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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36화 (36/203)

36화

“이게 얼마만입니까.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다가온 긴 흑발의 남자는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노년을 앞둔 중년의 남자.

왜소한 체격의 사마르는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며 마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별 탈 없이 잘 왔습니다. 그간 격조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군요.”

내민 손을 맞잡으며 금발의 남자가 화답했다.

훤칠한 키에 짙은 눈썹, 단정히 빚은 머리칼은 꼼꼼한 로이드의 성격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었다.

“보내 주신 편지에 대한 회신은 일부러 안 했습니다.”

마주한 사마르는 일전의 서신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잘하셨습니다. 괜한 꼬리를 남길 이유가 없지요.”

그에 로이드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에 대한 답이야 이처럼 와서 들으면 될 일이니까.

“국경 넘는 게 쉽지 않죠?”

“양국의 긴장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까요.”

두 남자의 대화는 다시 평범한 주제로 돌아왔다.

“그런 것치곤 여기 사라센의 분위기는 느긋합니다.”

로이드는 오는 길에 본 도시의 풍경을 떠올렸다.

보이는 건 그저 평범한 삶의 흔적들. 국경을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민들이야 눈앞의 삶이 더욱 중요한 법이니까요.”

이에 사마르는 자조적인 말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주 선 로이드의 뒤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것이 에르텔입니까?”

“맞습니다. 마력의 샘에 있던 귀물이죠.”

사마르는 벨벳에 쌓인 상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하하! 벌써부터 저릿저릿한 게 뿜어지는 마력이 어마어마하군요!”

“네, 엄청난 녀석입니다. 하나 강제로 캐와 그런지 마력 농도가 약해졌습니다.”

감탄하는 사마르를 보며 로이드는 차분히 설명했다.

“그렇겠네요. 마력의 샘 자체가 마력을 증폭시켰을 테니까요.”

“구해 온다고 애먹었습니다. 귀찮은 인간이 눈치를 챈 것 같아서요.”

수긍하는 사마르를 보며 로이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귀찮은 인간이라면…….”

“빅터가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더군요. 뒷정리는 완벽하게 끝냈으니 에르텔이 사라진 건 모를 겁니다. 애초에 존재 자체도 몰랐으니까요.”

“빅터라…….”

달갑지 않은 소식에 사마르는 긴 흑발을 쓸어내렸다.

그대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어쨌건 마력의 샘은 못쓰게 되겠군요.”

“의미 없는 동굴이 된 샘이죠.”

사마르의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과거를 소환했다.

“저런… 나름 추억이 서린 곳인데 아쉽게 됐네요.”

“하하하, 그러고 보니 꽤나 고생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말도 마세요. 절벽이 어찌나 높던지. 밑에 강이 흐르지 않았다면 몇 번은 죽었을 겁니다.”

사마르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면 슬슬 준비해 볼까요?”

그러고는 굳게 잠긴 문을 열어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아 참, 일전에 서신으로 여쭤본 것 있잖습니까?”

그런 그의 뒤로 로이드가 질문을 건넸다.

“능력이 전이되는지 궁금해하셨죠?”

“맞습니다. 아무래도 리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넘어간 것 같더군요.”

대답을 마친 로이드는 얼마 전 사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비앙 영지에서 벌어진 리의 죽음과 추격대의 전멸.

믿었던 카이 형제마저 죽었으니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글쎄요.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다만… 어차피 갑자기 주어지는 능력이 아닙니까.”

그런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리의 능력은 너무나도 아까웠다.

무려 시간을 되돌리니까.

하여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으니.

“옮겨 간다고 한들 이상할 것도 없지요.”

로이드의 작은 기대는 커다란 확신으로 바뀌었다.

* * *

가죽 공방을 나온 우리는 작은 옷 가게에 들려 평상복 한 벌을 구입했다.

이유라면 베르의 잔소리 때문이었는데.

“경갑은 경갑이고, 이참에 평상복도 갈아입죠. 하루 종일 갑옷만 입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하여 우리는 의류 상점으로 향했고, 베르가 추천한 옷으로 환복한 뒤 숙소로 향했다.

“오, 역시 잘생긴 사람이 입으니 다르군요. 평범한 옷도 고급져 보입니다.”

베르는 호들갑을 떨며 나의 옷맵시를 평가했다.

“에스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나한테 했던 신랄한 비난은 어디로 갔지?”

“비난할 게 없으니까.”

나를 바라본 에스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안전 가옥에 돌아왔고.

“여기서 카슈타르까진 얼마나 걸릴까요?”

나는 베르에게 아리안의 정보를 물어보았다.

“카슈타르요? 아리안 왕국에 있는 그곳?”

“네.”

“음… 넉넉잡아 하루면 갈 겁니다. 말 상태가 좋으면 조금 더 빨리 갈 테지요.”

거리를 묻는 나의 말에 베르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런데 카슈타르는 왜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간 김에 만나 봐야 할 사람도 있고.”

“아, 그렇군요. 언제 가시려고요?”

“경갑을 찾으면 출발할까 싶네요.”

갑옷의 완성까진 대략 일주일.

그사이 밀린 수련에 집중하고, 이후 카슈타르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혹시 찾는 분을 알려 주시면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가능하신가요?”

“물론이죠. 주요 도시 몇 군데의 주민 명부는 저희도 확보해 놨거든요.”

베르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작은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찾으시는 분 이름이…….”

“아이작이요. 아이작 헤링거.”

“브라함 출신인가 봅니다. 아리안에선 사용하지 않는 성인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흠, 일단 찾아보면 알겠죠.”

베르는 두꺼운 필사본을 뒤적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왜요?”

“아이작이라는 이름이 없어요.”

베르는 코끝을 훔치며 다른 필사본을 넘겼다.

촤르르…….

또 촤르르…….

저렇게 훑어본 책만 벌써 여덟 권째다.

지금 베르의 손에 들린 것까지 합하면 총 아홉 권째.

그마저도 대충 살펴보고는 책상 한쪽에 적당히 내려놓았다.

“제대로 본 거 맞아요?”

“아이작이 확실한가요?”

베르와 나는 동시에 반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더 미심쩍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베르 아니겠나.

저렇게 책을 후르륵 넘기는데 뭔들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뭐가 보이기는 하나요?

“성의 없어 보이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아요. 저런 잔재주라도 있어서 이곳에 남아 있는 거니까요.”

심드렁한 나의 질문에 답한 건 다름 아닌 에스카였다.

“사고 가속이라는 마법이에요. 저런 책 정도는 몇 십 배 빨리 읽을 수 있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베르는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딘가 우쭐한 그 모습에 살살 약이 오르던 순간.

“대신 재미있는 걸 찾았네요.”

베르는 책을 펼치며 내 앞으로 내밀었다.

“사무엘 파커.”

“지난 20년간 개명한 사람들 목록입니다. 아이작이란 이름에서 무려 네 번이나 이름을 바꿨네요.”

나는 선명히 적힌 이름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주소를 찾아가면…….

잃어버렸던 나의 뿌리를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무슨 관계인진 모르겠지만, 이거 찾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랍니다. 저니까 찾아냈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이 많은 명단을 일일이 비교하면서도 빠르게 찾는다는 건…….”

“고맙습니다.”

“엄청난 기억력과… 네? 아… 그야 우리 후배님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별거 아닙니다.”

그러니 공치사는 이제 그만하기로 하고.

“혹시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에 대해서도 아시나요?”

나는 또 다른 용무인 카슈타르 가문에 대해 물어보았다.

“알다마다요. 아리안에선 상당히 유력한 가문이 아닙니까. 한데 카슈타르 가문은 왜 궁금해하실까요?”

베르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몸을 기울이며 바짝 다가서더니.

“로제 양 때문입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며 피식, 썩은 미소를 지었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덕분에 나는 황망히 고개를 저었고.

“뭐, 이해합니다. 로제 양의 미모는 늘 큰 화제가 되곤 했으니까요. 가시게 되면 먼발치에서라도 슬쩍 보고 오십시오. 정말 미인이니까요.”

여전히 베르는 썩은 미소를 피식피식 뿜어냈다.

“…….”

말을 말아야지.

여기서 뭐라도 보태는 순간, 이 소란은 밤새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뒷마당으로 내려와 수련을 준비했다.

하고자 하는 건 기본동작 3종.

오늘의 목표는 숙련도의 대량 증가였다.

[내려치기 숙련도 1,277/10,000]

[휘두르기 숙련도 1,282/10,000]

[올려치기 숙련도 1,259/10,000]

3번째 회귀 이후 삼신기의 성장은 크게 정체된 상황이었다.

내가 게을러진 건 아니다.

혹독한 걸로 따진다면 지난 일주일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수련의 목적이 달랐을 뿐.

비록 잠들기 전의 자투리 시간이었지만, 기본 수련을 등한시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성장세는 둔해졌고,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련에 성공하였습니다.]

숙련도 상승에 새로운 단계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둔기 마스터리 레벨이 2가 된 직후, 숙련도 증가엔 새로운 방식이 적용되었다.

동작 하나로 증가하던 숙련도는 수련 성공으로 바뀌었고, 해당 과정이 2회 누적되어야 숙련도가 증가했다.

쉽게 말해, 두 배 이상 노력해야 능력치가 오른다는 말이다.

‘어쩐지 너무 쉽게 오르더라니.’

사실 숙련도 1,000까지는 정말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여 최대치에 이르는 시간도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부아아아악―

수련의 난이도는 크게 상승해 버렸다.

“후… 어렵네.”

마지막 동작을 재현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까다로워진 느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성공조차 쉽지 않았다.

하여 나는 더욱 빠르게 휘둘러야 했고.

[수련에 성공하였습니다.]

더욱 강하게 내리쳐야 했다.

[수련에 성공하였습니다.]

[내려치기 숙련도 1,278/10,000]

정체불명의 이것은 수준에 걸맞도록 진화했다.

덕분에 과정은 어려워졌지만, 나의 움직임은 더욱 예리하고 강력해졌다.

“이 맛이지.”

숫자가 바뀔 때의 쾌감 역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와… 살벌하네요.”

지켜보던 베르는 혀를 내두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괜한 소린가 싶지만, 저 표정을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매일 이렇게 훈련하시나요?”

“이것보다 더했죠.”

“아이고… 약골인 저는 상상도 안 되네요. 이러니 반투족이 한 방에 날아가지.”

그렇게 베르의 얘기는 반투족으로 이어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오러 없는 사람이 반투족을 이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 정도인가요?”

“당연하죠.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 진화한 오크라는 소문도 있으니까요.”

설명을 이어 가는 베르의 얼굴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러가 없는 인간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투족은 그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이고.

“그런 녀석들을 한 방에 때려눕혔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후배님이야 말로 오크가 아닐까 의심되네요.”

나는 오크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 뭐해요. 진짜 오러 고수를 만나면 그걸로 끝일 텐데.”

“흠… 높은 경지를 보면 그렇기야 하죠.”

결론은 약자인 것이다.

강한 듯 포장되어 있지만, 나와 반투족은 오러가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돌파구는 수련뿐.

‘숙련도가 답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코어를 고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그렇게 나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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