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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35화 (35/203)

35화

“그 눈빛은 도발인가?”

기세 좋게 다가온 여인은 팔짱을 끼며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시선을 마주한 여인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찰랑거렸다.

“대답해라. 도전인가?”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진정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뿐.

“조금 전엔 패기 있게 노려보더니 지금은 어딜 보는 건가?

그래서 나는 묵묵히 먼 곳을 응시했다.

정면은 위험하니까.

팔짱 낀 두 팔 사이로 보이는 그것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여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가 여인에게 겁을 먹은 건가?! 그 좋은 덩치가 아깝군!”

다가온 여인은 호통을 치듯 내게 말했다.

여전히 방황하는 나의 눈빛.

지금 나는 처음 겪어 보는 난감함에 시선 둘 곳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제발.’

저 팔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그냥 서서 말하면 되지 왜 저런 자세를 잡느냔 말이다.

“아까는 째려보더니 지금은 무시해? 시비를 걸었으면 남자답게 덤벼라!”

결국 씩씩대던 여전사는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취했다.

덩달아 요동치는 나의 심장.

“크으윽…….”

나는 튀어나온 비명을 삼키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차라리 칼을 휘두르라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저 속옷처럼 생긴 요망한 방어구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축성은 왜 저리도 좋은지.

“덤비란 말이다!”

이렇듯 소리치며 움직일 때면 영혼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저 사악한 출렁거림이라니.

‘제기랄.’

나도 모르던 나의 약점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데릭의 손에 맡겨진 게 고작 다섯 살.

곁을 오가던 곁을 오가던 여인들은 모두 평범한 아낙네였다.

그러니 어떻겠는가.

‘저렇게 생긴 건 처음 봤다고!’

지금 내가 느끼는 시각적 충격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만큼 아득한 것이었다.

하나 여인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갔고, 이대로 있다간 끝을 보기 힘들 것만 같았다.

“후…….”

나는 긴 호흡을 내뱉으며 해머를 고쳐 쥐었다.

이 또한 넘어서야 할 내 안의 벽.

세상을 오시할 남자로서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니 매정해… 아니, 뻔뻔해지자. 겉모습이야 어떻건 결국 몸뚱이에 불과할 뿐이다.

하여간 나는 눈을 부릅뜨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뭐 어찌해 줄까?”

어디론가 향하는 시선을 붙잡아 여전사의 눈에 고정시켰다.

그러곤 차가운 이성을 끄집어내 널뛰는 감성을 짓눌렀다.

지금부턴 남녀의 구분 따위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주한 이는 치워 내야 할 불편한 대상.

고로 손속 따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 여인이 원하는 싸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한칼에 베어 버리고 싶으나 이곳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

뭐가됐건 적당히는 없을 것이다.

“힘겨루기다.”

반라의 여인은 기세등등하게 두 팔을 내밀어 왔다.

나 역시 팔을 내밀어 여인의 손을 맞잡았고.

“히야아아압!”

여인의 앙칼진 기합과 함께 두 사람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하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이익…….”

이 떨림의 주인은 기세등등하던 반투족 여인의 손이었다.

“비, 비겁한 놈. 힘겨루기에 오러를 쓰다니. 승리에 굶주린 승냥이 같은 놈이구나!”

그것도 모자라 뜬금없는 인신공격까지 해 왔다.

“오러 쓴 적 없는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결백함을 주장했다.

“거짓말 마라! 너희 족속들이 오러 없이 어찌 우릴 상대하겠는가!”

하나 여인은 핏대를 새우며 나의 말을 일축했다.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이럴 땐 확실한 실력 행사가 해법이 될 것이다.

하여 맞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흐이이익!”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나의 공세에 반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미리 준비했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인이 강한 것은 틀림없으나.

“아으윽!”

나에겐 어림없는 도전이었다.

기껏해야 4성쯤 됐을까?

일반적인 기준에선 괴력이지만, 내 앞에서 자랑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아아아아악―!”

여인의 손목은 힘없이 꺾여 아래로 향했다.

“그만 돌아가시죠.”

나는 무릎을 꿇은 반투족 여인에게 대결의 끝을 고했다.

물론 나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한 상태.

시선을 마주하기엔 그것의 존재가 너무도 강렬했다.

하나 이런 노력은 부질없었으니.

“뭐지? 지금 날더러 꺼지라고 한 건가?!”

“아, 그쪽에게 한 말이 아니라, 이 여자…….”

“그런데 왜 날 보면서 말하는 건가? 시비를 거는 건가? 그것도 부족의 전사와 대결 중에?”

미친개 옆에 또 다른 미친개가 달려든 것이다.

“그게 아니라 이분을 보면서 말하기가 좀 그래서.”

“그 친구가 왜?”

“옷이 좀 민망해 가지고.”

“지랄하지 마라! 네놈 옷이야 말로 상거지가 아닌가! ‘나와 별 보러 갈래’는 우리 부족의 자랑스러운 전사다. 더 이상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마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 아닌가.

이대로 눈을 내리깔면 골짜기가 정통으로 보인단 말이다.

‘이것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런 옷차림으로 다니는 게 더욱 수치스러운 거다.

남자는 둘째 치고, 말만 한 처녀가 이러고 다니는 걸 가리켜 풍기 문란이라고 하는 거다.

게다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별 타령을 합니까? 당신과 별 보러 갈 생각 없으니 이 사람 데리고 가세요.”

나는 잡은 손을 놓고 옷깃을 툭툭 털었다.

때마침 다가온 베르가 귀엣말로 조용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건 부족에서 사용하는 저 여자의 이름입니다.”

“별 머시기가 이름이라고요?”

“네. 부족 전통의 이름입니다.”

“하…….”

역시 세상은 넓고 이상한 것들은 넘쳐 나는가보다.

“이름을 불렀는데 저 여자가 ‘네!’ 하고 대답하면 같이 손잡고 별 보러 가야겠네요?”

“아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어이가 없던 나는 시답잖은 말장난으로 감정을 분출했다.

하나 그것은 새로운 단초가 되어 돌아왔으니.

“영광스런 이름을 농락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부족장! 이런 수치를 참아야 한단 말이오?!”

반라의 남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나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 순간.

소란을 잠재우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하라 형제자매여.”

남자는 두 팔을 벌려 좌중을 압도했다.

길게 뻗어 나가는 팔과 두툼한 근육, 남자는 헐벗은 남녀 사이에서도 유달리 눈에 띠었다.

실로 보기 드문 거한.

비교하자면 세비앙에서 처리한 돌프를 떠올리게 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에 죽고 사는 부족인가?

나타난 남자는 내 이름부터 물어 왔다.

“이반.”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고.

“흠… 역시 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이군.”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속적인 것들은 깊이가 부족해.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싫어하지. 정신이 오염되는 것 같아서 영 께름칙하단 말이네.”

그럼 부락에서 나오질 말든가.

저렇게 홀딱 벗고 다니면서 무슨 오염 타령이냐고?!

보고 있자니 나야말로 정신이 어찌될 지경이었다.

“그대는 신성한 반투족 전사를 모욕했다. 그 대가는 죽음으로 돌려받는 것이 마땅하나 오늘은 관대하게 용서해 주겠다.”

“이봐요. 내가 쳐다본 건 맞지만, 그게 시비를 걸려고 한 건…….”

“하여 결투를 신청하니 그대가 이기면 오늘의 불손은 눈감아 주도록 하겠다.”

“아니, 그렇게 사람 말을 자르지 말구요.”

“본래라면 목을 치겠으나 내 관대하게 맨주먹으로 상대해 주지.”

“야!”

참다못한 나는 결국 고함을 지르고야 말았다.

살면서 별의 별놈들 많이 만나봤지만, 이런 참신하게 미친놈들은 또 처음이다.

“허허… 감히 본좌에게 소리를 질러?”

“시끄럽고, 결투 받아 줄 테니 빨리 시작하자.”

그러니 다 필요 없다.

이 징그러운 근육 변태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좋아. 그러면 절차에 따라 도전자 이반을…….”

“왜 내가 도전자인데?”

“본래 그런 거다. 본좌는 도전하는 위치가 아니다. 아무튼 그대의 도전을…….”

“됐고. 도전할 테니 네 이름이나 말해라.”

“흠… 이런 예의 없는 것을 봤나.”

남자는 얼굴을 씰룩이며 언짢게 중얼거렸다.

“잘 들어라.”

그러고는 나의 눈을 노려보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 몸은 위대한 반투족의 족장인 ‘울부짖는 창’의 아들이자, 차기 반투족을 이끌 부족장이며, 신의 축복을 받은…….”

“아 쫌! 그래서 네 이름이 뭐냐고!”

“아, 음… 신의 축복을 받은 크흠… ‘나를 죽이고 가라’.”

“뭐라고?”

“나를 죽이고 가라.”

“그래 시발, 오늘 여기서 다 죽자.”

* * *

“에스카, 정말 놀랍지 않아?”

“어, 놀라워.”

“에이, 그렇게 대충 말하면 안 되지. 반투족을 이겼다고 그 반투족을.”

“나도 봤다니까. 도대체 똑같은 얘기를 몇 십 번째 반복하는 거야.”

가죽 공방에 도착한 이후에도 베르의 호들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것은 소소한 나의 활약상.

귀싸대기 한 방에 기절한 어느 반투족과의 무용담이었다.

“말이 되냐고?! 내 말 들어 봐, 에스카. 반투족의 전투 대원들은 대부분 4성급 이상이지?”

“그래.”

“한데 부족장이라면 어느 정도일까? 최소 5성급은 되지 않겠냐고. 그런데 그런 괴물을 맨손으로 기절시켰잖아. 오러도 없이!”

이유는 모르겠으나 베르의 반응은 과할 정도로 요란했다.

상대가 부족장이라 그런가?

하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5성이고 뭐고 힘을 겨룰 짬도 없이 냅다 후려갈겼으니까.

그 밉살스런 주둥이를 1초라도 빨리 닫아 버리고 싶었다.

결과는 한 방에 기절.

녀석은 자신의 이름처럼 대짜로 뻗어 버렸다.

“후배님은 어떻게 힘을 키우셨나요? 혹시 반투족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무슨 힘이 그렇게 세요? 반투족은 과거의 혈통 때문에 강하다고 하지만, 후배님은 그냥 센 거 아닙니까?”

요는 그거다.

오러를 안 쓰고 어찌 그리 강할 수 있는지.

“그냥 힘이 세진 게 아니고요. 저도 죽도록 고생한 겁니다.”

나는 빅터를 떠올리며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그 인간을 만나 내가 무슨 수련을 거쳤는데… 그야말로 지옥 문턱을 밟아 여기까지 왔다.

단지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실제로 죽기까지 했으니 그 어떤 수련도 이보다 혹독할 순 없었다.

하나 말해 본들 믿을 사람은 없을 터.

“하긴, 기골이 장대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보다 웅장하다고 할 때 이미 알아봤죠.”

결론은 웅장한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때.

“어서들 와요. 오래 기다렸지?”

가죽 공방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우, 이 오빠는 생긴 건 끝내주는데 옷이 개판이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당하는 지적이었다.

첫 번째는 넝마.

두 번째는 상거지.

세 번째는 개판.

나의 차림새를 본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의뢰하실 내용은?”

나는 대답 대신 가죽 꾸러미를 꺼내 놓았다.

“흐응… 이건 굴담비 가죽인가?”

“네. 그중에도 어미의 가죽이죠.”

나는 살짝 거만한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생각보다 귀한 물건이 나왔네. 좋아요. 이걸로 무얼 만드실 생각인가요?”

“경갑을 만들어 주세요.”

“아… 갑옷을 만들어 달라…….”

하나 돌아온 주인의 반응은 실망을 넘어 낙담하는 분위기였다.

“왜요? 표정이 왜 그래요.”

그냥 가죽도 아니고 어미의 가죽인데 왜 저럴까.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에 나는 이유를 물었다.

“굴담비 가죽은 색상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죠. 무두질만 잘하면 백금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가죽으로 탄생합니다.”

그야 들어서 알고 있다.

굴담비를 잡던 날 빅터는 이렇게 말했으니까.

― 네놈에겐 가당치도 않을 만큼 멋진 가죽이지. 폼 나는 걸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들 게다.

“하지만 이 가죽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요.”

뭐야 설마 그 얘긴가?

“내피에 오러가 닿으면 물렁거려 못 씁니다.”

“네.”

“오러가 닿지 않으면 너무 무거워지죠.”

“네.”

“그래서 갑옷으로 만들면 못 써먹는단 얘기에요.”

“왜요?”

“왜는요. 방금 얘기했잖아요.”

주인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 가죽은 무겁기 때문에 일반인은 못 입어요. 그래서 오러 유저들이나 착용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내피에 오러가 닿아서 못쓰게 된다고요. 이해됐나요?”

나야말로 답답했다.

이 여자는 지금껏 무얼 봤단 말인가.

“저기요. 내가 가죽 꺼내는 거 못 봤어요?”

“어? 꺼낼 때?”

“이거요, 이거.”

나는 굴담비 가죽을 들어 이불을 털 듯 펄렁거리며 휘둘렀다.

무겁기는 개뿔.

“됐죠? 그럼 멋지게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죽 공방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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