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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31화 (31/203)

31화

“저기요, 스승님.”

“왜?”

미친 듯이 달려온 우리는 까마득한 절벽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등반 준비를 시작했다.

“제가 진짜 힘들어서가 아니고요.”

“그런데.”

“여긴 왜 올라가는 거죠? 길은 저쪽에 있잖아요.”

심지어 누가 봐도 길인 것 같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런 길을 놔두고 절벽을 타려는 이유가 뭘까.

“아는 만큼 보이는 게다.”

진지한 나의 질문에 빅터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젠장.’

뭘 더 알아야 보이는지 모르겠다만, 아는 만큼 봤기에 이러는 거다.

이 절벽의 형태는 높게 솟은 기둥이었다.

그러니 기를 쓰고 올라가 봤자 나올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경치 구경일 뿐이다.

“뛰어내리기라도 할 건가요?”

나는 답답한 심경으로 빅터에게 질문했다.

“그럴 생각이다.”

“네?”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빅터는 멍해진 나를 두고 혼자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득하게 솟은 단애 절벽을.

“아, 진짜…….”

지난번 강가 암벽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교조차 불가능한 까마득한 높이.

당연히 떨어지면 그 즉시 사망 확정이다.

“미쳤다니까.”

나는 구시렁거리며 절벽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삐쭉 뻗은 암석을 움켜쥐어 근육을 수축시켰다.

수직으로 흐르는 가파른 암벽.

거친 표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하나 나의 두 팔은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으니.

“와씨…….”

추락의 공포 앞에 온몸이 굳기 시작했다.

이 아래는 단단한 지면.

강물이 흐르던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보지 말자. 보는 거 아니야…….”

널뛰는 마음을 달래며 나는 침착하게 손을 뻗었다.

이미 한참을 올라왔고,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다.

빅터의 모습도 방금 전에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환장하겠네.”

눈치 없는 나의 두 눈은 기어코 발아래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아찔하게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몬스터가 주는 압박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이었다.

맞설 수 없는 일방적인 공포.

극복할 방법은 오롯이 스스로에게 달려 있었다.

“후…….”

나는 긴 호흡으로 심신을 진정시켰다.

보다 깊고.

보다 평온하게.

오도 가도 못 하는 나 자신에게 따스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할 수 있다!”

크게 소리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스스로를 채근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드아아아아아아!”

나는 거칠게 포효하며 두려움에 당당히 맞섰다.

자고로 강인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법.

심장을 옥죄던 공포가 용기로 바뀌며, 떨리던 손끝에 힘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이기 시작했는데…….

“지랄하지 말고 이거나 잡아라.”

갑자기 나타난 빅터는 굵은 로프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밧줄 타는 건 할 수 있지?”

“…….”

“쯧쯧, 암벽 하나 타면서 뭐가 그렇게 요란한 건지.”

혀를 차던 빅터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크흠…….”

가볍게 낭창거리는 적갈색의 로프를 잡은 나는 남은 절벽을 기어올랐다.

쪽팔림은 잠시뿐.

보다 안전한 루트가 확보된 것이었다.

하여 손쉽게 정상에 올라서게 되었고.

“우왓! 깜짝이야. 뭐,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며 해머를 움켜쥐고 말았다.

키리리리릭―

그도 그럴 것이, 시커멓고 커다란 괴물이 주둥이를 벌리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박쥐같은 날개까지.

“무기는 거둬라.”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빅터는 나의 곁을 지나치며 해머를 아래로 눌렀다.

“레서 가고일이다.”

그러곤 놈에게 다가가 녀석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가고일의 아종이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름 앞에 레서가 붙었다 떨어진들 어차피 나는 모르는 놈이다.

“생긴 건 험악하지만, 아종답게 뭔가 하나가 부족하다.”

그런고로 빅터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이유야 말해 무엇 하겠나.

‘그냥 살벌한데.’

부족한 하나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빅터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공격 의지가 결여돼 있다.”

“그게 무슨?”

“이 녀석들은 초식이다. 특히 과일을 좋아하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납득되지 않는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이 녀석들이 초식이라고요?”

나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반문했다.

믿을 수 없으니까.

소도 한입에 삼키게 생겼는데 무슨 초식 타령인지 모르겠다.

“붙임성이 좋은 놈들이다.”

하나 빅터는 강아지 다루듯 괴물의 턱을 긁어 댔다.

“귀여운 놈들이지.”

거기에 애정 어린 표현까지.

빅터의 말을 해석하자면 결국 이런 얘기가 된다.

사납게 생긴 저 얼굴은 그저 가면일 뿐.

공격 본능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풀을 뜯으며 과일을 쪼아 먹고 사는 귀여운 놈인 것이다.

끄르르르르르륵…….

저런 흉악한 모습으로.

끼르르르르르륵…….

애교를 부리다니.

레서 가고일은 빅터의 몸에 머리를 부비고 있었다.

“너도 만져 봐라.”

“거부하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런 끔찍한 애교 따위는 절대로 사양이다. 아무리 봐도 저것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아닌가.

하나 늘 그랬듯.

사건과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갔다.

“어차피 싫어도 만져야 한다.”

빅터는 가고일을 끌고 절벽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놈의 등에 매달려 좌우로 한 번씩 몸을 기울였다.

이어서 들려오는 짤막한 설명.

“봤지? 방향 전환은 이렇게 하면 된다.”

말을 마친 빅터는 녀석과 함께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

내가 지금 무얼 보고 있는 걸까?

끄르르르륵…….

멀어지는 정신을 챙기며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마주한 시커먼 녀석.

놈은 커다란 눈을 뒤룩거리며 나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끼르르르륵…….

녀석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이게 정말 온순하다고?’

의심을 버리지 못한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상한 움직임에 주의하며… 움켜쥔 해머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여차하면 내지를 상황.

“허허…….”

하지만 놈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나의 얼굴을 핥아 댔다.

* * *

리베에 위치한 빅터의 안전 가옥.

“흐음…….”

죽은 듯 앉아 있던 남자가 눈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님을 찾았다.”

그러고는 여인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대수림에 계셨군. 어디쯤에 계신 거야?”

“레서 가고일 서식지로 가고 계셔.”

남자는 연신 눈을 비비며 자신이 본 것을 여인에게 설명했다.

“역시 점프를 하실 생각인가 보군.”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모르는 남자와 함께 계시던데.”

“그래? 어쩐 일로 일행을 대동하신 걸까.”

“그야 만나 뵈면 알겠지.”

남자는 계속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

그런 그의 모습에 여인이 다가와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나 보다. 눈이 충혈돼 있네.”

“마력 량이 증가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

남자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유는 그가 시전한 마법 때문이었다.

교감을 이룬 개체와 시야를 공유하는 이 마법은 엄청난 마력과 심력을 소모하는 고위 정신계 술법이었다.

“좀 더 쉬어.”

여인은 남자를 향해 휴식을 권유했다.

“아니,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점프하신다면 금방 도착하실 거야.”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일단 소감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우아아아아아악!”

긴말이 필요 없다.

이것이 진실이니까.

거기에 뭔가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지금 나의 심경은 딱 저런 상태다.

왜냐고?

그야 하늘을 날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나.

그것도 시커먼 몬스터 등에 올라타 대롱대롱 매달린 채.

푸르고 드높은 창공을…….

“시바아아아알―!”

맹렬한 속도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야 이 시키야! 올라가!”

기겁을 하며 소리쳐 보지만 소용없다.

무게를 못 이긴 레서 가고일은 지면을 향해 날고 있었다.

푸득― 푸득―

분명히 날갯짓도 하고 있는데.

키르르르르륵!

이렇게 힘차게 갸르릉 거리는데.

녀석은 바닥으로 향할 뿐, 좀처럼 고도를 높이지 못했다.

이것은 앞서가는 빅터의 상황도 마찬가지.

날갯짓은 요란한데 고도는 계속해 떨어지고 있었다.

즉!

아까도 말했지만!

“이거 추락하는 거 맞죠?!”

우리는 지옥행 몬스터에 나란히 몸을 실은 것이다.

“하하하! 그래 맞다!”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말이다.

“이게 웃을 일이냐고요!”

나는 치미는 욕지길 삼키며 빅터에게 소리쳤다.

‘하하하’라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죽음을 앞두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다.

“걱정 말고 따라와라!”

하나 빅터는 더욱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에 초탈한 모습.

확실히 8성쯤 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나 보다.

“저 앞에 있는 언덕이 보이느냐?!”

“네!”

빅터는 길게 뻗은 능선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에 내릴 테니 준비해라!”

“뭐라고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하늘을 날든, 땅에 처박히든, 이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닌 상황이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니, 말을 들어야 내리든가 말든가하죠!”

이놈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배운 거라곤 좌우로 기울이는 방법뿐, 내 역할은 매달리는 것이 전부였다.

한데 갑자기 착지라니.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냥 뛰어내리면 된다!”

“돌았나…….”

나는 진심을 담아 낮게 중얼거렸다.

“안 들린다! 뭐라고 한 게냐?!”

“좋은 생각이네요! 아주 좋아요!”

재차 들려오는 빅터의 말에 나는 완벽한 거짓을 담아 크게 외쳤다.

― 거 죽기 딱 좋은 생각이군요!

라고 말할 순 없잖은가.

“그냥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하면 된다!”

“아, 예…….”

빅터의 가벼운 대답에 나는 영혼 없는 말로 대꾸했다.

왜냐고?

이러나저러나 망한 것 같으니까.

고도는 자꾸 떨어지는데 말도 안 되는 착지를 시도해야 한다.

게다가 다루기 힘든 이 녀석은 더 이상 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결론은 각자도생이다.

남은 건 어디쯤에서 이 미친 짓을 시도할지가 관건인데.

‘저 경사로인가.’

빅터가 말한 능선 너머로 완만한 경사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짙푸른 녹음이 가득한 목초 지대.

대충 보아하니 저곳이 목적지다.

키리리리리릭―

내 생각에 동조하듯 레서 가고일이 크게 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저 영감이 뭐하는 거야?”

빅터와 그의 가고일은 내리꽂히듯 지상을 향하고 있었다.

“어, 어어어어어어어어!”

그 모습이 위태로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저대로 가다간 능선 오르막에 들이박게 생겼다.

아니, 확정이다.

이 속도에 이 높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없어야 하는데…….

“뭐야 저게?!”

빅터와 그의 레서 가고일은 급격하게 위로 떠올랐다.

튕겨졌다가 바른 표현일까?

충돌을 앞둔 그들의 비행은 무언가에 밀려 급상승했다.

기이할 정도로 빠르고 가파르게.

지켜보던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 역시 튕겨져 오르듯 허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바람.

능선에 부딪친 기류가 급격하게 상승하며 나와 가고일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정신, 정신 차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나의 눈은 빅터를 쫒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앞서간 그들의 모습이 능선을 넘어서던 순간을.

키르르르르르륵―

긴 울음과 함께 레서 가고일은 더욱 높이 솟아올랐고.

“허…….”

빅터는 미끄럼을 타듯 푸른 풀밭으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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