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39화 (39/203)

39화

카슈타르의 건물은 리베와는 정반대의 매력이 있었다.

리베의 분위기가 화려하고 요란했다면, 이곳 카슈타르의 느낌은 단정하고 깔끔했다.

‘저쪽인가.’

나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거리의 풍경.

유달리 흰색이 많은 건물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따라 걷기를 십여 분.

나는 상단이 모여 있는 상업 지구에 도착했다.

이곳에 있는 상단은 도합 여섯 개.

아이작의 흔적을 쫒기 위해선, 이틀 내에 출발한 카라반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아, 저희 상단 카라반은 4일 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이틀 전에 출발한 상단이 어딘지 아시나요?”

“글쎄요? 저희 업무 보기도 바쁜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나름 요령을 부려 보았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상단을 나온 나는 길게 뻗은 대로를 바라보았다.

빼곡하게 늘어선 상점들.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다 돌아봐야 하나.’

마른세수를 한 나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은 상단은 이제 다섯 곳.

두 번째로 방문한 상단에선 3일 전이란 답을 듣고 돌아서야했다.

나의 탐문은 계속되었지만.

“저희는 모레 출발합니다.”

원하는 대답은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상단을 지나 네 번째.

확률은 셋 중 하나로 좁혀졌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젠장.”

여섯 개 중에 네 개를 헛짚었다.

이쯤 되면 불운의 상징이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치솟는다.

“모르겠다.”

이름이 짧은 상단을 골라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조차도 멈출 수밖에 없었으니.

“뭐, 뭐야? 당신들이 왜 거기서 나와?”

리베에 있어야 할 반투족이 눈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오래간만이다, 세속인.”

“오래간만은 개뿔, 고작 하루 지났는데 뭔 헛소리야?”

“여전히 말이 거칠군.”

“됐고, 당신들이 왜 여기 있는 건데?”

나는 헐벗은 세 남녀를 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대충 알지. 되게 길고 이상했으니까.”

“이런 무례한 것을 봤나… 하지만 승자에 대한 예를 갖춰 내 친히 한 명씩 알려 주도록 하지.”

큰 덩치의 남자는 한발 앞으로 나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반투족의 족장인 울부짖는 창의 아들이자, 차기 반투족을 이끌 부족장…….”

“나를 죽이고 가라.”

“어흠.”

“맞냐?”

“그래, 맞다.”

죽여 달라는 부족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자매의 이름을 말하자면…….”

녀석은 여인을 가리키며 그녀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이 더욱 빨랐으니.

“이쪽은 나와 별 보러 갈래.”

“내키진 않지만…….”

여인은 고개를 돌리며 뭔가를 수락했다.

“허락하지 마!”

그에 나는 소리를 질렀고.

“크흐흠.”

지켜보던 부족장은 마른기침을 하며 큼큼거렸다.

그러곤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번에는 이 형제를 소개시켜 주지.”

부족장은 소개를 멈추고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말할까 싶어 기다리나 본데, 나는 녀석의 이름을 모른다.

안전 가옥에도 함께 왔었지만, 녀석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그날 밤 술만 안 마셨어도.”

“…….”

부족장은 하던 말을 끊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뭘 말하는 건가?”

“말하다가 만 건 너잖아. 술을 안 마셨으면 뭐가 어떻게 됐냐고.”

“말했거늘…….”

“뭘 말했… 그게 이름이라고?”

이번엔 술 머시기가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다! 모욕하지 말라!”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이름의 주인은 목소리를 키웠다.

“…….”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조차도 어찌 돼 버릴 것 같다.

뭘 어떻게 하면 저런 이름이 만들어진단 말인가.

“거기, 너.”

“너가 아니라 그날 밤…….”

“이름은 됐고, 너희 부모님 사이 안 좋으시지?”

“아니,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이름이 곧 출생의 비밀인데.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등을 돌렸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옷이라도 똑바로 입고 다니든가.

나는 멀뚱히 서 있는 반투족을 떠나 다섯 번째 상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장난이 아니다!”

알게 뭔가.

하는 짓이 죄다 어이없는데.

나는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를 따라 여기까지 왔단 말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

왔던 길 그대로 잘 돌아가면 된다.

나는 볼일 없으니까.

어울려 줄 기분도 아니고 엮이기도 싫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동료를 잃었다.”

“맞다. 우리는 버림받았다.”

“나는 아니지만 일단 따라왔다.”

뒤에 있던 세 녀석은 한마디씩 던지며 가는 걸음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걸음을 멈춘 나는 뒤를 돌아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에 맞춰 다가오는 부족장.

녀석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반투족의 전통이다. 결투에 패배한 자는 부족과 함께 지낼 수 없다.”

“부족장과 나는 그대에게 패했다. 하여 우리는 갈 곳을 잃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지만,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다.”

술김에 태어난 마지막 놈은 일단 제외하자.

중요한 건 다른 둘이니까.

부족장과 여인은 쫓겨났다는 말을 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나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부족한 탓이다.”

부족장은 자신의 약함을 책망했다.

“그런데 왜 날 따라와? 싸움을 건 것도 너희잖아.”

기묘한 책임 전가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또한 부족의 전통. 그대에게 복수하거나 그대의 수족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힘 있는 자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 복수를 해!”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부족장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달랐다.

“싸워 보고 알았다. 그대는 메투스의 화신! 우리는 그대를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그대의 수족이 되어 함께하겠다.”

“나는 그럴 필요 없지만, 받아 준다면 그렇게 하겠다.”

저들은 나에게 종속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나 그럴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내 앞가림도 안 되는데, 누가 누굴 거둘 수 있겠나.

“그러면 여기 얌전히 있어. 화난다고 막 싸우지 말고, 어? 난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

나는 녀석들을 달래며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적당히 기다리다가 돌아가길 바라면서.

* * *

아리안 왕국.

풍요의 신 에포나가 축복한 지상의 낙원이자, 강성한 내실로 다져진 대륙 최고의 부국이다.

세인들은 이런 아리안을 가리켜 북방의 강소국이라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이곳.

에포나의 사랑을 독차지한 이 땅의 이름을 ‘카슈타르’라 하였다.

“아버지, 제발!”

“어허, 그만하라고 했다.”

이 풍요로운 영토의 주인은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

아리안 왕국의 손꼽히는 명가이자 로제의 부친이기도 하다.

“조금만, 지인∼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네? 진짜라니깐요!”

“되었다. 기회는 이미 주지 않았느냐. 고집 피우지 말고 그만 물러가거라.”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바는 오직 하나.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이 결혼을 백지화시키는 것이었다.

“왜 하필 그 사람이냐고요!”

간절한 로제의 외침에도 제논 백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이 최선이니까.

마지못해 기회를 주었지만, 두 번은 없었다.

“아버님!”

뒤돌아 나가는 백작을 보며 로제는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보낼 순 없기에.

떠나는 그를 붙잡아 기필코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아가씨…….”

하나 그런 로제의 시도는 몇 발짝 못 가 저지되고 말았다.

그녀의 앞을 막아선 건 몸종인 도로시.

도로시는 로제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너무도 잘 아니까.

“백작님 성격 아가씨도 잘 아시잖아요.”

도로시는 차분한 얼굴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는 로제.

굳게 다문 입술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다시 요청을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분하지만 도로시의 말이 맞았다.

저렇게 완고한 표정을 지으면 한동안 협상 불가다.

그것을 알기에 막아선 도로시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하아…….”

로제는 깊은 한숨을 쉬며 도로시의 손을 놓았다.

그러곤 매정히 돌아선 야속한 아비를 떠올렸다.

제논 데 카슈타르.

타고난 정치적 감각과 행동으로 쇠락에 접어든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자타 공인 직진형 인간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카슈타르 가문에서도 정치력만큼은 최고라 손꼽히는 남자.

판세를 읽는 눈이 매서워 사람들은 그를 마안(魔眼)이라 불렀다.

“그러면 뭐하냐고! 사람 보는 눈이 저렇게 없으신데!”

어디서 사람을 골라도 그런 놈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노이 데 페이소스.

귀족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이 남자는 궁내부 장관 ‘마론 데 페이소스’ 후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일단 못생긴 외모로 유명했고, 포악한 성정과 얕은 지식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람이다.

“하… 도로시도 그날 봤잖아.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지.”

로제가 뿜어내는 감정은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었다.

경멸과 환멸.

인성 파탄이 무엇인지 너무도 생생이 겪었기 때문이다.

“못생긴 건 참을 수 있어. 얼굴 대신 발끝을 보면 되니까. 그런데!”

“…….”

“그게 문제 아니더라고.”

“…….”

“사람이라면 말이야. 어딘가 하나쯤은 존경하고 감탄해야 할 부분이 있어야 하잖아.”

“…….”

“그 인간은 찾을 방법이 없더란 말이지.”

“…….”

도로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해 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제가 하는 말은 정확했고, 그것이 그 남자의 평판이었다.

때는 2년 전.

왕도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그 남자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행사의 취지는 성인식.

성년이 된 귀족 자제들은 왕궁으로 모여 들었고, 왕의 축하와 함께 사교계에 데뷔했다.

그러니 얼마나 준비해 왔을까.

그간의 배움과 수련은 모두 이날을 위해서라고 봐도 무관할 지경이었다.

한데 궁내부 장관의 아들이라는 이놈은 등장부터가 가관이었다.

건들거리는 걸음부터 비열한 눈짓까지.

못생긴 외모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품위 없는 행동과 대화는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후작이라는 대단한 집안에서 어떻게 저런 인간이 나온 것인지.

“죽어도 안 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게 말이냐고, 어? 사람들이 아리안 백마에 대해 물어볼 때 그 녀석이 그랬잖아.”

“말보다 좋은 걸 봐서 그걸 타고 싶다고 했죠.”

“그래! 내 눈을 보면서 그랬지.”

“아가씨…….”

“내가 그런 눈치도 없는 멍청인 줄 알아? 사람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하는데 그 말뜻을 모르겠냐고?!”

당시의 감정이 치솟았는지 로제는 얼굴마저 붉히고 있었다.

그때의 수치심을 어떻게 표현할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놈의 뱀 같은 두 눈을 쿡 찌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백작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신 이유… 아가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몰라! 모른다고! 아니, 알기 때문에 더 싫다고!”

로제는 더욱 큰소리로 저항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

차라리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제는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가라앉혔다.

“아무튼 아가씨는 나서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차라리 외삼촌께 부탁하세요.”

도로시는 반크스 데 제노비안을 거론했다.

대륙 최강 중 하나이자, 아리안의 혼이라 불리는 남자.

“삼촌이 내 부탁을 또 들어줄까?”

“빅터 크로제 님을 핑계로 대시면 되죠.”

“빅터 님을……?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외삼촌이라면 분명히 넘어올 거야.”

도로시의 말에 로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아리안에 오시겠다고 했지만, 언제란 얘기는 없었잖아요.”

제법 예리한 지적이긴 했으나 로제는 아랑곳없었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을 시작했으니.

“대수림을 지나 리베로 가신다고 했잖아. 대략 이 주 뒤면 다시 뵐 수 있는 거지.”

“대수림이면… 마경이요?”

“그래, 더군다나 빅터 님과 그의 제자분이시라면 더욱 빨리 통과하시겠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일견 수긍한 듯 도로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은 틀리지 않은 추측이었다.

말을 타고 돌아온 로제 일행과는 달리 빅터와 그의 제자는 대수림을 택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20일 내외로 통과할 게 분명했다.

때마침 들어오는 중년의 남자.

“아, 삼촌! 아버님께 말씀 좀 해 주세요!”

“무엇을 말이냐?”

“화전민 마을 얘기요. 거기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셨던 분들에 대해 삼촌이 말 좀 해 주세요.”

“아, 빅터 크로제 님과 그분의 제자 이야기로구나.”

“네! 아버님이 도통 제 말을 안 믿으세요.”

호감을 보이는 외삼촌을 보며 로제는 더욱 열띤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나 외삼촌 반크스는 핵심 아닌 핵심을 찔러 왔는데…….

“한데 그분들과 너의 결혼이 무슨 상관이냐?”

갸웃거리는 반크스를 보며 로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상관 있지요.”

“그래?”

“제가 찜해 놓은 후보니까요.”

해야만 하는 결혼이라면 상대는 그런 남자여야 했다.

(잘생겼으니까.)

무술의 경지도 높았고.

(그 와중에 잘생겼으니까.)

말하는 품위도 수준 있었다.

(좌우지간 잘생겼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