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반과 헤어진 빅터는 홀로 동굴에 들어섰다.
정해진 지명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으나, 아는 사람끼린 이곳을 마력의 샘이라 불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동굴의 심층부로 향할수록 까닭모를 짙은 마력이 기이하게 넘쳐 났기 때문이다.
하여 대량의 마력이 필요한 최고위 마법들도 무리 없이 시전 가능했으니.
― 빅터 경이 의식의 안전을 책임져 주시오.
그렇게 젊은 시절의 빅터는 이곳 마력의 샘과 특별한 연을 맺게 되었다.
하나 이곳을 찾았던 젊은 날의 기억은 이미 휘발되어 사라진지 오래.
빅터는 옅은 의식의 파편을 뒤져 지난 시간의 흔적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왼쪽 길.’
갈림길 앞에선 빅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동굴의 갈림길은 총 세 곳.
친절하게도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가야 바른길이 나온다.
그러니 이번에도 왼쪽이 맞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다 왔겠군.’
이제 남은 거리라고 해 봐야 고작 5분 남짓.
도착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설마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인지, 아니면 그저 실없는 노파심이었는지.
빅터는 부하의 보고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최근 놈들의 행적을 쫓은 결과 신원 미상자가 더 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뒤를 캐던 놈들이었다.
이미 적이 되었고, 어쩌면 평생의 원수가 될지도 모를 놈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비열한 놈들이다.
— 신원 미상자가 늘었다고?
— 네. 출신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파악된 인원은?
— 현재까지 확인된 기존 두 명에 더해,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두 명이 추가된 상태입니다. 그 외에도 더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확정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신원 미상의 인간들이 대륙에 한둘이겠나.
평민 이하의 삶에서 신분 증명이 안 되는 사람들은 발에 채이도록 많다.
특별할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나 이 보고가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마탑을 오가는 놈이 신분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특히나 그 장소가 흑마탑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흑마법 특유의 부정함은 이미 대륙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며, 브라함에선 더욱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데 신분 증명조차 안 되는 인간이 자유롭게 출입을 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출입 자체도 그러하지만, 그런 놈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
하나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났고, 빅터와 그의 세력은 놈들을 추적하며 숨겨진 배후를 캐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깊게 감춰진 흑막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빅터는 포기하지 않았고, 최초의 신원 미상자를 찾는 데 성공했다.
카이 레이와 카이 로우.
카이 형제라 불리우는 놈들은 브라함 제국과 사라센을 오가며 수많은 암살을 자행했다.
기나긴 시행착오 끝에 빅터는 범행 일자를 알아낼 수 있었고.
브라함 제국의 관료 암살 현장에서 카이 형제와 조우하게 되었다.
흑막의 정체는 그렇게 밝혀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놈들은 특이한 능력으로 빅터의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때가 기회였는데.’
이후로 놈들의 소식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더 이상 접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실체 없는 적을 찾아 대륙 곳곳의 정보를 모으던 그때.
새롭게 등장한 신원 미상자 두 명이 빅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먼저 확인된 놈의 이름은 리.
활동 내역은 알려진 바 없으나, 놈은 세비앙 영지 앞마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근처를 지나던 빅터는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살아 있는 리를 만나지 못했으나.
그 대신 특별한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여 뒤를 쫒았고,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걸 확인한 순간 앞뒤 재지 않고 데려왔다.
그의 이름은 이반.
녀석에겐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함이 있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월적인 육체와 근성.
이반의 몸은 이미 4성 오러 유저에 필적했으며, 고작 4일 지난 지금. 그의 육체는 5성의 단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인간이.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오러라는 인외의 경지를 뛰어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남자는 빅터의 인생에 단 한 명.
인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웅 ‘진’뿐이었다.
‘그걸 진짜로 해낼 줄이야.’
지켜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반은 여전히 성장 중이며, 끝이 어디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매우 빠르게.
말도 안 되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진을 능가할지도.’
이반은 빅터가 기억하는 진의 성장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니 전설의 재림이란 상상이, 마냥 불가능한 소리는 아닌 것이다.
어쨌건.
신원 미상자 4인 중 새로 등장한 1인은 사망한 상태다.
카이 형제를 제외한다면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과연 입수한 정보가 정확한 것일까.
등줄기를 훑고 지나는 불길함에 빅터는 얼굴을 구겼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게 될 일.’
빅터의 걸음이 더욱 바빠지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빅터 어디 갔냐고. 질문 간단하잖아. 이게 그렇게 어려운 얘기야?”
“거 답답한 사람들이네. 이봐요. 사람을 찾을 때는 나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해서 누구를 찾고 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게 순서라는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 같은 놈들이다.
뜬금없이 남의 발밑에 나타나더니, 이번엔 다짜고짜 빅터의 행방을 물어 왔다.
‘대답해 주겠냐.’
수상하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마저 이상한데 어찌 알려 주겠나.
내가 아는 빅터의 행방이야 고작 동굴이지만, 그조차도 말해 줄 수 없었다.
“흐음… 그럼 빅터 얘기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돌프는, 돌프는 왜 죽인 건데?”
계속해서 반말을 찍찍거리는 이 녀석은 세검을 차고 있었다.
눈알은 단추 구멍만한 게, 생김새가 쥐새끼를 닮았다.
“돌프가 누군데?”
단추 구멍 쥐새끼에게 내가 해 줄 말은 이것뿐이었다.
진짜 모르겠으니까.
당장 이 자식들 정체조차 모르겠는데 돌픈지 루돌픈지 내가 알게 뭔가.
“네가 죽였잖아!”
단추 구멍 쥐새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쌍으로 쳐 돌았나.
갑자기 나타나서 ‘빅터를 내놔라, 돌프를 왜 죽였냐.’ 하면 내가 ‘죄송합니다.’하며 고개를 조아려야 하나?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지만, 난 그놈이 누군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어. 그러니 그만 귀찮게 하고 갈 길이나 가라.”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나 마음 한쪽이 뜨끔하며 싸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만, 풍차에서 싸운 놈의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거한의 얼굴을 떠올리며 당시의 기억을 쥐어짜냈다.
뭔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기분.
덩치 큰놈의 이름은 들은 것 같은데…….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별안간 날아온 해머에 머리가 날아가지 않았나.
그것도 두 번이나.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회귀를 하고 있는 판이었다.
이름 따위,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 자식 잡아떼는 거 봐봐. 보통 뻔뻔한 놈이 아니네.”
“그러게. 생긴 건 멀끔한 놈이 하는 짓은 영 지저분하네. 비겁해.”
이번엔 묵묵히 곁을 지키던 놈이 한마디 거들었다.
단추 구멍 쥐새끼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체격, 허리춤의 단검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돌프의 해머를 들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모른 척하면 말이야… 보는 우리는 얼마나 짜증이 나겠냐고. 안 그래?”
“해머?”
그러고 보니 방패 든 녀석.
놈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 자식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 돌프의 해머를 그렇게 손쉽게 휘두르다니, 네놈도 보통은 아니네.
맞다.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거기에 쉐인까지 죽이고 말이야… 용서할 수가 없잖아. 뻔뻔하기까지 하니까.”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방패 녀석의 이름도 이젠 확실히 알겠다.
쉐인이라…….
역시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당장 싸움이 벌어질 판인데 쉐인인지 뭔지 알게 뭔가.
“마지막이야. 잘 생각해서 대답해. 빅터는 어디로 갔지?”
“몰라.”
“아… 이 새끼 고집 세네. 그냥 저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하면 서로가 편하잖아. 왜 사서 지랄이냐고, 어차피 죽을 놈이 말이야.”
뭐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건가?
분명히 내 발밑에서 올라왔는데 어떻게 안 거지?
“왜냐고? 넌 돌프랑 쉐인을 죽였잖아.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놈이지만, 어쨌든 기분 나쁘다고!”
어디서 왔건 이젠 상관없게 됐다.
문답무용.
더 이상은 시간 낭비다.
이놈들의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고,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래서 어쩌자고?”
“어쩌긴 죽어 주셔야지.”
단추 구멍 쥐새끼가 비릿한 웃음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단검이 날아들었다.
하나 멀뚱히 맞아 줄 생각은 없으니까.
챙―
나는 해머를 들어 가볍게 걷어 냈다.
“오호라?”
뒤에 있던 쥐새끼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정작 칼을 휘두른 녀석은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오러? 아닌데… 그치 동생아. 오러 유저 아니지?”
동생이란 놈은 단검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그러면 힘만 가지고 돌프의 해머를 휘둘렀다는 거야? 저 새끼도 괴물이네… 괴물이야.”
쥐새끼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하나 그걸론 부족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헛소릴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이거 생각해 보니 간단히 죽이면 안 되는 놈이잖아? 동생아 나와 봐. 형이 상대할게.”
“닥쳐, 병신아. 지랄하지 말고 거기 있어.”
“아… 넌 진짜 형한테 말버릇이… 내가 항상 말하지만 넌 너무 교양이 없어. 알아? 일단 기다려 줄 테니까 가지고 놀아 봐. 대신 죽이지 말고 형한테 넘겨야 된다. 알겠지?”
“허허… 이 미친 새끼들이.”
사람을 앞에 놓고 무슨 개소리를 주고받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놀아?
지랄도 풍년이다.
“어이, 단검.”
“…….”
“눈깔에 힘 좀 빼, 그러다 튀어나오겠다.”
놈의 눈가가 작게 씰룩거렸다.
작전이었다.
찰나의 틈을 노린 해머가 공기를 가르며 놈의 머리로 향했다.
하나 놈은 가볍게 흘리며 오히려 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챙―
복부를 노려 오는 놈의 단검.
들이치는 녀석의 검을 해머 자루로 틀어막았다.
동시에 해머는 방향을 바꿨고, 놈의 머리를 향해 날카로운 내려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녀석은 부드럽게 피해 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이러다간 뒤를 잡힌다.’
놈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앞으로 구르며 거리를 벌려 놓았다.
자세를 잡음과 동시에 해머를 휘둘러 접근을 차단했다.
“오∼ 흥미진진하네. 동생아, 저 해머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다. 조심해 인마.”
“맞을 일 없으니까 닥치라고.”
건방지지만 일부 인정한다.
현재 상태로선 맞출 방법이 없어 보인다.
“생긴 건 뒤에 놈이 닮았는데, 하는 짓은 네가 쥐새끼네.”
어쩔 수 없다.
사냥감이 빠르면 사냥개도 빨라야 하는 법.
나는 수갑을 끌러 바닥에 집어던졌다.
쿵—
“뭐야? 쿵? 지금 쿠웅, 그런 거야?”
묵직하게 울리는 수갑 소리에 뒤에 있던 쥐새끼가 작은 눈을 키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엔 반대쪽 수갑.
쿵—
“얼레? 저게 뭔데 저런 소리가 나냐?”
궁금해?
그럼 직접 들어 보든가.
나는 족쇄를 풀러 쥐새끼에게 집어던졌다.
쿠웅!
“뭐, 뭐야?”
형이라 칭하던 놈이 족쇄를 집어 들었다.
아니, 들으려 했다.
“허미… 이거 뭐라니. 사람 새끼가 왜 이런 걸 발에 차고 다니는데? 너 뭐 하는 놈이야? 어?”
쥐새끼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쪽 째진 눈을 부릅뜨는 것이 가관도 아니다.
“아직 하나 더 남았는데.”
남은 한 짝을 더 끌러 이번엔 단검에게 던졌다.
쿠웅!
역시나 믿을 수 없는 소릴 내며 떨어지는 족쇄.
“…….”
단검을 쥔 녀석은 발을 내밀어 족쇄를 툭 건드렸다.
“어때? 느낌오지?”
“…….”
구겨진 인상은 대답 대신인가 보다.
“진짜로 간다.”
동시에 나의 해머는 놈의 턱을 향해 날아들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