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틀 전이면 저의 측 카라반이 맞네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여섯 개의 상단을 다 돌아다닌 끝에 결국 목표한 상단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지막 상단에 와서야 탐문을 끝낼 수 있게 됐단 얘기다.
“혹시 상단 행렬에 일반 여행객들도 참여 가능한가요?”
“가능이야 하죠.”
“혹시 명단이 있을까요? 이름이나 목적지 같은 걸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런 건 없어요. 참여라고 해 봐야 그냥 상단 행렬을 따라가는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원했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낸 것은 출발한 날짜와 경유지.
“그럼 총 여섯 군데를 들려서 카잔에 도착한다는 얘긴가요?”
그리고 카라반의 최종 목적지뿐이었다.
좋다 말았다고 해야 할까.
동선은 드러났지만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유지 전부를 확인하면서 카잔으로 들어간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게 될까.
더군다나 카잔과 브라함의 관계는 연일 악화 되고 있었으니.
‘난감하네.’
장소를 알고 있다한들 살펴보기 쉽지 않은 애매한 상황이었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에 관심을 둔 것 같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50대 후반의 장님 남성을 보신 기억이 있을까요?”
“아이고, 나가는 품목 챙기기도 바쁜데 오가는 사람을 어찌 기억하겠습니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아이작의 행적을 쫓는 건 다방면의 검토가 필요할 듯싶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상단을 나온 나는 왔던 길을 되돌려 터덜터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 * *
오후의 빛살이 길게 늘어지는 호젓한 시골길.
“운이 좋았던 걸까요?”
“그렇다 볼 수 있겠지. 사실 결과야 늘 운에 맡겨 왔으니까.”
말을 몰아가던 두 남자가 느긋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정한 금발이 돋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감색 로브를 뒤집어쓴 젊은 남자.
두 사람은 어제의 의식을 떠올리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기대됩니다.”
“그러게 말이다. 드디어 진짜가 나타났구나.”
로이드는 유독 흡족해 보였다.
의식을 통해 여러 능력자들을 만나왔지만, 이번처럼 충격적인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순수한 악.’
짙은 그의 혈향에 머리가 지끈거려 왔었다.
“능력도 어찌 그렇게 몰아서 받았을까요?”
“그러니 특별한 것 아니겠느냐.”
로이드는 옅은 미소를 띠며 질문에 대답했다.
두려울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한 결과물.
죽은 리가 필요했던 건 이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었다.
기회의 재창출이라고 할까.
놈을 죽이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시간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만 좋았어도 저희 쪽에서 했을 것을… 그게 옥이 티였습니다.”
“마음 쓰지 마라. 중요한 건 의식 그 자체다.
로이드는 남자의 푸념을 일축하며 주변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쯤 나서게 될까요?”
“글쎄다. 가진 능력으로 보았을 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구나.”
로이드는 표정을 굳히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준비될 때까진 서두르면 안 된다.”
“그렇겠지요. 어설프게 나왔다간 써먹기도 전에 짓밟힐 테니까요.”
로브를 쓴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곤 로이드를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마력의 샘을 벗어나니 에르텔의 마력이 눈에 띠게 줄어든 것 같더군요. 마력이 더 강했으면 의식의 횟수도 늘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쉬운 얼굴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기껏 힘들게 구해 왔더니, 예전만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니 그 계집도 빨리 찾아야 한다.”
로이드는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두 연놈만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힘든 상황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둘은 어떻게 작당을 했을까요?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빅터 때문이다.”
“그 영감이 왜… 아, 긴급 회피했을 때!”
“맞다. 그때 리와 그 계집이 한 장소에 숨어 있었다.”
2개월 전.
갑자기 나타난 빅터가 흑마탑 주위를 발칵 뒤집었었다.
명분은 불손한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인데, 군대까지 대동한 그를 막을 방법은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한들 나설 수도 없던 상황.
애초에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수십 년의 시간과 노력은 사라질 것이고, 남은 건 참혹한 죽음뿐.
‘제기랄.’
빅터를 피해 은둔한 사이, 리와 그 빌어먹을 계집은 함께 도망쳐 버렸다.
“리베에서 흔적이 포착됐다고 하니 머지않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다 풀어서 찾아라.”
“돌아가는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감색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곤 희미하게 들려온 말에 다시금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면…….”
“별거 아니다. 계집을 잡게 되면 다리부터 자르겠단 얘기다.”
“하하하…….”
젊은 남자는 한기를 느끼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저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
괜스레 다리를 부비며 그는 조용히 말을 몰아 나갔다.
* * *
고민은 계속 깊어져 갔다.
이대로 카라반의 뒤를 쫓는 건 사실상 무리.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작정하고 덤빌 필요가 있어 보였다.
“카잔이 문제인데…….”
사라센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통행이 쉽지 않다.
그나마 복잡한 절차를 거치면 가능하나,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쌈닭이냐고.”
도대체 왜 그렇게 다투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주변국과 저리 싸워 대면 고립되는 것은 브라함 제국뿐일 텐데.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로제는 보고 갈 생각이다.
그녀의 가문은 유력하다 했고, 어쩌면 로제를 통해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몰랐다.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하나.
나의 목적지는 백작의 내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계획엔 귀찮은 걸림돌이 하나 있었는데.
“젠장.”
내성으로 가기 위해선 두고 왔던 반투족을 다시 지나쳐야 했다.
이 넓은 성도에서 하필이면 외길이라니.
나는 주위를 살피며 반투족이 있던 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들은.
“옷 꼬락서니가 왜 이래? 뭔데 이렇게 벗고 다니는 거야?”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왜, 보기 좋은데.”
“아우… 이 누님은 몸매가 그냥… 아주 바람직하네.”
어지간해야 지나칠 것 아닌가.
특히나 저 여인의 복장은 정도가 너무 심했다.
전통이란 말로 이해하기엔 상식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다.
“가만 있자… 근데 이것들 반투족 아니야?”
“반투족이라고? 반투족이 왜 여기까지 와?”
세 남녀를 둘러싼 이들은 의뭉스런 얼굴로 주절거려 댔다.
그도 그럴 것이.
반투족의 영역은 리베와 사라센 사이에 있고, 그 외의 지역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베르에게 들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어이 형씨, 당신들 반투족 맞지?”
“…….”
세 남녀는 걸어오는 시비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뭐하는 거야.’
지켜보고 있자니 조마조마해 짜증이 난다.
차라리 어딘가로 피하든가.
저런 꼴로 서 있으니 봉변당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지금 야만인 티 내는 거야 뭐야?”
결국 모여든 남자들의 말투가 슬슬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희들과 볼일이 없다.”
그에 부족장은 입을 열었고.
“우리도 너 같은 남자는 필요 없어.”
모여든 무리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누님, 나랑 좋은데 갈까? 나 오늘 시간 많은데.”
이런 희롱 섞인 말장난은 기본이요.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여인의 몸에 손을 뻗는 파렴치한 짓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래서야 큰일 터지는 건 시간문제.
‘저 멍청이들이!’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놔두고 사라지기엔 최적의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울컥 치미는 뭔가를 느끼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손대지 말라고 했다!”
날선 여인의 외침에도 놈들의 추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자매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
곁에 있던 부족장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한 녀석도 마찬가지.
녀석은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뻗어 오는 손길을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이것 봐라?”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분위기는 사납게 변해 갔다.
“얘들이 오러 없이 잘 싸운다는 그것들 맞지?”
“맞아. 한 4성급은 된다던데?”
“아니야, 센 녀석 중에는 5성급도 있다더라고.”
“와… 역시 사람 새끼가 아니었네.”
모여든 남자들은 흉흉한 표정을 지으며 오러를 뽑아냈다.
4성에서 시작해 5성까지.
다양한 경지의 남자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위협하듯 꺼떡거렸다.
하지만 유독 거슬리는 저 남자.
“너희들 결투 좋아한다며? 나랑 해보자. 나도 엄청 궁금하거든.”
이제야 입을 땐 남자는 한 차원 높은 오러를 뿜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6성.
에스카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주위의 다른 녀석보다는 선명한 오러를 두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노려 봐. 그냥 결투나 하자니까? 너희들이 이기면 그냥 가고, 내가 이기면 내 마음대로 할게. 어때 완벽한 조건이지?”
무엇이 완벽한지 모르겠으나, 남자는 비아냥거리며 부족장을 도발했다.
하지만 부족장은 단호했으니.
“지금 나는 결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의 뜻을 전했다.
“겁먹은 게 아니고? 결투 안 하면 이 누님 데리고 간다?”
“…….”
“진짜 데려갈 거야. 후회하지 마라?”
남자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부족장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결연한 눈빛은 오히려 비장해지고 있었으니.
‘답답하네…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저들의 행동에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싸울 거면 싸우고, 그게 아니라면 피하든가.
불필요한 치욕을 감내하기엔 그럴만한 이유와 명분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린 그 사람과 약속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에 있어야 한다.”
부족장이 내뱉은 말에 나는 멍해지는 감각을 느껴야했다.
“뭐라는 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
부족장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엿보였고, 침묵한 그를 대신해 뒤에 있던 여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희롱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우리의 긍지는 육신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건 우리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저들은 핑계 삼아 던진 나의 말을 끝까지 믿고 따르고 있었다.
‘염병…….’
저리 멋지게 말해 버리니 버리고 가려던 나만 쓰레기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미 쓰레기 확정인가.
뭐가됐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난 이런 모습에 정말 약하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시비 거는 저놈과의 악연도 겸사겸사 정리하면 그만이다.
“거기 흉터.”
모습을 드러낸 나는 다짜고짜 놈에게 다가갔다.
“어라? 어디서 봤는데?”
“말고기다, 새끼야.”
난데없는 험한 말에 녀석의 상처가 크게 씰룩거렸다.
가로로 그어진 깊은 검흔.
콧잔등 위에 새겨진 붉은 흉터의 주인은.
“너… 어제 그 똥 말?”
나를 불면의 시간에 빠뜨렸던 그 빌어먹을 녀석이었다.
“그래, 뒈진 똥 말의 주인이다. 알아봤으면 잠시 찌그러져라. 좀 이따 손봐 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부족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했냐고.
그에 대한 부족장의 대답은.
“당신이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얌전히 기다렸다.”
헛숨이 나올 만큼 순진한 대답이었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부족장.”
“말하라 승자여.”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한줌 남은 의심조차 걷어 버렸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겠나.
“이제부터 결투를 시작할 생각이거든.”
“그거 좋군.”
“내 옆에 설 자격을 주지.”
“영광이다. 나와 나의 형제자매는 기꺼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나란히 늘어선 나와 반투족 3인은 무기를 들어 놈들 앞에 마주섰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