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로제 아가씨!”
다급하게 달려오는 이 여인의 이름은 도로시.
로제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는 몸종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자매? 혹은 친구?
무남독녀인 로제에겐 유일한 말벗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숨을 고르는 도로시를 보며 로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 오셨어요!”
여전히 가쁜 호흡을 내뱉는 도로시.
“오다니? 누가 왔는데?”
“아, 그분 있잖아요. 불법적으로 잘생겼다는 그분!”
도로시는 채 진정되지 않은 호흡으로 다짜고짜 그분의 소식을 전했다.
“…이반 님?!”
“네! 그분요! 벌써 접견실에 도착하셨대요.”
도로시의 고개가 격하게 끄덕이며 로제의 말에 수긍했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해!”
“듣자마자 왔거든요! 아가씨야 말로 아직까지 옷도 안 고르고 뭐하셨어요?!”
“뭐하긴! 화장 고치고 있었지.”
앙칼지게 답하는 도로시를 두고, 로제의 걸음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애매한 발걸음.
그 와중에 로제는 고갤 갸웃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찌 이리 빨리 오셨을까?”
“빠르긴 뭐가 빨라요. 내성에서 경비 초소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아니, 그게 아니라 대수림 말이야. 예상했던 시간보다 너무 빨리 왔잖아.”
“아… 그건 그렇죠. 앞으로 2주일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화전민 마을에서 시작된 로제의 귀가 행렬은 카잔 왕국을 지나 최단 거리로 돌아왔다.
그것도 훌륭한 준마를 타고 말이다.
한데 대수림을 택한 사람들이 벌써 이곳에 도착했다니.
찾아 줄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이토록 일찍은 아니었다.
“역시 오러 마스터와 그의 제자답네요.”
“그러게.”
도로시의 말에 수긍하며 로제는 드레스 룸에 도착했다.
“뭘 입어야 하지…….”
길게 늘어선 드레스를 보며 로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군살.
“아… 요즘 스트레스 때문에 엄청 먹었는데.”
로제는 옆구리 살을 꼬집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살쪄 보여?”
“…아니요.”
“왜 대답이 느린 것 같지?”
“바로 했는걸요.”
“진짜? 그럼 이거 어때? 가슴이 확 파여서 섹시해 보이지 않을까?”
“남자는 섹시함에 약하죠.”
“좋아. 입어 보자.”
도로시의 도움으로 로제는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렇게 마주한 거울 앞.
“가슴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이건 가슴이 아니라 겨드랑이 살이잖아. 이러면 더 없어 보이지 않을까?”
“예…니요.”
“예니요? 예니요는 뭐야?! 지금 절벽이라고 흉본 거지!”
“어떻게 알았,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아가씨더러 절벽이래요? 말도 안 돼. 조금 평평해서 그렇지 절벽까진 아니라고요.”
“나가!”
씩씩거리는 로제를 두고 도로시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른 드레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이번엔 홀터넥 드레스로 바꿔 보죠.”
연한 핑크색 드레스를 꺼내 로제 앞에 내밀었다.
“아가씨는 목이 길고 예뻐서 이런 드레스가 더 잘 어울려요.”
“정말?”
“당연하죠. 이반 님도 껌뻑 넘어갈 걸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될 거예요. 아리안의 꽃은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니까요.”
도로시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로제의 뒤로 다가갔다.
* * *
“곧 나오실 겁니다.”
내성에 도착한 우리는 접견실로 안내되어 로제를 기다렸다.
백색으로 가득한 공간.
카슈타르 특유의 건축 문화는 내성으로 오면서 더욱 짙은 모습을 드러냈다.
‘결벽증 같은 건가.’
성도에서 본 흰 건물은 애교였다. 그저 자주 보이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큰 성이 백색으로 지어져 있으니 다가오는 느낌이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괜스레 주눅 드는 느낌?
이곳에서 거짓말을 했다간 눈물을 쏟으며 회개할 것 같은 성스런 느낌마저 감돌았다.
“망토 풀지 마라.”
나는 반투족 3인을 향해 으름장을 놓으며 경고했다.
“알겠다.”
“걱정 마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풀지 않겠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벌거숭이들을 그냥 소개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쯧, 오는 길에 옷을 샀어야 했는데.”
휩쓸리듯 마차에 오르는 바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자식들 옷 상태가 개판이라는 걸.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고, 내성 경비대의 망토를 빌려 대충 감싸 입혔다.
“우리 옷이 뭐가 어때서 그런가? 부족 전통의 방어구다.”
혀를 차는 나를 향해 별 머시기 여인이 투덜거렸다.
“시끄러. 네가 제일 문제야. 망토 안 벌어지게 잘 여미라고.”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인은 망토를 재끼며 따지듯 물어 왔다.
순간 드러나는 깊은 계곡.
“아니, 그렇게 막 드러내지 말라고!”
나는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망토 사이로 슬쩍 보이는 그것은 유달리 거대해 보였다.
“그대는 나의 가슴을 싫어하는군.”
정색하는 나를 향해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싫은 게 아니라…….”
민망한 것이다.
이런 데서 볼만한 게 아닐 테니까.
“이상하군, 다른 세속인들은 환장을 하던데 그대는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건가?”
“무슨 생각.”
“야한 생각 말이다. 응응… 같은 거.”
“돌았냐?
아무래도 나는 큰 실수를 범한 것 같다.
애초에 인간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너희 셋… 내가 허락하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다.”
“농담 아니야. 여기서 실수하면 두 번 다신 함께 안 다닌다.”
달라진 나의 분위기에 녀석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
주억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저렇게만 따로 두자니, 그건 그것대로 걱정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을 흘러갔고.
“로제 데 카슈타르 아가씨께서 입장하십니다.”
집사장의 소개와 함께 기다리던 로제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다가오는 로제를 바라보았다.
어설픈 기사 흉내를 내던 그날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아리안 최고의 미녀라던 몸종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로제의 모습은 고아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반 님.”
로제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등을 내밀어 왔다.
낯설지 않은 행동.
처음 본 그날에는 저 손에 육포를 쥐어 줬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간만입니다.”
짧은 인사를 건넨 뒤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아하하…….”
로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후후후…….”
나 역시 괴상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기 저분들은 뉘신지요?”
로제의 시선이 뒤에 앉은 반투족에게 향했다.
앞으로 나선 나는 녀석들을 가로막으며 소개를 시작했다.
“저와 함께하는 동료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여성분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생기셨네요.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로제의 관심은 나와 별 보러 갈래에게 향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나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별 보러 갈래는 얌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원래 과묵한 친구들입니다. 낯가림도 심하고요.”
“그렇군요.”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나는 반투족을 바라보았다.
뭔가 움찔하는 입모양이 있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아버님께선 귀가 중이세요. 마침 외삼촌도 와 계시니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함께 뵐 수 있을 겁니다.”
이어지는 로제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속은 복잡해져만 갔으니.
‘아버지에 외삼촌까지?’
가볍게 생각한 로제와의 만남은 예상을 넘어 점점 거창해져 가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이런 만남을 생각하고 찾아온 자리가 아니었다.
만나고자 했던 사람은 그저 로제 한 명뿐.
아이작을 찾는 것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 하나만 확인하면 될 문제였다.
하나 어쩌겠는가.
“아직 시간이 있으니 후원으로 나가요. 티타임을 나누기 좋은 장소랍니다.”
상황은 이미 커졌고, 나는 이미 발을 내디뎠다.
그러니 앞으로 나갈 수밖에.
“그러시죠.”
앞서 걷는 로제를 따라 나는 후원으로 향했다.
* * *
“그렇게 시간을 단축하셨군요. 말도 안 되게 빨리 도착하셔서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후원으로 나온 로제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하나 왜 그랬을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기묘한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 외삼촌이 빅터 크로제 님을 정말 존경하시거든요.”
역설적인 느낌이랄까?
슬픔을 감추려 더욱 밝게 웃고, 두려움을 묻으려 태연한 척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귀찮게 할지도 모르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귀엽게 찡그리는 저 표정마저도 어딘가 그늘져 보였다.
‘혼담 때문인가.’
초소에서 만난 경비대원은 혼담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했다.
심지어 로제마저 힘들어 한다 말하지 않았나.
에둘러 감춘다 한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난감하네.’
스스로 밝히지 않은 고민거리다.
뭔가 아는 척하기도 그렇고, 뜬금없이 물어보기도 그랬다.
그러니 이렇게 앉아서 빈 웃음만 날릴 수밖에.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헤쳐 나가기엔 나의 하찮은 말재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로제 아가씨, 백작님께서 귀가하셨답니다.”
“아, 그래? 알겠어. 모시고 알현실로 나갈게.”
보잘 것 없는 나의 사교술은 더 큰 시련을 마주하게 되었다.
“반갑소. 카슈타르의 영주 제논 데 카슈타르라고 하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반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절이었다.
이조차 잘못됐다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얘기는 들었소. 빅터 경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선 이마저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과 연을 맺었구려. 그래, 귀공에 대해 조금 더 알려 주시겠소?”
“아, 음…….”
또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나이?
사는 곳?
그것도 아니라면……
“부친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요점은 뭐 하는 집안의 자식이냐는 얘기였다.
“안 계십니다.”
“흐음?”
“고아로 자라서 부모님의 신분은 알지 못합니다.”
“아… 이거 괜한 질문을 했군그래, 미안하게 됐소.”
가볍게 사과한 제논 백작은 질문을 멈추었다.
갑자기 식어 버린 불편한 분위기.
호기심 가득하던 백작의 얼굴은 차갑게 변해 나를 외면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군.”
화제를 돌린 제논 백작은 식당을 향해 무심히 걸어갔다.
이른바 퇴짜랄까.
“가요, 이반 님.”
로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고, 반투족 3인을 보조 식당에 머물게 한 뒤 메인 식당으로 들어섰다.
“…….”
뭐가 이리도 넓은 걸까.
엄청나게 큰 식탁을 보며, 나는 앉을 자리를 찾아 쭈뼛거려야 했다.
또각또각―
서빙하는 발소리마저 크게 울려 대니 어색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
차라리 몬스터가 그리워지던 그 순간.
“반크스 님이 오셨습니다.”
식당 문이 열리며 단단한 체격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외삼촌!”
그에 로제는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저 사람인가?’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눈앞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로제의 외삼촌이자 아리안의 혼이라던 반크스 데 제노비안.
로제의 설명에 따르면 무려 빅터와 동급인 8성의 오러 마스터였다.
“며칠 만에 뵙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나타난 중년의 남자는 제논 백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나에게 다가와 거칠어진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나는 반크스 데 제노비안이라고 하네. 자네가 빅터 경의 제자로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반이라고 합니다.”
내민 손을 맞잡으며 그의 환대에 호응했다.
“어쩐지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더라니… 그럴 만했군그래.”
옆자리에 앉은 반크스는 로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삼촌.”
그에 로제는 안절부절못하며 반크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전혀 소용 없었으니.
“왜, 이 녀석아. 너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불렀잖아.”
“그만…….”
“잘생긴 남자한테 시집가는 게 소원이라며. 그래서 이 친굴 초대한 거 아니야.”
반크스는 감춰진 로제의 비밀을 하나씩 까발리기 시작했다.
“삼촌!”
참다못한 로제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고.
“거참 볼수록 잘생겼네. 이러니 로제가 홀딱 반했지.”
나를 향한 로제의 연심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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