.

“그래서 후작의 차남을 선택한 거라네. 인간 말종에 여색만 밝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

“아…….”

듣고 보니 나름 기발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저 주색잡기로 시간을 보낼 테니까.

가문을 팔아 본인의 야심을 채울 그릇은 아니란 얘기였다.

거기에 한 가지 더.

“후작가와 백작가가 만났으니 정치적 음모에 휘말릴 일도 없을 터. 나름 심사숙고한 결정이었지.”

제논 백작의 입장에선, 간판이 필요한 사위가 아니라 배경이 되어 줄 사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크스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조카라서가 아니라, 로제는 정말 아까운 아이라네. 외모도 출중하고, 배움의 깊이도 훌륭하지.”

“…….”

마치 폭풍전야의 느낌.

뭔가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가문까지 유서 깊으니 배우자로선 최고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올 타이밍.

“흠이 있다면 발육 상태가 좀 거시기하다는 건데…….”

반크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의 시선도 로제에게 향했으니.

“뭐, 뭐가요?! 이거 등짝 아니거든요!”

가슴을 가린 로제의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후원을 맴돌았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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