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25화 (25/203)

25화

2일째 굶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이제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고, 잡히면 이빨 빼곤 모조리 씹어 먹을 기세다.

“포기하지 마라.”

한데 우리의 빅터 영감은 이런 속편한 소리만 하고 있다.

“지금이 가장 크게 성장할 때다.”

아니, 지금은 죽기 직전이다.

살아 있어야 성장이든 뭐든 할 것 아니겠나.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는데 성장은 무슨 얼어 죽을…….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 할 말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뭐라 따질 수도 없다.

‘독한 영감탱이.’

빅터 역시 함께 굶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수련의 성취도와 처절함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굳이 배까지 곯아 가면서 몰아붙이는 게 효과가 있는 건가.

머릿속 가득 떠오른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해 보자면.

‘처음엔 그랬지.’

시작은 좋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회의가 들지만, 처음에는 의욕적이었다.

수련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으니까.

당연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슈아아악―

쾅!

하지만 실패는 계속되었고,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꾸르르르륵?

놓치고.

꾹꾹… 꾸르르르끼긱?!

또 놓쳤다.

이제 기력이 딸려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겠다.

“아우!”

사실 속도는 얼추 따라잡았다.

문제는 방향 전환.

움직임 자체가 워낙 변칙적이고 급격하다 보니, 내지르는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놈들도 오러를 사용한다.

정확하게는 비슷한 무엇인데, 그로 인해 놈들은 발군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이것들이!”

독하게 마음먹고 다시 한번 몰아쳤다.

가는 길을 막아서며 이리저리 몰고 다니길 수십여 분.

멍청한 굴담비 하나가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크흐흐흐…….”

나는 탐욕스런 웃음을 흘리며 놈에게 다가섰다.

방어구 따위 아무렴 어떤가.

그까짓 가죽 나부랭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움직이지 마라, 고기야.”

그저 필요한 건 한줌의 고깃덩이와 기분 좋은 포만감뿐.

갈팡질팡하는 굴담비를 향해 나는 커다란 해머를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키르르르르륵…….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등 뒤로 다가왔다.

“뭐, 뭐야?”

나는 뒷걸음을 치며 놈을 바라보았고.

“아, 말해 준다는 걸 깜박했구나. 어미 굴담비다.”

빅터는 별거 아니라는 듯 녀석의 정체를 알려 왔다.

“어미라고요? 종자가 아예 다른데요?”

굴담비.

굴…….

예상하건데 작은 땅굴에서 살기 때문에 굴담비라 명명됐을 것이다.

그런데 저 어미의 크기는 뭐란 말인가.

“이반.”

“네?”

“하나 더 빼먹었는데… 어미는 꽤나 공격적이란다. 그리고 오러의 양도 꽤 되지.”

아, 그렇군요.

그래서 저렇게 이를 드러내며 침을 뚝뚝 흘리는 거군요.

할 말을 마친 빅터는 팔베개를 하고 돌아누웠다.

“염병…….”

어찌 저리 태평할까.

저 인간은 배도 안 고프나?

8성쯤 되면 음식 없어도 끄떡없고, 잠 한숨 못자도 멀쩡하고 그런가 보다.

하다못해 심심해서라도 움직일 법한데, 빅터는 이틀째 요지부동이었다.

‘설마 등 돌리고 몰래 먹나?’

그럴지도 모른다.

저 영감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어쨌거나.

께르르르륵―

귓가를 찌르는 기묘한 울음소리에 나의 시선은 어미에게로 돌아왔다.

마치 커다란 맹수를 마주한 느낌.

‘그래, 차라리 덤벼라.’

나는 굴담비 어미를 바라보며 해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 *

일단 결론부터 말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살나고 있는 중이다.

‘까다롭네.’

속수무책이랄까.

목숨이 위태롭진 않으나, 놈의 공격에 번번이 당하고 있었다.

공격과 도주를 반복하는데,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하는 것이다.

“멍청한 놈.”

보다 못한 빅터가 결국 한마디 보탰다.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는데.

뭘 해도 짜증만 나는데.

“속도만 빨라지면 뭐하냐.”

저렇게 앉아서 사람 속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사전 동작을 잡아내질 못하니, 계속 놓치고 반격도 못하는 것 아니냐. 날 잡아 잡숴 하는데 그걸 눈뜨고 놔주다니 쯧쯧…….”

빅터는 혀를 차며 다시 돌아누웠다.

말을 시작했으면 확실하게 알려 주던가.

‘사람 열 받게…….’

자기 할 말만 다하고 모른 척 돌아누웠다.

하지만 빅터의 저런 말 뒤엔 항상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사전 동작이라고?’

이런 생소한 지적이 그런 것이다.

종횡무진하는 놈을 보며 유심히 살폈다.

숨어 있는 작은 단서.

동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힌트.

나의 눈은 시간을 쪼개며 녀석의 움직임을 쫓기 시작했다.

‘그때도 그랬었지.’

로우를 만났던 그날에도 상황은 오늘과 비슷했다.

동굴 앞에서 살해당했던 그날.

어설프던 나는 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놈의 공격이 시작되면 그제야 좇기 시작했고, 한 박자 늦은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혹독하고 끔찍한 죽음.

이대로 계속된다면, 그날의 기억이 반복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수를 내야 한다.

이런 덩치 큰 족제비에게 죽을 순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디냐.’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놈의 습관을 찾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드는 머리?

아니다.

그러면 상체를 비트는 저 움직임인가?

역시 아닌 것 같다.

뭘까? 사전 동작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단어의 뜻마저 헛갈리고 모호해질 때쯤.

‘찾았다!’

나는 녀석의 작은 습관을 잡아냈다.

이것으로 전세 역전.

해머를 고쳐 쥔 나는 놈을 향해 달려 나갔다.

키륵?

처음 접하는 나의 공격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경계했다.

물론 공격은 빗나갔고, 녀석은 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자, 여기서 부터가 진짜다.

나의 자극에 놈은 반응할 것이고, 그때가 녀석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케르르르르…….

낮게 깔리는 울음과 함께 녀석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제 곧 다시 움직일 터.

‘…….’

마주선 녀석의 체중이 좌측으로 실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이제 곧 녀석은 반대편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나는 내려잡은 해머를 끌어 올렸고.

‘걸렸어.’

어미는 예상한 방향으로 은빛 몸을 날렸다.

때를 맞춰 쏘아지는 묵색의 해머.

부아아악― 쾅!

굴담비의 어미는 형체를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와하하하하하하!”

이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라니!

놈들의 특징은 체중 이동을 통한 급격한 방향 전환이었다.

먼저 실리는 체중의 방향만 파악하면.

“크하하하하하!”

놈들이 지나갈 곳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젠 끝났다.

“다 뒈졌어.”

껍질을 홀랑 벗겨 자글자글 구워 먹어 주마.

* * *

“사마르 님 브라함 흑마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브라함에서?”

“네.”

소식을 전한 남자는 들고 온 서신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한걸음 물러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놓인 키 작은 남자.

호리호리한 체격에 뒤로 묶은 흑발이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오래간만이군.”

창가를 향해 뒷짐을 진 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책상으로 향했다.

노인과 중년의 어디쯤일까.

적당히 나이 든 얼굴의 사마르는 느긋한 손길로 편지를 주워 들었다.

“마법이군.”

여백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며 사마르는 또 다른 마법을 더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감춰진 글자.

사마르는 덤덤하게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분이십니까?”

“그래.”

“오래간만에 연락을 주셨군요.”

“그렇구나.”

사마르는 감정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한데 어인 일이실까요. 이런 식의 연통은 좀처럼 하지 않는 분이신데.”

“능력이 전이될 수 있는지 묻는구나.”

“능력이라시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거다.”

사마르는 편지를 들어 불을 붙였다.

편지는 한순간에 불타올랐고.

“이번 의식은 이쪽에서 진행하자고 하는구나.”

붉은 파편만이 남아 허공에 흩어졌다.

* * *

“와하하하하!”

빠악―

“캬하하하하!”

꾸에에엑―

보다시피 이곳은 학살의 현장이 돼가고 있다.

“그만 잡아, 이 녀석아. 이미 많이 모았잖느냐.”

가죽은 이제 상관없다.

이미 어미의 가죽을 얻었으니까.

하나 여전히 나의 사냥은 계속되고 있었다.

“수련 중입니다!”

수련은 개뿔, 이틀간 당한 게 분해서 이런다.

이놈들에게 놀림당한 걸 생각하면 씨를 말려도 부족하다.

‘장난 아니었지.’

심지어 눈을 마주 보며 응가하는 녀석도 있었다.

뾰족한 주둥이는 왜 그리도 씰룩대던지.

크윽…….

생각만 해도 열이 받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그 정도면 됐다. 이젠 수련 상대도 안 되겠구나.”

만류하는 빅터의 말에 나는 잠시 해머를 내려놓았다.

께르르르르…….

멀찌감치 떨어진 녀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씰룩거리는 얄미운 주둥이들.

“뒈졌……!”

나의 해머는 또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그만해!”

참다못한 빅터에 의해 비로소 나의 광기는 끝이 났다.

덕분에 고기와 가죽이 제법 많아졌지만.

“몇 개만 챙기고, 나머진 버려라.”

“아깝게 왜 버려요. 팔면 다 돈인데.”

“저걸 다 들고 갈 셈이냐?”

“흐음.”

둘러보니 상황이 좀 그렇다.

서식지를 전멸시키는 바람에 쌓여 있는 사체는 이미 작은 동산을 이룰 지경이다.

“네놈이 쓸 거 모았으면 나머진 버려, 다 쓸데없는 짐이다.”

하여 어미의 가죽과 새끼의 가죽 몇 장을 챙겨 우린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굴담비 서식지를 떠난 우리는 반나절을 더 깊이 들어갔다.

자라는 수목들이 형태와 종류를 바꾸기 시작했고, 어느덧 풍경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스승님.”

“왜 그러느냐.”

길을 걷던 나는 궁극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동기라고 해야 할까?

이 여행의 종착지와 이유에 대한 의문이었다.

“리베에 가는 이유가 뭔가요?”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이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제 관계가 되었고, 빅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의 망가진 코어를 고치려는 것 아니냐.”

이 또한 사족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동 중에 나의 코어 상태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 리베에 도착해 치료사를 찾는다 한들, 그것은 부수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겸해서 하는 일이고요. 본래 가시려던 목적이 궁금한 거죠.”

“사람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빅터의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사람이요?”

“그래. 한 시대를 풍미했고, 또한 끝을 낸 인물이지.”

“아…….”

수수께끼 같은 빅터의 답변에 짙은 호기심이 발동하던 찰나.

“다 온 것 같구나.”

우리의 문답은 끝을 맺었고, 나의 호기심은 후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움푹 파인 분지 앞에 선 나는, 늘어선 기암괴석들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암반이 통째로 뜯겨 나간다면 이런 모습일까?

두리번대는 나를 향해 빅터는 요상한 질문을 던졌다.

“근력을 키우고, 순발력을 올렸으니 이제 뭐가 남았겠느냐.”

“글쎄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알면 스승이 왜 필요하겠나. 나의 대답은 당연히 모르쇠였다.

“내구력이다.”

“내구력이요?”

그에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근육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 녀석인지 네놈은 모를 게다.”

“뭐, 아직은 그렇죠.”

“두껍고 단단한 근육은 천연의 방어구이자 최후의 무구이지.”

“…….”

싸해지는 느낌에 나는 대답을 멈췄다.

이거 촉이 온다.

광기 충만한 사람인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지 않다.

“그래,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 단단함이다. 신기한 건, 반복되는 충격으로도 단련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충격이니 뭐니, 단어 선택 자체가 이상하단 얘기다…….

“해머는 거기 놔두 거라.”

거기에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까지.

해머를 내려놓자 빅터는 냉큼 들고 숲으로 걸어갔다.

“…….”

계속 간다.

“…….”

쭉쭉.

“…….”

더 멀리.

“…….”

계속 멀리.

“뒤를 봐라!”

그러곤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뒤를 보라고?’

그렇게 돌아본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야 이건?”

골렘이 생성되는 신비한 과정을 말이다.

쿠우우우우우―

사방을 가득 매운 시커먼 암석이 꿈틀거리며 일어섰고.

“이반!”

빅터는 내 이름을 부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때려잡는 거다!”

“뭐라고요?!”

“쳐 죽이라고!”

그렇게 빅터는 참신한 헛소릴 지껄이며 총총히 숲으로 사라졌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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