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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26화 (26/203)

26화

와…….

이거 뭐지?

들이치는 골렘의 공격에 세상이 춤을 추었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

동공에 지진이 난다는 건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장난 아니네.’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해머를 휘두르며 맞서는 것이 아닌 맨몸으로 막아 내는 것.

굳이 비유하자면 맨땅에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부우욱― 콰아앙!

휘둘려 오는 주먹을 두 팔로 가로막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둔탁한 소리.

퍽퍽도 아니고, 무려 ‘콰아앙’이다.

이게 정녕 사람 몸에서 날 소리란 말인가?

덕분에 난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

‘로렐라 할머니가 웃고 있었지…….’

작년에 돌아가신 이웃집 할머니였다.

인자한 성품으로 늘 따듯하게 대해 주던 착한사람.

그런 그녀가 방긋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어서 오라고.

빨리 오라고.

쉽게 말해 죽을 뻔했다…….

골렘의 주먹이 오갈 때마다 나는 저승 문턱을 넘나들었고, 그리운 추억 속 망자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눠야 했다.

‘안 되겠다. 해머가 필요해.’

더 이상은 무리다.

무작정 버티는 것도 이젠 한계.

준비되지 않은 몸은 부서질 지경이었고, 그 위기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늦기 전에 해머를 받아야 한다.

받아야 하는데…….

‘어디로 간 거야?’

정작 빅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해머의 행방도 묘연해졌으니.

‘염병.’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도망이다.

부우욱!

휘둘러 오는 놈의 주먹을 피해 상체를 바짝 낮추었다.

그대로 녀석의 하체로 돌진.

놈의 다리를 붙잡아 있는 힘껏 뽑아 들었다.

쿠우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골렘은 뒤로 넘어졌고.

“튀어!”

나는 빅터가 있던 숲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제발 놈의 발이 느리길.

이대로 놈의 시야에서 사라지길.

드드드드드득―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를 흘리며, 나는 눈앞의 보이는 숲을 향해 쏘아지듯 몸을 날렸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며 놈의 상황을 주시했다.

‘원 상태로 돌아가는 건가.’

골렘의 형태는 다시 암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흔한 돌무더기.

녀석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

안전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두 팔을 살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보랏빛 자국.

검붉은 피멍으로 가득한 팔뚝은 신기할 만큼 부어 있었다.

“젠장.”

이것을 누가 산사람의 팔이라 하겠나.

누가 봐도 죽은 이의 팔뚝처럼 보이겠지.

“쯧…….”

얼굴을 구기며 쓰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단련은커녕 움직이지도 못할 판이다.

나는 구시렁거리며 대짜로 누워 버렸고,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며 감은 눈을 다시 떴다.

“오지게 두들겨 맞았구나.”

익숙한 음성과 함께 사라졌던 빅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다녀온 거예요?”

“어디긴, 녀석아. 네놈 죽을까 봐 이것저것 주워 왔다.”

툴툴거린 빅터는 들고 온 걸 쏟아부었다.

이름 모를 들풀과 정체 모를 여러 곤충들. 거기에 괴상한 냄새가 나는 진득한 무엇까지.

“아우, 냄새… 이게 다 뭐예요?”

“타박상에 좋은 특효 약제다.”

내가 정색을 하며 묻자, 빅터는 이것을 약제라 소개했다.

짓이기고, 갈고, 뒤섞길 수어 차례.

빅터는 완성된 연고를 들어 나의 상처에 치덕치덕 덧발랐다.

“오… 이거 굉장히 시원한데요?”

효과는 둘째 치고, 환부가 시원해서 좋았다.

욱신거리며 달아오르던 열기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저릿하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어떠냐?”

“끝내주네요.”

나는 휘둥그레 눈을 뜨며 얼룩진 환부를 살폈다.

점차 본연의 색을 찾아오는 보랏빛 피멍 자국들.

역한 냄새만큼 효과도 발군이었다.

“보통 몇 시간은 지나야 하는데, 네놈은 벌써 효과가 나오는구나.”

연고를 챙기던 빅터의 표정이 이채롭게 빛났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경이로운 회복력.

빅터가 만든 특제 연고와 내 몸의 조합은 사기 같은 성능으로 상처를 지워 나갔다.

“이거 성분이 뭐예요?”

“음… 일단 화살촉 도마뱀의 항문과 시체놀래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됐어요. 다 들은 걸로 할게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

효과는 증명됐으니까.

“조금 더 쉬다가 한 번 더 발라 보자.”

빅터의 제안을 끝으로 나는 다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빛.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을 느끼며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한데 백작님께선 어디로 가셨을까요?”

“언제 목적지를 말하고 나가셨답니까.”

“그렇지만 이번엔 좀…….”

아케른에 위치한 빅터의 성.

회의 중인 부관들은 각자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나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추측뿐.

확신 없는 대화에 서서히 지쳐 가는 모습이었다.

“아마 리베로 가셨을 겁니다. 이전에 하신 말씀이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조만간 연락이 오겠네요. 지금쯤이면 리베에 서신이 당도했을 거고…….”

“그 즉시 알바트로스 날려 정찰을 시도했을 겁니다.”

자리에 있는 부관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바트로스가 날아올랐다면 빅터의 발견은 시간문제기 때문이다.

탐색을 목적으로 훈련된 저 새는 주인과 시야를 공유해 지상의 상황을 알려준다.

참으로 유용한 이 능력은 오로지 브라함, 그것도 빅터의 가신에게만 있는 귀중한 능력이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가셨냐는 건데.

리베가 목적지라면 빅터의 선택은 이것뿐이다.

“대수림 어딘가에 계실까요?”

마경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 외의 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렇겠지요. 다른 루트를 지나는 건 부담이 크니까요.”

그러니 결국 알 수밖에 없다.

리베에서 띄운 알바트로스는 대수림으로 향할 것이고, 그것을 발견한 빅터는 이상 징후를 눈치챌 것이다.

“슬슬 연락이 오겠군요.”

“늦지 않길 바랄뿐이죠.”

회의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팽팽했다.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신.

찬탈자 데드릭 폰 케이사르의 성정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견제가 심해졌는데 괜한 빌미를 주는 게 아닌가 싶군요.”

“어쩔 수 없지요. 백작님께서 입궁을 안 하시는 이유는 다들 아시잖습니까.”

“그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차라리 총사령관 자리를 수락하셔서 견제의 끈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빅터 크로제의 총사령관 재부임.

이것에 대한 가신들의 의견은 같지만 달랐다.

“계속 외면할 수는 없지요. 하나 그 의도가 빤한 게 문제입니다. 관직은 핑계일 뿐, 곁에 두고 통제하려는 수작이니까요.”

사실 빅터는 몇 차례나 이 제안을 거절했다.

명분은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였지만.

“황제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거절을 하더라도 입궁을 하셔서 거절해야 합니다.”

황제와 빅터의 입장은 계속된 평행선이었다.

“한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검성의 아들 말입니다. 고작 1년 만에 5성에서 7성 초입에 올랐다고 했잖습니까.”

“글쎄요. 황궁에서 나온 칙사의 말이니 허언은 아니겠지요.”

“그것도 걱정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조만간 부모의 원수를 외치며 달려들지도 모르겠군요.”

농담 같은 그의 말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 * *

“아우, 왜 그렇게 꾹꾹 눌러요. 그냥 살살 발라 줘요.”

“이래야 근육 깊숙이 스미는 게다. 잔소리 말고 팔 내밀어라.”

구시렁거리는 나를 붙잡아 빅터는 정성스레 연고를 발랐다.

만신창이였다.

골렘의 공격을 받아 내던 몸은 지워지는 멍과 새로 생긴 멍으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제법 버티는 것 같더구나.”

“기절은 안 하죠.”

여전히 한 방, 한 방이 버겁기는 하지만, 그래도 달라진 건 하나 있었다.

최소한 눈앞이 흔들리는 일은 없다는 것.

하나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나의 근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남들과 다르다고 할지언정,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그들과 다르지 않으니까.

“아 씁!”

다시 말해 아플 땐 아프고, 괴로울 땐 괴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엄살 부리지 마라.”

바로 이 영감탱이처럼 말이다.

빅터는 골렘을 향해 나의 등을 떠밀었고, 몸을 곧추세우는 골렘을 바라보며 나는 구시렁구시렁 걸음을 옮겼다.

드드드드드득―

또다시 마주한 암석 골렘.

짓쳐오는 놈의 주먹을 두 팔로 막아 냈다.

대가는 고통.

맞은 델 또 맞아서 이번엔 더욱 아팠다.

‘오러만 쓸 수 있었어도.’

이런 무식한 수련 따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우욱―

상념을 흩트리며 골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콰직!

팔뚝을 교차시켜 놈의 일격을 틀어막았다.

“크윽.”

아프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부러질 듯 아팠다.

앞전에 말은 정정해야겠다.

‘안 했을지도’가 아닌, 확실히 ‘안 한다’.

이런 발상이 가능한 건 바로 저 인간.

광기 충만한 빅터뿐이겠지.

드드드드득―

골렘이 다시 움직였다.

두 팔을 좌우로 벌려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하나 놈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조금만 쉬자.”

나는 놈의 팔을 붙잡아 가슴 앞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암석 골렘은 버둥거리며 저항하려 했다.

하나 녀석은 단단히 고정된 나의 두 팔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진정해, 인마. 나도 고생 많았다고.”

근력에 집중해 온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나는, 녀석과 머리를 마주 대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

가쁜 호흡은 서서히 제자릴 찾아갔고, 나는 놈을 밀쳐 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묵묵히 다가와 주먹을 휘두르는 암석 골렘.

쿠웅!

스며드는 고통에 저항하며 놈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쿠웅!

그리고 또다시.

쿠웅!

연속되는 골렘의 공격을 덤덤히 받아낼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시야는 한결 여유로워졌다.

충격에 적응하니, 보이는 범위가 달라진 것이다.

이를 테면 이렇게 공격을 막으면서도.

부우웅―쾅!

‘저 영감 뭘 먹는 거야.’

식사를 즐기는 빅터의 모습까지 이젠 차분히 살필 수준이 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계속되는 공방에 충격은 누적되었고.

“좀 이따 다시 하자.”

나는 덤벼드는 골렘을 자빠뜨린 뒤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빅터가 연고를 들고 다가왔다.

“가드가 단단해진 게 여기서 봐도 알겠더구나.”

빅터는 상흔에 연고를 바르며 나의 훈련을 평가했다.

“그런 것 같네요.”

나는 짙은 멍 자국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고생한 대가를 얻는 기분이랄까.

변해 가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뿌듯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가드를 내려라.”

하나 빅터는 이런 헛소릴 지껄였다.

“네? 누구 죽는 꼴을 보려고 가드를 내리래요?!”

정색하는 나를 보며 빅터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주위를 살펴 막대기를 집어 들더니.

“덤벼라.”

난대 없이 대련을 신청했다.

“진짜로요?”

“그래, 진짜로 덤벼라.”

하여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저 영감이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손속 없는 묵색의 해머는 가속을 시작했다.

“좋은 기세구나.”

빅터의 작은 막대가 가볍게 회전하자, 휘두르던 거대한 해머가 힘없이 빗겨 나갔다,

‘응?’

그렇게 훤히 드러난 나의 복부를 향해 빅터의 주먹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크허억!”

창자가 꼬여 드는 고통에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고.

툭.

빅터의 작은 막대가 나의 목을 짓눌렀다.

“손에 쥔 무기만이 싸움의 끝은 아니다.”

막대를 거둔 빅터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네놈이 해 봐라.”

배배 꼬이는 몸을 억지로 세워 빅터를 마주 보았다.

어설프게 날아오는 조잡한 나무 막대.

가볍게 처낸 나는 빅터의 복부로 주먹을 날렸다.

하나 돌아온 건 무심한 빅터의 얼굴뿐.

“이게 최선이냐?”

사선을 그은 막대는 날카롭게 나의 목을 파고들었다.

“하아…….”

옅은 탄식을 뱉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고, 빅터는 허탈한 나를 향해 뜻 모를 말을 서두로 꺼냈다.

“아주 불편하고, 원시적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가감 없는 진실.

“오러가 없는 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다. 직접 근력을 키우고, 두들겨 맞으며 맷집을 올리는 거지.”

“…….”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 혹독하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가혹한 방법으로.

“오러만 있다면 아주 간단했을 걸 말이다.”

이어진 그의 말에 난 쓰게 웃고 말았다.

사실이니까.

이미 말했듯, 타고난 신체와 오러 사용은 별개인 것이다.

그저 시작점이 다를 뿐.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빅터는 분위기를 바꾸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역사상 가장 강했던 남자는 그렇게 오러를 넘어 섰다.”

“진이라는…….”

“그래. 너와 비슷한 점이 많았던 사내였지.”

잠시 아련해진 빅터는 표정을 다잡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수련들은… 가장 위대했던 남자가 해 온 수련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네가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르지.”

“…….”

“말이 없는 걸 보니 감동했구나, 녀석.”

빅터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지만…….

내가 지금 감동받고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건 또 뭐야?’

조금 전부터 떠다니고 있는 새로운 문자.

[충격 내성이 발현되었습니다.]

죽도록 얻어터진 보람이 이제야 생겼기 때문이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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