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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32화 (32/203)

32화

이제는 나의 차례였다.

빅터의 착륙 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능선의 정상은 발아래로 다가왔다.

“수고했다!”

나는 붙잡은 팔을 떼고 레서 가고일의 등을 밀어냈다.

묘하게 이어지는 짧은 부유감.

지면에 당도한 나의 몸은 쏘아진 살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콰가가가가각―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두 다리가 정신없이 지면을 긁어 댔다.

매서운 속도를 줄여 가며 다가오는 장애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크으으윽!”

저항하는 뒤꿈치를 타고 작은 돌부리가 빗물처럼 비산했다.

사이사이로 나부끼는 짙푸른 풀잎들.

끝나지 않은 착지의 여파는 다른 곳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뜨, 뜨거워!”

마찰로 달궈진 엉덩이가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러다 불이라도 날 것 같아 나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접촉면을 최소화시켰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코앞으로 닥쳐오고 있었으니.

“어어?”

돌격 중인 두 다리 너머로 뾰족한 돌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창처럼 솟아오른 돌덩이.

“안 되에에에에에!”

나는 절규하듯 고함을 지르며 뒤꿈치에 힘을 실었다.

망했으니까.

저 흉악한 모서리가 사타구니에 걸리는 순간, 내 인생도 함께 작살나는 거다.

나의 소중이가.

아직 빛도 보지 못한 아까운 녀석이!

‘죽어도 안 돼!’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고자라니…….

이렇게 끝내기엔 난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단 말이다!

콰직―

나는 든든한 해머를 휘둘러 다리 사이에 내리 찍었다.

그렇게 해머와 돌부리는 격돌했고.

콰드드득!

범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나의 몸은 둥실 떠올랐다.

“어어억?”

생각보다 깊은 바위 뿌리에 허공으로 튕겨진 것이다.

다시 한번 느껴지는 기묘한 부유감.

비산하는 돌조각을 해치며 나는 가까스로 중심을 바로잡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허공에 떠 있던 나의 몸은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제기라아아알!

급히 두 다리를 해머 위에 올려 이어질 2차 충격에 대비했다.

가가가가각―

언덕에 맞닿은 해머가 요란스레 지면을 긁어 댔다.

마치 쟁기질을 하듯.

푸른 대지 위에 고랑을 만들며 비탈진 경사면을 질주했다.

“크으으윽!”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균형을 되찾았다.

점차 익숙해지는 감각.

상황에 여유가 생기자 빅터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영감탱이가!”

앞서가는 빅터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미리 설명이라도 해 줬다면 이런 꼴은 면했을 것을.

무턱 대고 이게 무슨 난리냔 말이다.

“아주 신나셨네!”

능숙하게 내려가는 빅터를 보자니, 나만 당하는 느낌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여기서 쩔쩔매면 저 인간의 바램대로 되는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나는 더욱더 몸을 움츠려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화끈하게!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겁도 없이 몸을 내던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각―

마침내 나는 빅터를 앞지르는 데 성공했고.

“캬핫핫! 별거 아니네!”

갈림길을 마주한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고는 통쾌함을 담아 신나게 떠들어 재꼈다.

“아이구! 그렇게 느려서야 밥벌이는 하겠어요? 네? 아핫핫!”

빈정거림을 잔뜩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빅터는.

“이쪽이다, 녀석아!”

나와 반대인 오른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엥?”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다가올 무언가에 대해 나의 오감이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잖은 시간.

막연한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시부럴…….”

푸르른 잔디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자 소중이를 노리던 몹쓸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우후죽순처럼 돋아난 살벌한 돌부리들을 향해, 나의 사타구니는 맹렬히 진격하고 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빅터를 마중 나온 사람들은 모두 합해 두 명이었다.

흰 터번을 두른 남자와 같은 장식을 한 여자.

같은 듯 다른 차림새의 두 남녀는 빅터를 향해 정중히 예를 차렸다.

가볍게 끄덕이며 답하는 빅터.

마중 나온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향했다.

“저분은 누구신지.”

“저분은 거기가 불편한가요?”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말로 시작해 전혀 다른 말로 끝냈다.

“넌 뭘 물어보는 거야?!”

“아니, 걸음걸이가 이상하잖아.”

“걷는 게 이상하면 거기가 문제야? 너는 왜 항상 이상하게 걷는데?”

“난 웅장하잖아!”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티격 거렸다.

역시 그 백작에 그 가신.

광기 충만한 빅터의 식구들답게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았다.

‘골고루 미쳤구나.’

혀를 차던 나의 시선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나의 존재를 물어오던 사람.

독특한 구릿빛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인 멋이 풍겼다.

또한 정신머리는 온전한 듯하니.

“좀 적당히 하자. 사람 있을 때는 말도 가리면서 하고.”

적어도 생각이란 건 하고 사는 것 같았다.

“네가 남자의 로망을 어찌 알겠냐.”

그러니 더욱 정신 나간 사람은 이 남자.

“혹시 그쪽도 웅장한…….”

다짜고짜 남의 중앙을 가리키는 이 녀석이 좀 더 맛이 간 것 같았다.

“하…….”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손끝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빅터.

이 사달의 원흉을 향한 분노의 삿대질이었다.

― 쾅! 콰가가각 콰쾅 쾅! 콰직 쿵!

내가 선택한 왼쪽은 그야말로 죽창 밭이었다.

아니 석창인가?

소중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수많은 돌부리와 때 아닌 사투를 벌여야 했다.

부시고, 깨고, 타 넘고, 튀어 오르고…….

해머에 의지한 사타구니는 그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

급소가 급소인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하나 이 고통을 누가 알겠는가.

“저희 백작님이 왜?”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울컥했으나 나는 멈칫거리고 말았다.

어쨌든 왼쪽 길을 택한 건 나였으니까.

굳이 논하자면 빅터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나 초록은 동색이라 안 했던가.

“하여간 그런 게 있어요. 영감님에 대해선 저보다 더 잘 아실 테니, 뭐.”

“흐음?”

나는 빅터와 이 남자를 똑같은 광인으로 연결 지었다.

빅터는 말할 것도 없고.

“어쨌건 걸음걸이는 이상하지만 웅장하지는 않다… 이 말인 거죠?”

아… 이 남자는 더 미친 것 같다.

생긴 건 희멀건 한데 내뱉는 말이 가관이다.

정제되지 않은 야생의 뇌랄까.

세비앙의 꼬마들이 떠오르지만, 이 인간은 종자가 달랐다.

‘그 아이들은 귀엽기나 했지.’

어른이 나오는 대로 말을 지껄이면 주둥이가 매를 부르는 법이다.

“뭐라고요?”

나는 고까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다만 내 입장에선 그저 가소로울 뿐.

“그러는 댁은 얼마나 웅장한데요?”

우쭐거리는 녀석을 향해 나는 빈정거리듯 되물었다.

“하하하… 저야 뭐, 리베에서도 소문났으니까요.”

남자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까불지 마, 베르. 이분이 훨씬 더 웅장하시니까.”

터번을 쓴 구릿빛 여인은 나의 승리를 확정 지어 말했다.

“얼굴은 더 훌륭하시네.”

거기에 생김새까지.

사실 당연한 결과라 달리 설명할 것도 없다.

그저 한마디만 보태자면, 이 몸은 위로만 자란 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훗…….”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베르라는 녀석.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카가 그렇다면 틀림없겠지.”

그러고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얼결에 손을 마주 잡았고.

“환영합니다. 웅장한 형제여!”

녀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똥 같은 소릴 지껄였다.

* * *

웅장한 첫 만남이 지나간 직후.

“그런데 어떻게 알고… 우리 만난 적이 있었나요?”

나는 에스카라는 여인에게 의문을 제시했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여자와 나는 일면식도 없었으니까.

“그렇죠.”

역시나 여인은 나의 질문에 수긍했다. 그러니 더욱 이상할 수밖에.

“당신은 나의 편을 들었어요.”

“네.”

“그리고 저 남자는 당신의 말을 인정했고요.”

“그랬지요.”

하면 무슨 근거로 나의 승리를 확정 지었냐는 얘기다.

“뭐, 투시라도 하나요?”

“조금은요.”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가능하다는 황당한 얘기였다.

“헐…….”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보, 보인다고요?”

“아주 살짝, 몸에 암기가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에요.”

어쨌거나 보인다는 것 아닌가.

농담으로 던진 나의 말에 그녀는 진심으로 답한 것이다.

게다가 왜 자꾸 미소를 짓고 있는 건지.

여인을 향한 민망한 의혹은 오히려 깊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하나 더.

“흠, 허당은 아니란 게로구나.”

지켜보던 빅터가 턱 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에 이채롭게 빛나는 두 눈까지.

왜 이런 내용에 눈빛을 반짝이는지 모르겠다만.

“역시 나의 제자답군.”

빅터는 뜬금없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결과에 만족했다.

황당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역시 그랬군요! 과연 스승님의 제자답습니다!”

베르의 입에서 스승이란 호칭이 나온 것이다.

“지금 뭐라고… 두 분이 사제 관계였어요?”

그에 나의 동공은 확장되고 있었으니.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군요. 어쩐지 웅장하더라니.”

베르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한때 백작님의 제자였습니다. 한데 오러에 재능이 없어 이렇게 되었죠.”

그러곤 빈손을 비비며 커다란 새를 가리켰다.

녀석의 정체는 알바트로스.

“지금은 정신계 마법사이자 이 녀석의 주인입니다.”

나와 빅터의 머리 위를 떠돌던 회백색의 큰 새였다.

끼륵끼륵―

마치 인사라도 건네듯 녀석은 끼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친구가 정식 제자입니다.”

소개를 마친 베르의 시선은 곁에 있던 여인에게로 향했다.

“에스카가 백작님의 마지막 제자였죠. 이제는 잘생기고 웅장하신 후배님에게 그 자리를 양보…….”

“됐어. 남자가 뭐 그리 말이 많아?”

말을 자른 여인은 앞으로 나서며 나에게 다가왔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에스카예요.”

“아… 저는 이반입니다.”

에스카의 시선이 오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다리가 움츠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주 살짝이면 얼마나 보인다는 거야?’

숨겨진 무장을 확인할 정도라지만, 그 한계는 본인만 아는 것 아니겠나.

움츠러드는 나의 다리를 보며 에스카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고.

“걱정 마세요. 훤히 보이는 게 아니니까. 그냥 살짝…….”

에스카는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와…….

‘살짝’이라는 말이 왜 저리도 강조되어 들리는 걸까.

훤히 보인다는 말보다 더욱 무섭게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크흐음.”

안심하라는 에스카의 말에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나 잊고 있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남자라면 자랑스러워해야죠!”

이 남자가 남아 있던 것을.

곁으로 다가온 베르는 팔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번쩍 들어 위로 올리더니.

“웅장한 형제 만세!”

…라고 외쳤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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