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다음 날 아침.
채비를 마친 빅터는 이른 시간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사흘을 쉬면 남들이 알아본다고 했다. 다녀올 동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빅터는 노파심을 드러내며 나에게 충고했다.
“네, 걱정 마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나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닌 베르.
뭐가 그리 신났는지 모든 말에 대한 답을 저 혼자 대신했다.
“그렇지요, 후배님?”
도대체 이 양반의 오지랖은 어디까지일까.
지켜보던 빅터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내게 말을 건넸다.
“치료사를 찾는 건 베르에게 일러 놨다. 혹시 내가 도착하기 전에 소재를 파악한다면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 보거라.”
“네, 걱정 마십시오!”
역시나 대답은 베르의 몫이었다.
그렇게 빅터의 여정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다녀오마.”
빅터는 짧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세요.”
“나중에 봬요.”
물론 마지막 인사말이 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빅터에게 거리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 걸까.
굳이 이유를 짐작하자면 첫 만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게 있어 빅터의 첫 등장은 기품보다는 괴팍.
귀족이 아닌 스승의 느낌이 더욱 강했다.
더군다나 그 스스로가 후견인을 자처했으니, 나에겐 높으신 백작님이 아니라 친근한 동네 영감처럼 느껴졌다.
“정신 사납다. 어서 들어가거라.”
무심히 답한 빅터는 세 사람의 환송을 받으며 대수림으로 향했다.
“명색이 변경백인데 행색이 늘 초라하시구나. 보는 내 마음이 더 아프네.”
“번거로운 걸 질색하시니 어쩔 수 없지.”
멀어지는 빅터를 보며 베르와 에스카는 각자의 생각을 나눴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 후배님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는 대장간부터 가야겠네요.”
일정을 묻는 베르의 말에 나는 대장간을 지목했다.
일단 궁금한 뭔가가 있다는 게 신경 쓰였고, 들고 다니는 것도 슬슬 성가시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에스카가 나설 차례군요.”
베르는 과장된 몸짓으로 걸음을 물렸다.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냥 그런 사람이려니 한다.
딱히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
함께 있는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베르의 덕이 클 것이다.
어쨌건 에스카는 앞으로 나섰고, 나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게브네는 까다로워요.”
“네, 기억합니다.”
“그의 마음을 돌릴 뭔가가 있나요?
“물론이죠.”
대답을 마친 나는 등 뒤를 가리켰다.
그것은 폭넓게 빠진 대검.
고블린 로드를 잡고 얻은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었다.
“흐음,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에스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금속이라면 저희보단 전문가이실 테니까. 일단 가 보죠.”
하여 우리는 게브네 대장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경제특구가 무어냐고 물으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리베를 가 보면 알게 된다고.
상거래가 중심인 도시답게 중심 상가 지역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돈의 전쟁.
좋은 것 옆에 더 좋은 게 있고, 화려한 집 옆에 더 화려한 집이 있었다.
“저거는 금인가요?”
길을 걷던 나는 번쩍이는 문을 보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황금 맞네요.”
돌아온 베르의 답은 그렇다는 것.
놀랍게도 저 현관은 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흔한 풍경이죠.”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베르는 가볍게 한마디 보탰다.
“저런 게 흔하다고요?”
“특별할 건 없는 모습이죠.”
감흥 없는 베르의 말에 나의 시선은 주변을 배회했다.
그제야 보이는 평범한 풍경들.
하나일 땐 특별했지만, 그것이 둘이 되고 셋이 되니 그저 흔한 도심 풍경으로 전락했다.
“다 이런 건 아니에요. 중심가를 벗어나면 분위기는 달라지니까요.”
조용히 걷던 에스카가 앞서가며 방향을 바꾸었다.
“이쪽이에요.”
그러곤 중심가를 벗어난 길을 향해 미끄러지듯 모습을 감췄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뒤를 따르던 베르가 나를 보며 당부했다.
“거친 놈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에스카를 따라 걸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도시의 뒷골목.
나 같은 시골 출신에겐 차라리 이런 분위기가 더욱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이∼ 아가씨! 여기 와서…….”
“닥쳐.”
“에이, 그러지 말고…….”
“꺼져.”
이런 걸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니 말이다.
치근대는 놈들을 무시하며 에스카는 걸음을 서둘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여기저기를 헤맨 끝에 우리는 대장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네? 문을 닫았다고요?”
굳게 닫친 대장간 앞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좀 멀리 나가셨나 봐요. 한동안 못 올 거라고 하셨다는데, 딱히 내용이 없네요.”
“언제 온다. 이런 기별도 없다는 건가요?”
“네. 며칠 전부터 용병 조합을 드나드셨다는데, 그쪽으로 가 보면 단서가 나올 것 같아요.”
거듭된 나의 질문에 에스카는 무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끔씩 이마를 긁적거리는 것이, 말은 않지만 이래저래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까다롭네, 어쩌네, 온갖 수식어는 다 갖다아 붙이지 않았나.
하지만 와서 보니 빈집이고, 빈 수레가 요란한 상황이 돼 버렸다.
“온 김에 용병 조합도 들러 보시죠. 여기서 가까우니 금방 도착할 거예요.”
에스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두에 나섰다.
자책이랄까?
틀어진 지금의 상황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용병 조합에서도 계속되었다.
“에스카 님,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한 번만 더 물어보고요.”
에스카는 이제 막 들어온 무리에게 다가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혹시, 대장장이 게브네를 아시나요?”
이렇게 시작한 그녀의 말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디로 갔는지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화염 계곡으로 갈 인원을 모았어요.”
마지막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뜻밖에도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
“화염 계곡이라고 하셨나요? 목표는 들으셨어요?”
“무슨 숯을 찾는다고 했는데… 대충들은 거라 더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대강의 목표까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용병 조합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쩌죠?”
“어쩌긴요. 때가 되면 오겠지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고블린에게 얻은 대검의 재료가 궁금했던 것이지, 딱히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없는 사람을 두고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에스카가 미안해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맞습니다. 솔직히 지금 후배님에게 필요한 건 대장간이 아닌 것 같군요.”
지켜보던 베르가 나서며 대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흠… 어제부터 계속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젠 안 되겠네요. 그 넝마 같은 옷부터 어떻게 해 봅시다.”
베르의 말이 끝나자 우리의 시선은 온통 나의 차림새에 집중되었다.
“흠…….”
그러고 보니 거지라고 놀린들 딱히 할 말도 없어 보인다.
그 난리 통을 평상복 하나로 버텨 왔으니 오죽했겠나.
“그 팔뚝에 차고 있는 완갑도 이참에 버리고요. 안 어울려요.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베르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나의 옷차림을 평가했다.
“고블…….”
그 뒷얘긴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말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으니까.
그냥 지금 내 모습은.
‘거지가 따로 없네.’
완벽한 떠돌이 노숙자였다.
하나 베르의 관심은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근접 공격수가 방어구 하나 없으면 어쩐답니까? 목숨이 여벌로 있는 게 아니면 당장 갑옷부터 맞추시죠.”
그것은 장비 상태였다.
백번 양보해 생각해도 이것은 베르의 말이 옳았다.
골렘에게 두들겨 맞을 때 이미 간절하게 느꼈었고, 그 이전부터 빅터는 방어구의 부재를 지적했었다.
그래서 굴담비의 가죽도 챙겨 오지 않았나.
미리 준비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그랬을 뿐이다.
이토록 빠르게 성장할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빅터는 그저 나의 체력이나 키우며 느긋하게 리베로 올 생각이었다.
하나 그 사실을 모르는 베르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더러는 일부러 안 입기도 하지만, 후배님은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일부러 안 입는 사람도 있나요?”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베르의 말에 반문했다.
앞서 말했듯, 없어서 못 입은 거지, 안 입은 게 아니었다.
뾰족하게 답하는 나의 말에 베르는 길 건너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시선을 돌린 나는 눈을 비비며 내 자신을 의심했다.
“저건 뭐야?”
계열을 알 수 없는 요상한 옷차림 때문이었다.
아니, 방어구인가?
“저게 뭐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길 건너를 주시했다.
“방어구입니다.”
“저렇게 헐벗었는데요?”
나의 시선이 머문 곳은 길 건너의 작은 무구점.
삐딱한 간판 아래로 훤히 드러난 남녀의 엉덩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출과 방어력은 반비례하는 법이니까요.”
베르는 반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신기할 것 없다는 표정.
설명하는 베르의 얼굴엔 작은 동요도 없었다.
“저건 그냥 안 입은 건데.”
나는 베르의 말을 부정하며 그들을 응시했다.
짐승의 가죽과 철 조각을 적당히 섞어 만든 옷.
말이 좋아 방어구지 그저 단단한 속옷에 가까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훤히 드러내 놓으면 방어구로서 무슨 가치가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속살을 저만치 드러낸 여인이라니.
내가 살아온 삶에선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반투족은 육체의 힘을 숭상하는 부족입니다. 오러와 방어구에 의지하는 걸 수치스러워 하죠.”
하나 베르의 설명을 들으니 일견 이해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골렘의 주먹을 받아 내던 게 불과 어제의 일이다.
당시의 나도 맨몸이었으니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과격한 방법만 따진다면 내가 더욱 원초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돌아선 저 여자는.
‘와 씨… 방금 그건 출렁…….’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저렇게 막 흔들리다니.
이런 백주 대낮에.
그것도 이렇게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어이쿠야.’
처음 마주한 사람은 정신 차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가만, 혹시 그걸 노린 건가?’
그렇다면 최강의 방어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상대가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에 슥삭!
‘최고네.’
길 건너 반투족 여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엄청났으니까.
반라의 남자 모습 또한 불편하긴 매한가지.
여러모로 시선 두기 힘든 껄끄러운 방어구였다.
“아참, 후배님. 반투족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모르는 사이라면 눈을 3초 이상 마주 보면 안 됩니다.”
“왜요?”
“용무가 없는데 마주 본다는 건 싸움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아…….”
그래서 저렇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거구나.
“조심하세요. 힘도 엄청나게 강합니다.”
“그런 건 좀 빨리 얘기해 줘야죠!”
이미 늦어 버렸다.
나는 수십 초 이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너, 한번 해보자 이건가?”
출렁거리던 큰 키의 여인은 콧김을 내뿜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