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다음 날 아침.
차비를 마친 나는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이거 타고 가세요.”
계단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베르는 갈색 말을 끌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늙은 말이라 거칠게 몰면 큰일 납니다. 죽을지도 모르니 살살 다뤄 주세요. 하하하!”
그러곤 엄살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남긴 채 나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리안에 도착한 나는 카슈타르 인근 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더 이상의 여정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녀석.
“말이 아니라 짐짝이네.”
베르에게 받은 갈색 말 때문이었다.
“아니, 제대로 달려 보지도 않고 퍼지면 어쩌자는 거야?”
시원찮게 달리던 갈색 말은 결국 주저앉으며 질주를 멈추었다.
그야말로 주인인 내가 업고 가야 할 판.
푸르륵거리는 놈을 이끌고 꾸역꾸역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허름한 객점 입구에서 말고삐를 넘겼다.
“방 하나 주시고 식사는 가장 빨리되는 걸로 주세요.”
“네, 들어가 계세요!”
점원이 마구간으로 간 사이, 나는 객점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치미는 짜증을 삭히는 동안 쟁반을 든 점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게 드세요!”
서빙을 마친 점원은 큰소리로 인사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흐음…….”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향기에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모든 것이 용서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뾰족하던 기분이 스르르 풀리며 입안 가득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색깔 죽이네.”
나는 노릇하게 구워진 고깃덩어리를 향해 잘빠진 포크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기분 좋은 저항감.
이제 남은 건, 녀석의 가치를 혀끝으로 증명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떤 놈이 똥 말을 끌고 온 거야?!”
객점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신가요, 손님?”
놀란 종업원이 화들짝 뛰어나와 남자들 앞에 섰다.
“야, 인마. 마구간에 말이 뒈져 있는데 넌 여기 자빠져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대신 치워줘야 해?!”
남자는 커다란 목소리로 불길한 소릴 지껄이기 시작했다.
‘설마…….’
내 얘긴 아니겠지?
심상치 않은 남자의 말에 나의 신경은 문밖으로 향했다.
― 데려오신 말이 죽었습니다!
이딴 개소릴 지껄이거나.
― 당장 치워 주세요!
라고 말하면 그땐 어떻게 하나 고민했다.
‘덩치나 작아야 휙 내다 버리지.’
저 큰 녀석을 질질 끌고 갈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하…….”
밀려오는 걱정 속에 음식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
마구간을 다녀온 종업원을 보며 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저, 손님.”
“네.”
“데려오신 말이 죽었는데요.”
“아…….”
“저대로 놔둘 수 없으니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지금 나가서 치울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객점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요, 손님! 그게 아니고요.”
“그러면요?”
“치워 달라는 게 아니라 저희가 사려는 겁니다.”
“뭘요?”
“말고기요.”
“말…고기요?”
“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갑자기 고기로 변한 녀석 탓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 음…….”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변경에선 흔한 고기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의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으니.
“야, 좀 넉넉히 챙겨 드려! 오죽하면 저런 똥 말을 끌고 다니시겠냐!”
“캬하하하하!”
문 앞에 있던 녀석들은 목소리를 모아 내게 비웃음을 날렸다.
“엇, 우리가 좀 심했나?”
유달리 크게 웃던 남자가 정색을 하며 표정을 바꿨다.
“이거 실례잖아. 저런 똥 말을 일부러 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가?”
“저 고급스런 경갑을 봐봐. 당연히 애정으로 타고 다니는 거지, 결코 가난뱅이라 그런 게 아니라고.”
남자는 동료들을 향해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종국엔 나를 바라보며 냉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고깃값 좀 후하게 쳐드리라고. 그래야 당나귀라도 타면서 추억을 곱씹을 수 있지 않겠어?!”
“와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남자의 콧잔등이 깊게 우그러졌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깊은 검흔.
삐뚤어진 콧대를 갈라내듯, 양쪽 광대를 향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 갑옷 살돈으로 말이나 바꾸지.”
“어허∼ 다 사연이 있는 거라니까. 우리가 조금씩 보태 드리자고!”
“그럴까?”
“좋아, 인심 썼다. 여기 1실버!”
이것은 명백한 조롱이자 도발이었다.
“…….”
차갑게 식은 나의 두 눈은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며 놈의 시선을 뒤쫓았다.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고.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따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을 파악한 객잔 점원은 앞을 가로막으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을 보탰다.
“후작가의 가신들입니다. 잘못 엮이면 큰일 나니 저를 따라오세요.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눈을 찡긋거리며 반응 없는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익숙함이 묻어나는 빠른 판단과 행동.
‘한두 번이 아닌가 보네.’
점원은 이골이 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끌었다.
“참으세요. 싸울 생각 마시고 무조건 참으세요.”
“왜? 저놈들이 그렇게 센가?”
“아니요. 실력은 상관없어요. 후작과 견줄 배경이 없다면 그냥 참으세요.”
단호한 점원의 말에 그제야 나는 놈들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폈다.
‘귀족의 호위 기사쯤 되나?’
놈들의 어깨와 가슴 한편에 손바닥만 한 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결론은 세력가의 졸개라는 것.
“아주 악질입니다.”
주인의 위명을 앞세우는 야비한 놈들이란 얘기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도 너무 힘들어지거든요.”
나는 조용히 고갤 끄덕이며 점원의 뒤를 따랐다.
나야 어디로든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객점의 입장은 다를 테니까.
“왜 벌써 가는 거야? 이봐! 우리가 도와준다니까? 어이!”
등 뒤의 조롱을 무시하며 나는 객점의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저녁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
아리안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나는 일찍 잠을 청했고, 두어 번 잠에서 깼지만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그저 분해서 그랬을 뿐.
아침을 맞이한 나는 고깃값 10실버를 챙겨 카슈타르로 향했다.
* * *
“어떻게 오셨나요?”
“사무엘 파커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온 이곳은 카슈타르의 외곽 마을.
베르가 알려 준 주소는 정확했고, 덕분에 나는 순조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새로이 등장했는데.
‘공동주택인가?’
건물은 여러 세대가 함께 생활하는 다세대 방식이었다.
공용 출입구를 지나면 각각의 현관이 또 이어지는 그런 형식인 것이다.
“흠…….”
1층과 2층, 그리고 저 많은 세대를 모조리 훑어야 할 판이었다.
일단 1층부터 탐문 시작.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한 나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첫 집의 문을 두드려 남자의 행방을 물었다.
“누구요? 사무엘 파커? 여기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나…….”
이름을 들은 후덕한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아이작이란 이름은요? 이것도 처음 들어 보시나요?”
“네, 처음 듣네요.”
대답을 마친 여인은 복도 끝을 가리키며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끝집에 나이 든 아저씨 한 분이 살고 있기는 한데요. 이름은 모르겠네요.”
“아, 그런가요?”
“거기 말고는 없을 거예요. 다른 집엔 그런 남자가 없거든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을 들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제 목표까지 열 발자국 남짓.
저 막다른 집의 문을 두드리면,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아마 안 계실 거예요.”
여인은 비관적인 추측을 나에게 전해 왔다.
“안 계신다고요? 잠깐 집을 비우신 건가요? 아니면…….”
“워낙 조용하게 계시던 분이라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아무튼 며칠째 불이 안 켜지고 있는 건 맞아요.”
“그렇군요… 혹시 그분의 인상착의를 알 수 있을까요?”
어쩐지 잘 풀리는가 싶더라니.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은 건 지난하게 이어질 막연한 탐문뿐이다.
더군다나 나는.
‘외모의 특징도 모르잖아.’
추정되는 정보의 종류라곤 50대 후반의 남자가 전부였다.
솔직히 말해 암담한 상황.
이름은 모를 수도 있고, 동년배 남자는 발에 치이도록 널려 있다.
‘쯧…….’
이럴 땐 차라리 신체적 특징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상처나 머리색, 혹은 팔다리의 결함이나 특이점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어제 마주한 후작의 개를 떠올리며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흉터 같은 건 없었나요? 아니면 남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눈이 안 보이세요.”
“네?”
돌아온 여인의 대답은 나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장님이에요. 그래서 항상 안대를 감고 다니세요.”
이보다 더 큰 특징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전한 뒤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문는 굳게 잠겨 있었고.
‘50대 후반의 장님 남자.’
결정적인 단서를 얻은 나는 지체 없이 탐문을 시작했다.
시간은 지나 어느덧 이른 오후.
꼬리에 꼬리를 물던 탐문의 결과는 나를 카슈타르의 중심가로 이끌었다.
― 그 아저씨 카슈타르 성도에서 봤어요. 지난주에 마주쳤으니까 며칠됐네요.
아이작을 목격했다는 청년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성도로 향했다.
한달음에 도착한 성문 앞.
리베 못지않은 커다란 위용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카슈타르가 큰 건지, 세비앙이 작은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도 크네.’
세비앙이 시골이라는 사실 만큼은 이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제 숨바꼭질이 시작되었고, 나는 숨어 있는 그를 찾아야 했다.
‘일단 저쪽으로 가 볼까.’
나는 마주 오는 경비대를 시작으로 아이작의 흔적을 수소문했다.
“50대 남자인데 시력을 잃어서 안대를 착용했습니다.”
“글쎄요? 그런 분이라면 기억에 남아 있을 텐데 모르겠군요. 경비 초소나 상점가로 가 보시면 조금 더 찾기 수월하실 것 같습니다.”
막막한 심정을 지우며 하나씩 하나씩 범위를 좁혀 나갔다.
누구는 여기서 본 것 같다.
또 다른 이는 저기서 본 것 같다.
그렇게 엇갈리고 흩어진 정보를 모아 가까운 행적을 찾아다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저께였나? 주점에서 봤어요. 눈이 안 보이는 것 같았는데 너무 태연하게 행동해서 기억납니다.”
기대 없이 물어본 남자에게서 아이작의 최근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주점의 이름은 길 잃은 늑대.
중심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술집이었다.
주점에 들어선 나는 바텐더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벌꿀주 한잔이요.”
가벼운 술을 시킨 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탁―
바텐더는 말없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즉시 돌아가려는 찰나.
“잠시만.”
고개를 돌린 바텐더를 향해 실버 한 개를 내밀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
바텐더는 대답 대신 실버를 챙겨 넣었다.
그러곤 물끄러미 나를 보며 질문을 기다렸다.
“아마 이틀 전쯤에 50대 후반의 남자가 찾아왔을 겁니다.”
“…….”
역시나 묵묵부답.
하기야 이 대목에서 넙죽 답하는 것도 우스울 것이다.
중년의 남자야 지금 내 옆에도 있고 그 건너편에도 있으니까.
하지만 얘길 보태면 달라진다.
“장님입니다. 안대를 썼지요.”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누구와 있었는지, 무얼 하다 갔는지… 아는 대로 부탁합니다.”
나는 한 개의 실버를 추가로 꺼냈다.
그 또한 조용히 바텐더의 주머니로 사라졌고.
“당신이 앉았던 자리. 그 자리에 앉아서 어느 남자를 만났소.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눴고, 이후 조용히 사라졌소.”
“기억나는 대화 내용은요?”
“없소. 그나마 같이 있던 남자의 이름이 들렸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네 글자였는데… 그, 그레이…….”
바텐더는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한마디에 한 개씩인가?
참으로 비싼 주둥이다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또다시 실버를 꺼내 남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받지 않겠소. 기억하지 못하니까. 대신 다른 걸 알려 드리리다.”
“…….”
“장님과 함께 있던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화를 내었소. 그리고 마지막에.”
바텐더는 주위를 힐끗 살펴보고는 나직하게 뒷얘기를 이어 갔다.
“그 아이는? 이라고 물어봤소.”
“그 아이요?”
“그렇소. 그러자 장님은 시치미를 뗐고, 함께 있던 남자는 피식 웃기만 했소. 그러고는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소.”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나요?”
“그런 말은 없었소. 하지만 카라반을 놓치면 힘들어질 거라 경고했소.”
말을 마친 바텐더는 그대로 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곤 아무 일 없듯이 종전의 일을 이어 갔다.
‘카라반이라…….’
하기야, 다른 지역을 가는 데 있어 상단의 이동만큼 편안한 것은 없을 것이다.
대규모 행렬에 든든한 무장까지.
앞을 볼 수 없는 그에겐 최적의 선택지인 샘이다.
탁―
나는 한 개의 실버를 추가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지막 정보 또한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일어선 나는 주점을 벗어나 상단으로 향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