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람의 삶에 있어 닷새가 주는 영향력이 얼마나 될까.
보통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시간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크워워워어어!
세상에는 늘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부아아아아악―
콰드득!
고작 5일 만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사람.
예를 들자면.
“하아…….”
“아가씨 침 떨어져요.”
나 같은 별종들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잣대론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들.
소위 천재라는 종자들이다.
그런 내게 필요한 동작은 단지 하나였다.
그저 내려치기 한 방.
그 하나로 모든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좋았어.’
고블린 로드는 곤죽이 되었고, 나의 손에는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대박… 도로시 봤어? 딱 한 방이야 그치?”
“네. 심지어 제자리에 서 계셨죠.”
로제와 그녀의 몸종 도로시는 나의 모습을 쫒으며 두런거렸다.
깍지 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생일 선물을 앞둔 아이처럼 구슬 같은 눈을 반짝였다.
‘아흠…….’
민망함에 마른침이 넘어간다.
부담스럽고, 창피하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게, 저런 모습으로 바라보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사님, 존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다가온 로제는 눈을 빛내며 나의 이름을 물었다.
‘흐음.’
바로 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이름만 말하라는 것이 아니니까.
지난 경험상 이것은 내가 아닌 가문의 소개였다.
일반인들끼리의 대화가 아닌 귀족의 예법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저의 이름은 이반. 로제 님 뒤에 오시는 저분의 제자입니다.”
“뒤에요?”
로제와 도로시는 고개를 돌렸고.
“8성의 오러 마스터 빅터 크로제 님입니다.”
나는 빅터의 신분을 앞세웠다.
* * *
“이쪽은 로제 양이십니다.”
간략한 나의 소개 이후 도로시가 뒤를 이어받았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아리안 왕국의 고귀한 혈통이자 풍요의 땅 카슈타르의 주인,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님의 하나뿐인 영애, 로제 데 카슈타르이십니다.”
몸종의 소개에 로제는 사뿐히 예를 갖췄다.
이어지는 대화는 이전과 같았다.
서로를 띄워 주는 인사 치례나 로제가 뿌리고 있던 향수 이야기 등등.
참고로 향수 이름은 쿠르쿠마였고, 로제는 내게 사적인 대화를 따로 요청했다.
“이반 님, 우선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미 다 하셨는데요, 뭘.”
“아까는 형식적인 인사였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제는 정중히 감사의 예를 표했다.
“지금은 보답할 방법이 없지만… 아리안 왕국에 오시게 된다면 이걸 보여 주세요.”
로제는 펜던트를 풀러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초승달 모양에 검이 교차하는 문양.
그렇다.
카슈타르 가문의 문장이다.
“그 누가 됐든 극진히 대접할 것입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신분에 대한 아리안 왕국의 기조(基調)도 알겠고, 로제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카슈타르는 이반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릴 겁니다.”
하여 나는 훗날을 기약했고, 로제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며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홍조를 띄우는 로제.
물결처럼 찰랑이는 눈부신 금발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잠깐만요.”
하늘거리는 머리칼을 향해 나는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
“아름다운 얼굴에 방해가 돼서.”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로제의 머리칼에 붙은 이물질을 조심스레 걷어 내었다.
“어, 어머!”
이놈의 혓바닥이 오늘 날을 잡은 모양이다.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말을 꺼낸 나조차 화끈한데 듣는 이는 어땠을까.
로제의 두 손은 달아오른 뺨으로 향했고, 그녀의 푸른 눈은 갈 곳을 잃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진정한 남자가 되는 법.
“그럼 다시 뵐 때까지…….”
살포시 미련을 남기며 빅터와 나는 화전민 마을을 떠났다.
* * *
“진짜 아무렇지도 않느냐?”
“네.”
“근육통이나 뭐…….”
“전혀요.”
“흐음…….”
질문을 마친 빅터는 한숨을 내쉬며 턱 끝을 문질렀다.
“거참 희한한 녀석일세.”
그러고는 사람을 이상한 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비슷한 어휘로 대단하다, 특별하다 등이 있겠지만, 일단 나는 희한한 놈이 되었다.
“이게 쉽지 않았을 텐데.”
빅터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뭔가 서운해 하는 느낌이랄까?
예상을 벗어난 나의 모습에 빅터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망했어요?”
끙끙거려야 놀리기도 하고 가리키는 재미가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으로선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마차는 잘 굴러가고 나는 멀쩡하니까.
그러니 풀 죽을 만도 했고 뾰로통한 저 표정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내 입장은 좀 다르지.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이만큼 왔고, 이렇게 강해진 거니까.
“뭐가 말이냐?”
“저를 택해 줘서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싱거운 놈.”
그런 나의 뜬금없는 고백에 빅터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게 이어지는 기분 좋은 침묵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호젓한 길을 따라 느긋하게 달려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후의 햇살이 긴 꼬리를 이으며 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맘 때쯤.
『시작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가짜 시작의 마을에 도착해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완벽한 자유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게 다 뭐냐?”
“뭐긴요. 골드잖아요.”
이렇게 말이다.
나는 굴러다니는 골드를 모아 빅터에게 내밀었다.
정확하게 10골드.
지난번과 다름없이 빅터는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게냐?”
“빌린 돈을 갚는 겁니다.”
“허허… 이 녀석이.”
빅터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화를 바라봤다.
“난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건만.”
이 말마저 똑같이 하는 걸 보니 정말 받을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러니 더욱 돌려주고 싶었다.
종속되지 않는 삶을 위한 입장 정리뿐만 아니라, 빅터의 마음에도 보답하고 싶었다.
“받으세요.”
“그래 좋다. 그 대신.”
내밀어진 골드를 받으며 빅터는 한 가지 제안을 꺼내 들었다.
“너의 후견인이 되어 주마.”
귓구멍이 의심되는 놀라운 이야기.
“예?”
그에 나는 얼빵한 소릴 내며 애먼 눈을 깜빡거렸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면 말이다.”
브라함 제국의 변경백이자 8성의 오러 마스터.
그러한 사람이 나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제가 사고치고 다니면 어쩌려고요.”
물론 여행 이후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스승과 제자에서 후견인으로 바뀌었다.
즉, 빅터와 나의 관계는 더욱 곤고해졌다는 것이다.
“사고 칠 자리는 알아봐 줄 테니 걱정 말거라.”
“그렇다면야… 좋아요. 그 후견인 받아들이죠.”
“건방진 놈.”
쓰게 웃은 빅터는 잔을 들어 호쾌하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빈 잔을 나에게 넘겼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귀찮다고나 하지 마세요.”
가득 채워진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청량감.
깨끗하게 비워진 잔을 다시 빅터에게 내밀었다.
“술 잘 드시죠?”
“가소롭구나.”
빅터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테이블에 바짝 붙었다.
“덤벼라 애송아.”
이어지는 빅터의 도발에 나 역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고로 남자란 세 가지를 함께하면 평생을 간다고 했다. 들어는 봤느냐?”
“그거 모르는 남자도 있답니까.”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듣던 말이다.
같은 지붕 아래 잠을 청하고, 목숨을 건 싸움을 나누며, 승리의 잔을 함께 마신다.
오늘 우리는 그 세 가지를 모두 이루었다.
“꺾어 마시면 지는 겁니다.”
“바닥 남겨도 지는 거다.”
테이블 위에 술병은 끝없이 쌓여 갔고, 두 남자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 * *
“카이 형제의 소식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로이드는 낮게 대답했다.
둔중한 단풍나무 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감색 로브의 남자는 발소리를 죽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이 형제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네. 한데 그게…….”
또 무슨 비보이기에 이렇듯 말을 아끼는 걸까.
로이드는 치솟는 짜증을 감추며 말없이 바라보았다.
“카이 형제가 당했다고 합니다.”
“당했다?”
“사망했다고 합니다.”
대답하기를 포기한 건지, 로이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응을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카이 형제가 다?”
“네.”
“빅터인가?”
“빅터 크로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왔다 갔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아니다. 내가 실언을 한 듯하구나. 계속해 보아라.”
감색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조아린 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카이 형제가 당한 자리에 다른 사람도 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시신이 다른 무기에 당했다고 합니다.”
로이드는 가볍게 끄덕이며 생각의 범위를 넓혔다.
‘두 개의 다른 무기라.’
딱히 새삼스러울 것 없는 보고였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하나는 빅터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달의 원흉인 놈이다.
그래서 카이 형제를 서둘러 보냈는데.
‘죽었다고?’
돌아온 답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가능했다.
빅터와 신원 미상의 놈 역시 무기를 다룬다.
결국 오러 사용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런 그들에게 있어 카이 형제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일 터였다.
형인 레이는 오러를 제거한다.
그러면서 본인은 5성에 필적하는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결과는 어찌 되겠나.
8성의 오러 마스터라고 한들,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면 3성의 상급 기사일 뿐이다.
거기가 인간의 한계니까.
당연히 레이의 압승이다.
하나 100번을 양보해 레이가 졌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우가 있으니까.’
녀석이 가진 이능력은 신체 강화.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6성에 준하는 육체로 변신한다.
레이가 오러를 제거하면, 로우가 목숨을 취해 온다.
필승 공식이자 완벽한 조합이다.
오러 사용자가 이들 형제를 이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데 죽었다.
두 녀석 모두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다.
‘놈은 엄청난 육체를 가지고 있다.’
레이는 물론이고, 로우와도 필적할 신체 능력.
오러가 없이도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로이드는 펜을 들어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완성된 편지 위로 마법이 시전되었고, 편지 위의 글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을 사라센 흑마탑으로 보내라.”
편지를 받아 든 감색 로브의 사내는 미끄러지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 * *
“여길 통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말씀하세요.”
“첫 번째는 몬스터를 정리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다시 도착한 대수림의 입구.
빅터는 협곡 앞에 서서 통과 방법을 설명했다.
개체가 약하니 정석으로 정리해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냥 달리시죠.”
나는 화끈한 방법을 제시했다.
“달리자고?”
“그렇게 하실 거잖아요.”
어차피 달릴 거 뭐 하러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저 영감의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 회 차의 그는 지옥행을 선택했고.
― 이럴 거면 의논은 뭐 하러했어요?!
― 그냥 가자니 허전해서 한 게다. 정신 차리고 앞이나 살펴라.
이딴 소릴 지껄이던 영감이다.
하지만 이번엔 입장이 바뀌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달리자는 나의 말에 빅터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이유야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그게 빠르잖아요.”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되면 빠르게 지나가겠지만, 꼬이면 죽을 수도 있다.”
“별걱정을 다하시네.”
나는 해머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절벽 가득히 보이는 늑대인간의 보금자리.
“원래 똥개는 줘 패면서 길들이는 겁니다.”
길게 늘어선 놈들을 향해 나는 사납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