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21화 (21/203)

21화

“아프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라.”

“밥 잘 챙겨 먹고요.”

“굻기야 하겠냐.”

어색한 작별 인사가 오가고, 나와 데릭은 대장간을 벗어나 도로변으로 나섰다.

“조심히 잘 다녀와라.”

데릭이 전하는 마지막 당부였다.

뻣뻣한 두 남자의 이별은 이토록 담백하고 진솔했다.

“죽지 말아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전했고.

“닥쳐라.”

데릭은 진정성 가득한 말로 화답해 왔다.

“성질머리하고는… 나이 먹어서 괴팍하게 굴면 밥도 못 얻어먹어요.”

구겨진 데릭의 옷을 털며 어긋난 단추들을 바로 채웠다.

오래되어 너덜거리는 옷자락을 보자니, 노인네를 홀로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영 무거웠다.

“시끄럽다. 어서 가라.”

데릭은 나의 등을 떠밀며 이별을 재촉했다.

모든 것이 동일했다.

되돌려진 시간은 나의 기억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걱정스런 데릭은 쓰게 웃으며 돌아섰고, 꼬맹이들은 울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재회한 빅터와 함께 또다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지나간 과거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똑같은 시간들.

모두가 같았지만, 나만은 다른 모습으로 이 자리에 돌아왔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마차를 기다리던 빅터는 턱 끝을 문지르며 성문 앞을 기웃거렸다.

나의 시선은 쌓여 있는 짐 더미로 향했다.

놀랍기는커녕 반가움에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뭐 궁금한 것도 없는 게냐?”

태연한 내 모습에 오히려 빅터가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딱히 없는 것 같네요.”

“크허험…….”

빅터는 멋쩍은 얼굴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바리바리 싸 놓은 저 많은 짐을 보고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와서 놀래기엔, 나의 몸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 저기 온 것 같구나.”

제키였다.

레이에게 죽임을 당했다던 풍차주인 제키 아저씨.

내가 지켜야 할 또 다른 과거의 희생자다.

“이반? 네가 여기엔 어쩐 일이냐?”

“저도 함께 가야 해서요.”

“누구랑? 저 기사님하고 함께 간다고?”

“네. 그런데 다른 용도로 쓰일 것 같네요.”

“다른 용도라니?”

제키 아저씨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다.

마차를 끄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걸 말이다.

여하튼 제키와 빅터는 흥정에 돌입했다.

“흠… 돈이 좀 모자란데 깎아 주실 수는 없는지.”

“얼마나요?”

“1골드 정도가…….”

“어림없지요.”

빅터는 마차 값을 치르며 가격 절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마차만 따로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빅터는 말을 포기했다.

“마차만요? 안 될 거야 없습니다만,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

어쩌긴 뭘 어쩌겠는가.

“제가 끌면 되죠.”

대화에 끼어든 나는, 제키의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결해 줬다.

“네가?”

제키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빅터는 어벙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였다.

“…….”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한 빅터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저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촌놈 놀릴 생각에 아주 신났겠네.’

재갈을 물린다거나, 고삐를 채워 조정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림없지.

어리바리한 얼뜨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니까.

“가요.”

그러니 이제부턴 내가 주도한다.

“그, 그래… 한데 괜찮겠느냐?”

“이까짓 거 뭐라고.”

여전히 얼떨떨한 빅터를 태우고, 나는 마차를 몰아 성 앞 풍차까지 쾌속으로 달려갔다.

* * *

“여긴 뭐 하러 온 게냐?”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어서요.”

성 앞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사위를 둘러보았다.

“숙제라니? 무슨 볼일을 말하는 게냐?”

뭐라고 대답해야 잘했단 소문이 날까.

회귀니 어쩌니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일 테니…….

“또 다른 패거리가 온다더군요.”

나의 선택은 ‘그랬다더라’였다.

“패거리라니? 아까 그놈들을 말하는 게냐?”

“네. 놈들의 윗선이 오는 것 같습니다.”

핑계는 자연스럽게 먹혔다.

빅터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지며, 입꼬릴 살짝 끌어 올린 채 말없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어디 좋은 곳에서 기다리자꾸나.”

하여 우리는 마을 한복판에 앉아 레이와 로우의 등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또 시간이 아까워 몸을 풀고 해머를 들어 올렸다.

부우욱―

슈우욱―

[내려치기 숙련도 670/10,000]

[휘두르기 숙련도 462/10,000]

[올려치기 숙련도 104/10,000]

누적되는 숫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한 시간.

그렇게 또 한 시간.

오후의 해는 긴 그림자를 만들며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노을을 등지고 선 빅터는 그제야 나의 수련법에 관심을 드러냈다.

“휘두르는 폼이 제법이구나. 따로 사사받은 스승이 있는 게냐?”

“대장장이 보조가 어디서 배우겠어요. 그냥 흉내나 내는 거죠.”

“너 혼자 수련했다는 것이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해머를 휘둘렀다.

달리 할 말이 있겠나.

이참에 천재 소리 들으며 사는 거다.

“허허…….”

빅터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표정엔 호기심을 넘은 경탄의 감정마저 서려 있었으니.

‘당연하지.’

나의 스승이 누구였나.

8성의 오러 마스터, 시대를 대표하는 강자 빅터 크로제다.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회 차의 나는 재능 충만한 인재니까.

어쨌든 저런 모습의 빅터도 나쁘지 않았다.

“보법도 혼자?”

“그렇다니까요.”

“허허…….”

그러니 이번 회 차는 예감이 좋다.

부아아악― 쾅!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빅터 영감…….

완전히 뻑이 갔다.

시간은 계속 지나 어둠이 찾아왔고, 밀려오는 여명에 새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나의 수련은 아침이 지나도록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녀석, 밤새 한숨도 안 잔 것이냐?”

부스스 다가온 빅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을 안 자기도 했지만, 사실상 못잔 것과 마찬가지다.

이유는 하나.

[올려치기 숙련도 992/10,000]

숙련도 숫자 1,000을 향한 욕심 때문이었다.

‘거슬려.’

제각각인 숫자가 거슬렸다.

하여 가장 먼저 내려치기가 1,000이 되었고, 그 다음은 휘두르기.

자정이 넘어 시작된 올려치기는 동틀 무렵이 되자 900을 넘어섰다.

하여 대충 빅터의 말에 답한 나는 올려치기 수련을 계속했다.

992는 993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999에 이르렀다.

‘이제 하나만 더.’

그러면 모든 숙련도가 동일한 수치로 정리된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보기 좋은가.

하지만 마지막 그 하나는 끝을 보지 못했다.

“으음?”

시선을 사로잡는 두 개의 인영(人影) 때문이었다.

“어째 온 것 같구나.”

다가온 빅터는 마을 입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에 피어오르는 묘한 흥분과 설렘.

“이제야 다시 만나는구나.”

바라보던 빅터는 낮은 음성으로 뇌까리듯 말을 했다.

* * *

카이 레이와 카이 로우 형제.

빅터의 머릿속에 자리한 보기드믄 패배의 잔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승부나 다름없지만, 빅터의 입장에선 그것을 패배라고 단정 지었다.

이유는 레이의 특수한 능력.

그는 오러를 흩어 내는 신묘한 기술의 소유자였다.

‘흑마탑이 개발한 비전일까.’

레이와 로우.

이질적인 두 형제의 비기는 어느 하나 일반적이지 않았다.

형은 오러를 무마시키고, 동생은 스스로 신체를 개조했다.

이 무슨 가당치 않은 사술이란 말인가.

그들의 특별한 능력은 과거의 영웅을 떠올리게 했고, 덕분에 대결은 빅터의 완패로 막을 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오러를 사용할 수 없던 빅터는 한계가 분명한 인간 검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녀석, 이반은 상황이 다르다.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를지 모르겠으나, 오러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5성에 필적하는 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용하는 무공의 수준도 낮지 않다.

비록 세 종류 기본기에 불과하나, 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고 단단했다.

천적이다.

같은 오러 비사용자로서, 카이 형제의 천적이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 농후하다.

그러니 이번 재대결의 열쇠는 이 녀석이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네가?”

“당연하죠. 무조건 제가 죽입니다.”

이반은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아주 짓이겨 버릴 테니까.

그러곤 이를 빠득빠득 갈아대며 각오를 다잡고 있었다.

무슨 연유일까.

녀석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듯 서슬 퍼란 안광을 사납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니 기대할 수밖에.

‘이번엔 반드시 잡는다.’

번뜩이는 이반을 따라 빅터의 얼굴도 차갑게 변해 갔다.

* * *

“얼레? 이게 누구야. 당신 빅터 크로제 맞지?”

마을로 들어온 카이 형제는 빅터를 보며 휘둥그레 눈을 키웠다.

“이런 깡촌에 왜 우릴 보냈나 싶은데 말이야… 이러면 엄청난 대어를 낚는 거잖아. 안 그래? 그치 동생아?”

레이는 빈정대는 특유의 말투로 만남의 소회를 밝혔다.

8성의 오러 마스터를 앞에 두고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결착을 운운하며 세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튼 오늘은 확실하게 끝을 내자고.”

레이는 건들거리며 빅터에게로 향했다.

“거기 멈춰.”

나는 해머를 뻗어 놈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

“멀리 갈 것 없어. 내가 죽여줄 테니 거기 있으면 돼.”

서서히 치켜 올라가는 단추 구멍 같은 작은 눈.

레이의 쥐새끼 같은 얼굴이 한껏 야비하게 구겨졌다.

“날 죽인다고?”

“그래.”

“네까짓 게 감히?”

“쥐 잡는 데 무슨 귀천을 따져. 닥치고 머리나 내놔.”

나는 해머를 까딱이며 놈의 얼굴 앞을 휘저었다.

“거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남의 물건 함부로 쓰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이 아저씨야.”

녀석은 날선 세검으로 묵색의 해머를 툭툭 부딪쳐 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위는 팽팽한 긴장으로 날카롭게 채워져 가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레이는 나의 이름을 물어왔고.

“이반.”

나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좋아, 이반. 어차피 빅터 때문에 알게 되겠지만, 내가 미리 알려 줄게.”

녀석은 해머를 튕겨 내며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돌프를 어떻게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앞에서 오러를 꺼내면, 그땐 너도 죽는 거야.”

“알려 줘서 고마워.”

“그래, 진짜로 죽는다고. 오러가 휘익∼ 하고 사라지거든.”

“알았다고, 쥐새끼야. 그만 떠들고 덤벼.”

그 말을 끝으로 대치 상태는 종료되었다.

빅터는 오러를 뿜어냈고, 로우는 팔다리가 늘어나며 기이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어서 시작되는 두 사람의 격돌.

카랑카랑한 날붙이 소리에 나의 해머와 레이의 세검이 공명하듯 허공을 맴돌았다.

슈아아악―

나는 놈의 품으로 파고들며 수평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자세를 낮춘 레이는 공격을 흘리며 땅을 박찼다.

예리한 놈의 칼끝이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고.

부아악―

빗나간 해머를 회전시켜 놈의 손등 위로 내리찍었다.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녀석의 칼자루. 하나 나의 두 다리는 이미 놈의 품을 쫒기 시작했다.

녀석의 세검이 크게 호를 그으며 뻗어 나왔다.

해머를 들어 가볍게 튕겨 낸 뒤, 한 바퀴 돌려 아래로 내려잡았다.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조롱하듯 살갑게 말을 걸었다.

“오러가 사라진다고 했니?”

“…….”

“미리 알려 줘서 고맙긴 한데. 난 오러를 안 써.”

갸웃거리는 놈을 향해 한걸음 다가섰다.

“아직 이해가 안 되나 본데, 나는 오러 같은 거 쓰지 않아도 원래 강하다고.”

“…….”

“그래 맞아. 넌 이제 망한 거야.”

거대한 묵색의 해머가 바닥을 훑으며 날아들었다.

놈의 얄팍한 세검이 저항을 시도했지만.

쩡!

술통만 한 해머는 굉음을 일으키며 세검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이어서 떠오르는 기분 좋은 글자들의 향연.

[올려치기 숙련도 1,000/10,000]

[기본 수련 3종이 1단계를 돌파하며 둔기 마스터리 레벨이 상승합니다.]

[둔기 마스터리 레벨2. 둔기의 대미지가 20% 상승 합니다.]

느낌 오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넌 오늘 망한 거야.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