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저기가 리베인가요?”
“네, 자유도시라고도 하죠.”
얼빠진 나를 보며 터번을 두른 베르가 가볍게 대답했다.
“뭐가 저렇게 커…….”
넋이 나간 나를 보며 베르는 친절한 미소로 대응했다.
그러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며 차분한 설명을 이어 갔다.
“리베의 성벽은 웅장하기로 유명하죠. 견주려면 사라센이나 브라함의 수도 정도는 돼야 할 겁니다.”
울림 좋은 그의 목소리가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갔다.
다시 말해 부질없다는 얘기다.
내가 아는 성이라곤 고작해야 세비앙이 전부.
사라센이건 브라함이건 어차피 나에겐 의미 없는 예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걸 봐 버렸네…….”
나는 끝없이 뻗어 있는 성벽을 바라보며 그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일개 도시가 이렇다면 제국의 수도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대륙의 자본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베르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 왔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이었다.
‘아주 돈을 박박 갈아서 만들었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규모는 짐작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거대하고 웅장했을 뿐.
이곳의 재력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자유도시가 된 게 아니란 거죠. 여기는 막강한 힘과 그것을 통제할 돈이 넘쳐 나는 곳입니다.”
베르는 쓰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리고 그 순간.
때를 맞춰 끼어든 에스카의 목소리가 우리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도록 해요. 다들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우리 꽤나 다급한 상황이거든요.”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걸음을 재촉했다.
“에스카의 말대로 서신부터 확인해야겠구나. 서두르자.”
“네, 백작님.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에스카는 빅터의 말에 답하며 선두에 나섰다.
뒤를 따르던 나의 시선은 잘록한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
눈앞을 채운 건 잘빠진 한 쌍의 곡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애매한 도신(刀身)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칼이 있었나?’
10년이 넘는 세월을 대장간과 함께해 오지 않았던가.
처음 보는 기묘한 형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의 시선은 집요히 그녀의 허리춤으로 향했고.
“무기 좀 보시나 봐요?”
눈길을 알아챈 베르가 슬며시 말을 건네 왔다.
“대장장이 출신이라서요.”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체격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곤 나의 전직에 대해 호들갑을 떨며 반응했다.
그냥 성격이 그런 걸까.
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거기에 걸러지지 않은 직접적인 표현까지.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오해받기 딱 좋은 그런 성격인 듯싶었다.
“리베에 있는 은둔 장인이 만들어 준 겁니다. 괴팍한 양반이긴 한데 실력은 진짜죠.”
“그렇군요.”
베르의 말에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의 긍정이랄까.
생김새며 만듦새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소개시켜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지만 에스카가 나서면 가능합니다.”
베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스카를 불러 세웠다.
덤덤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에스카.
그런 그녀를 향해 베르는 다짜고짜 나의 얘기를 전했다.
“에스카, 우리 후배님에게 게브네 대장간 좀 소개시켜 줘.”
“게브네?”
에스카는 반문하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는데.
“소개는 시켜 줄 수 있지만, 의뢰를 받을지는 장담 못해요.”
그다지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왔다.
하나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알 수 있는 법.
“의뢰자가 들고 온 재료를 보고 가부를 결정하거든요.”
나의 의뢰는 이미 수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잘됐네요.”
나에겐 생전 처음 마주한 독특한 소재가 있으니까.
“마침 그런 재료가 있거든요.”
나는 등에 걸친 대검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것은 고블린 로드에게 얻은 전리품.
감춰진 녀석의 정체가 드디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일단 백작님과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것 먼저 마무리하고 소개시켜 드릴게요.”
에스카는 흔쾌히 나의 청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고.
[리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드디어 나는 신문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 * *
‘세상에…….’
떡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멋진 세상이라니.
나라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이곳을 통해 새삼 느끼는 중이다.
‘도시 전체가 포장도로라고?’
세비앙의 성은 흙바닥이었다.
심지어 내성조차 그러했으니, 이곳의 풍경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갓 구운 식빵입니다! 제국에서 유행하는 식빵 사세요!”
일개 장사치의 생활환경조차 내가 아는 영주의 삶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쯤 되니 세비앙 영주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멋지게 정비된 도로와 세련된 건축양식.
낙후된 세비앙과 비교하자면, 누가 봐도 이곳은 완벽한 천국이었다.
자연히 나의 눈은 바쁘게 돌아갔고.
“어, 그거 그렇게 쳐다보시면 돈 내야 해요.”
“네에? 그냥 건물이잖아요. 그런데 돈을 받아요?”
야박한 도시 인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저 바라보았을 뿐인데 돈을 받는다니… 날강도가 따로 없잖은가.
“하하하, 농담입니다. 하도 두리번거리기에 한 말이에요. 그러다간 사기꾼들에게 당한다구요.”
다행히 베르의 장난질이었다.
“아…….”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정신 줄을 놓은 건 사실이니까.
이곳에 도착한 내내 이런 상태였던 것 같다.
“우리 후배님, 그만 정신 차려 볼까요?”
베르는 빙긋 웃으며 뒷짐을 지었다.
“화려함은 속임수. 이곳은 전쟁터니까요.”
그러곤 웃음 속에 뼈를 담아 나에게 경고했다.
순간 돌아오는 정신.
“아, 이런 대로에서 싸우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들떠 있던 마음이 제자릴 찾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화려한들 결국 익숙해질 허상이 아니던가.
“이제 다 왔습니다.”
표정을 바꾼 나를 향해 베르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앞에 3층 테라스 건물이 보이시나요? 거기가 안전 가옥입니다.”
베르의 손끝은 연한 베이지색 건물을 지목하고 있었다.
“비가 심하게 오면 물이 새기도 하지만, 나름 괜찮은 건물입니다. 주변 건물과 동떨어진 것도 큰 장점이죠.”
베르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고, 끝날 때쯤엔 안전 가옥 앞에 도착했다.
도착한 베르는 계단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3층으로 가시죠. 계단 폭이 좁으니 주의하세요.”
계단을 오른 우리는 안전 가옥 내부로 들어섰다.
“…….”
썰렁한 거실 풍경에 절로 입이 다물어진 상황.
곁에 선 베르는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휑하죠? 집은 넓은데 사는 사람이 둘뿐이라 그렇습니다. 게다가 저 친구는 미적 감각이 엉망이거든요.”
슬쩍 에스카를 살핀 베르는 소곤거리듯 작게 말을 이었다.
“에스카의 취미가 비싼 쓰레기 사다 모으는 겁니다. 내다 버리는 것도 일이에요.”
하나 이마져도 들렸나보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서부터 보여 드려.”
다가온 에스카는 베르를 지나치며 다그치듯 말했다.
“아, 맞네. 전서를 보여 드려야 하는데 깜박했어.”
베르는 머리를 치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러곤 작은방을 들어갔다가 다시 큰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오가는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고.
“후배님, 최고!”
베르는 뜬금없이 엄지를 치켜들며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글쎄요. 황실도 불안한 거죠. 백작님이 반골인 건 이미 비밀도 아니잖아요.”
“네, 제 생각도 에스카와 같습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곤란해지는 건 저희 측이죠. 황제는 이것을 빌미로 어떻게든 입지를 줄이려 할 겁니다.”
세 사람이 모인 큰 방에선 수십 분째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모르던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이었다.
조금은 지루하고.
한편으론 답답했다.
은유와 비유가 난무하니, 내가 듣기엔 암호 같은 말들이었다.
하나 확실히 알아들은 말이 하나 있었는데.
“황궁으로 가시지요.”
빅터의 다음 목적지는 브라함의 황궁이었다.
* * *
야경(夜景).
누구나 다 아는 이 단어의 뜻은 밤의 경치를 의미한다.
하나 마지막으로 입에 담아 본 것이 언제였을까.
아니, 사용이나 해 봤었나?
변경의 시골 영지가 다 그렇듯, 해 저문 마을 어디에서도 감상할 경치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짙고 무거운 적막뿐.
“멋있다.”
이토록 화려한 야경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볼 만하지요?”
“그러네요. 등불이란 건 노란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곁에선 베르의 말에 솔직한 소감을 전했다.
“붉은색에 파란색… 와 백색도 있네요? 저렇게 밝은 빛이 가능한가요?”
고작해야 호리병만 할까?
저 작고 투명한 유리병 속에 한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력석을 이용한 등불이에요. 최근에 나온 신상품인데 부르는 게 값입니다.”
“최근에요?”
“네. 요즘 저것 때문에 연금 조합이 시끌시끌하죠. 아주 난리랍니다.”
베르는 묻지도 않은 속사정을 친절히 설명했다.
‘연금 조합이라면…….’
나는 골렘 서식지에서 본 샤샤 남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가게를 잃게 생겼다고 했었지.
베르가 말하는 조합의 수장이 그 사건의 흉수였다.
“자세히 좀 알 수 있을까요?”
어차피 남매의 편에 서기로 했으니 마침 잘됐다.
다시 만나려면 최소 2주는 걸릴 테니 그사이 필요한 정보라도 모으면 될 터.
“흐음… 아까 얘기한 그 마력 등 때문인데요.”
나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서서 베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력 등을 만들려면 정제된 마력석이 필요한가 봐요. 그게 꽤 정교한 작업이라 업체 선정에 난항이 있었는데, 조합장 추천으로 납품 업체가 정해진 겁니다.”
“그렇군요.”
일단 여기까지 상황은 남매의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요?”
“납품이 불가능한 게 문제인 거죠. 그런데 이게 웃긴 게 뭐냐면.”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
“정작 납품 업체에선 아무 말도 없었는데 엄한 데서 설레발을 친다는 겁니다.”
이러한 간계를 꾸민 놈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게 누구죠?”
“연금조합장과 재료 상인들이에요.”
남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혹시 모를 의심조차 모두 사라진 상황.
“리베에 연금 업체가 세 개거든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사라지게 생긴 거예요.”
페드로와 베르의 말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베르는 나에게 물었고.
“남은 두 집이 양분하겠군요.”
나는 별다른 사족 없이 결론만 추려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한마디 더.
“한 놈은 일을 꾸민 놈이고, 다른 한 놈은 그놈과 붙어먹는 놈이겠죠.”
“호오…….”
“조합장이 썩었네.”
나는 사건의 배후로 조합장을 지목했다.
이미 남매에게 들어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대화를 통해 사실을 확인 받은 것이다.
“후배님 통찰력이 상당한데요? 맞습니다. 다들 쉬쉬하지만 조합장이 범인이죠. 그의 형과 함께 연금 시장을 독점하려는 계획일 겁니다.”
“단체장은 관여하지 않나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하잖아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겁니다.”
또한 얽혀 있는 권력의 흐름까지.
단순히 마력석 확보로 해결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설명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보세요.”
나는 손사래 치는 베르의 뒤로 에스카와 대화 중인 빅터를 바라보았다.
“하면 스승님께선 언제 출발하신 답니까?”
그러곤 황도로 출발하는 날짜를 물어보았다.
“내일이요.”
그에 돌아온 베르의 대답은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내일 바로 간다고요?”
“네, 사안이 시급해서요.”
“흐음…….”
이렇게 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다.
소개받은 대장간을 찾아가 대검의 정체를 밝혀야 하고, 굴담비의 가죽도 맡겨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샤샤 남매의 마력석 납품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데릭 영감이 말한 아이작이란 남자도 찾아야 한다.
간 김에 카슈타르에 있는 로제까지…….
“다녀오면 얼마나 걸릴까요?”
하여 소요될 일정을 다시 물었다.
오래 걸릴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대충 한 달 반?”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도 길었다.
“돌아올 때야 가고일을 타고 오면 되지만, 갈 때는 육로로 가야 하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고일은 계속해 추락하기만 했으니까.
오로지 편도만을 위한 요상한 운송 수단이었다.
“그러니 최소 한 달 반은 걸리지 않을까요? 대수림을 지나도 황도까진 또 거리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황궁에 도착해서 얼마나 머무르게 될 지는 저희도 예측할 수 없거든요.”
결론은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모두 미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나 불필요한 고민이었나 보다.
“황도는 나 혼자 다녀올 테니 이반은 이곳에 남아 있거라.”
대화를 마친 빅터는 굳은 얼굴로 말해 왔다.
“함께 가는 게 아니고요?”
“그래. 굳이 지금 나서서 모습을 드러낼 필요 없지.”
빅터는 다른 의미를 포함해 홀로 떠나길 결정한 듯했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네놈이 없는 게 훨씬 빠르고 편하다.”
“아, 예…….”
어련하겠나.
나도 예의상 물어본 말이었다.
솔직히 빅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내가 동행해 봤자 시간만 더 늘어날 뿐이다.
“수행 기사들 집결지는 황도 인근으로 할까요?”
“그래, 전승의 탑으로 정하도록 해라.”
“네. 바로 전서구를 날리겠습니다.”
돌아선 에스카는 지체 없이 움직여 작은 방으로 향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