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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22화 (22/203)

22화

슈우욱― 쾅! 쾅! 쾅! 쾅!

부러진 레이의 세검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녀석의 검과 맞닿을 때마다 묘한 파장이 생기는 것이, 놈이 말한 기술이라는 게 저것이 아닌가 싶다.

‘오러를 사라지게 한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녀석이야 말로 세계관 최강에 오를 자격이 있는 놈이다.

상대는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정작 자신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하고 이기적인 기술이 아닌가.

오러 사용자에겐 저승사자 같은 놈인 것이다.

하지만 하늘 위엔 늘 또 다른 하늘이 있는 법.

놈에게 있어 나의 존재는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네놈의 운을 탓해라.’

같은 오러 비사용자로서, 칼을 맞댄 레이의 신체 능력은 나보다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다.

순발력은 비슷하지만, 힘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러니 밀릴 수밖에.

방어에 급급하던 놈의 세검은 또 한 번 반으로 부러졌다.

“이런 시발…….”

놈은 헛숨을 들이키며 작은 눈을 부릅떴다.

그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해머의 그림자.

콰지직―

놈의 머리는 목덜미를 파고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거북이처럼…….

그래, 딱 그런 모습이었다.

‘…….’

늘어진 레이를 향해 한 번 더 해머를 내리쳤다.

이건 뽑혀진 데릭 이빨의 복수.

그래도 풀리지 않은 분노에 다시 한번 내리쳤다.

퍼억―

나는 그제야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빅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러 마스터 빅터 크로제의 실전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껏 보아온 빅터의 모습은 ‘적당히’라는 느낌이었다.

그저 뒤에 서서 지켜보는 방관자일 뿐, 그는 늘 한걸음 뒤에 있었다.

챙! 챙! 챙! 챙!

눈으로 쫒기 힘든 빠른 공방이 빛살처럼 지나갔다.

잔상을 남기며 폭주하는 로우와 덤덤히 받아 내는 빅터.

지켜보던 나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해졌다.

‘모습이 왜 저래?’

몬스터처럼 변해 버린 로우 때문이었다.

덩굴처럼 굴곡진 선명한 근육과 길게 늘어진 기이한 팔다리, 거기에 속도라는 장점에 힘을 덧씌운 로우는 채찍 같은 팔을 휘두르며 매섭게 빅터를 몰아세웠다.

‘흐음…….’

가해지는 공격 하나하나가 강렬하고 치명적으로 보였다.

육체적인 능력만 보자면 형인 레이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

하지만 그걸 받아 내는 빅터의 모습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이것이 진짜 빅터의 본체라는 건가.

살의를 담은 빅터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궁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보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스걱―

짧게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빅터의 검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번이었다.

그 한 번으로 로우의 두 팔은 기능을 잃어버렸다.

‘저것이 오러 블레이드인가?’

빅터의 검을 휘감은 것은 일반적인 오러가 아니었다.

실체를 이루는 검의 연장선.

얇은 피막 수준의 검기가 아닌, 애초에 궤를 달리하는 절기(絕技)였다.

“크으윽…….”

로우는 고통을 삼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으로, 놈은 악귀처럼 사납게 외치며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질렀다.

“네놈! 분명히 그때!”

빅터는 대답 대신 칼을 그었다.

후리후리한 녀석의 무릎이 반으로 갈라졌고, 놈은 볼썽사납게 고꾸라지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 그걸 느긋하게 지켜보던 빅터가 휘둘러진 검을 거두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랬지. 빅터의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 아마 소문은 그렇게 나돌았을 게다.”

“그런데 어떻게!”

갈피를 잡지 못한 로우는 악다구니로 응수했고.

“그래야 네놈들이 나타날 터.”

빅터는 담백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사주한 놈이 누구더냐.”

표정을 바꾼 빅터가 놈의 단검을 주워들었다.

“니 애비다!”

빅터는 말없이 단검을 그었다.

놈의 귀 끝에서 시작해 턱밑, 그렇게 반대쪽 귀를 지나 이마를 가로질렀다.

얼굴선을 따라 다시 돌아온 자리.

“마지막이다. 사주한 놈이 누구더냐.”

빅터의 차가운 음성이 송곳처럼 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니 애비…….”

부우욱―

로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끄어어어어어어어―”

얼굴이 가죽 째 벗겨진 그가 할 수 있는 건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뿐.

“지금 말하면 한 방에 죽여주마.”

“니… 애비…….”

빅터는 놈의 거죽을 조금씩 뜯어냈다.

내가 당한 그날처럼.

놈은 팔다리가 봉인된 채 죽어 가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봐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구냐고 물었다.”

“…….”

하찮은 마지막 떨림이 지나가고.

“지독한 놈이로군.”

로우는 입을 닫은 채 질긴 생명의 끈을 놓았다.

* * *

카이 형제를 해치운 우리는 곧장 말을, 아니, 마차를 몰아 화전민 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고블린 로드가 있어야 하는데.’

복수도 끝났겠다. 이제 필요한 건 로드의 쌈짓돈이었다.

자그마치 43골드.

23년간 이어진 빚쟁이 신세를 면하려면, 그 녀석의 존재가 매우 필요한 상황이다.

‘없으면 어떡하지.’

어쩌긴 뭘 어째, 주변 산을 발칵 뒤집어서라도 찾아야지.

고블린이 환장한다는 그거.

뭐였더라?

로제가 뿌린 그 향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살살 가, 이 녀석아! 왜 이렇게 달리는 게야!”

왜는 무슨!

43골드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여유부릴 틈이 어디 있나.

‘늦었다.’

그것도 상당히 늦었다.

회귀 전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이미 화전민을 만났어야 했고, 이쯤이면 마을로 이동하고 있을 참이다.

하나 아직 근처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성 앞마을에서 하루를 보낸 바람에 시차가 크게 생긴 탓이었다.

하여 작금의 현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위급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골드도 골드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이다.

마을 회관에 고립돼 있던 로제의 일행과 흩어져 있던 마을 남자들.

고블린 본대가 마을로 진입하는 순간, 모두가 죽은 목숨이라 봐도 무방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달리는 수밖에.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에 그냥 지나칠 순 없는 일이었다.

‘더 빨리.’

조급해지는 마음에 두 다리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의 힘이 슬슬 빠져나가던 그때.

“스승님, 저기 사람들!”

축 늘어진 화전민 무리가 굽이진 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음 급한 나는 다짜고짜 달려가 마차를 들이댔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움츠러들었다.

‘아, 멍청하긴.’

마차를 끄는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다. 한데 보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안위를 물어보니 누군들 쉽게 입을 열 수 있겠나.

화전민들은 굳게 입을 다물며 뒤로 물러섰고.

“우리 아빠 좀 구해 주세요!”

붉은 머리의 작은 꼬마가 손가락을 빨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 * *

“요령을 알려 주마.”

도착한 빅터는 고블린에 대한 기초 지식을 전달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요지는 놈들의 단순한 습성과 각자의 활동 구역 지정이었다.

그러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저는 마을로 들어갈 테니 스승님께선 외곽의 본대를 찾아봐 주세요.”

“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빅터는 반색을 하며 나의 말에 동조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흐음… 한데 고블린 사냥을 해 본 것이냐?”

“그게 중요한가요. 빨리 해치우고 사람들부터 구하죠.”

잡담은 이제 그만.

빅터의 말을 적당히 잘라 내고 나는 등을 돌려 마을로 달려갔다.

이번엔 외곽이 아닌 정문으로.

당당히 달려 들어간 나는 마주치는 고블린을 짓뭉개며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역시나 바글대는 고블린들이 보였다.

늦지 않길 바라며 회관 입구로 질주했다.

키에에엑!

로제의 향수 냄새에 미친 이놈들은 이번에도 역시 눈뜬장님이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놈들은 뇌수를 흩뿌리며 구겨지듯 사방으로 날아갔다.

콰가가가가각―

마른 모래를 갈라내듯 놈들 사이로 파고들자, 표현하기 힘든 역겨운 체취와 의미 불명의 괴성이 사위를 감쌌다.

나는 그렇게 로제가 있는 최단 거리를 찍어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다.

콰직!

콰지직!

콰득!

피륙이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귀를 찌르며 들려왔다.

하지만 없다.

내가 듣길 원하던 소리는 그 안에 없었다.

‘젠장.’

다급하게 외치는 누군가의 이름이나 날선 비명 따위들.

살아 있음을 알려 줄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늦은 건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까워지는 거리에도 그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꾸물거리는 녹색 지옥을 헤치며 옅어지는 희망을 부여잡았다.

죽었다면 이렇게 모여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살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은 없고, 고블린만 가득한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하여 소리쳤다.

“로제!”

목소리에 반응하는 놈들을 짓뭉개며 그녀와 조우했던 곳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불러본다.

“로―제!”

더욱 큰소리로 한 번 더.

“로―제!”

여전히 반응은 없었고, 녹색으로 가득한 마을 회관은 기괴한 비명으로 넘쳐났다.

키에에에엑!

크에에에엑!

쇠를 긁는 고블린의 음성이 귓가를 울리며 지나갔고.

“살려 주세요!”

무언가를 뚫고 나온 희미한 여인의 외침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해머를 움켜쥐었다.

* * *

소리의 근원지는 키 낮은 원목 장식장이었다.

장식장 앞에 놓인 세 구의 사체는 그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절절히 보여 주고 있었다.

회귀 전에 본 견습 기사 둘과 한 명의 중급 기사.

그들은 훌륭히 사선을 지켜 냈고, 덕분에 로제와 그녀의 몸종은 무사히 바깥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로제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가늘게 떨려 오는 여린 손가락.

아직 가시지 않은 죽음의 공포는 살풍경한 주변과 더해져 그녀의 낯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로제는 너덜너덜해진 모습의 기사들에게 다가가 눈을 감겨 주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묵례를 했다.

그걸 기다리던 나는 그녀의 고개가 들리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금 말을 붙였다.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지요.”

안부를 묻는 나의 말에 로제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슬슬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로제는 다시금 고갤 들어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쳤… 얼굴 웬일이니.”

그녀의 반응은 이번에도 비슷했고, 곁에 있던 몸종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아가씨!”

몸종 도로시의 정색과 함께 로제는 가볍게 상체를 숙여 정식으로 인사를 전해 왔다.

그리곤 제법 총기 어린 표정으로 한 가지 질문을 내게 던졌다.

“저희 혹시 구면이던가요?”

“아니요.”

“그러면 서로에 대해 들어 본 얘기라던가.”

“글쎄요.”

“하면 저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신 걸까요. 그 연유를 여쭤 봐도 될 런지요.”

로제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왔다.

다급해진 마음에 소리부터 질렀건만, 이제 와서 이렇게 덜미를 잡히니 딱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인생 3회 차.

“오는 길에 주민 분들에게 들었습니다.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고… 하여 저도 모르게 로제라고 부르고 말았습니다.”

“어머… 장미라니.”

“설마 이름까지 아름다우실 줄은.”

뱀 같은 혀는 제멋대로 나불거리며 여심을 흔들었고, 로제는 짙은 홍조를 띄며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녀가…….”

“로제 님 이쪽으로.”

꽁냥거리는 이런 흐름을 굳이 거절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나의 등 뒤에 돌려세웠다.

‘왔구나. 43골드.’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돈줄.

크르르르르르…….

고블린 로드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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