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죽으라고 민 거죠?”
“그럴 리가 있겠냐.”
“이런 걸 주렁주렁 매달고 계곡에 빠지면 보통은 죽는다구요!”
“안 죽었잖냐.”
빅터는 심드렁한 얼굴로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저렇게 높은데.
저런 아찔한 곳에서 떨어졌는데.
“잘만 날아가더라.”
저런 흰소리나 하고 있다.
“날아가는 건 문제가 아니죠. 빠졌을 때가 문제죠!”
그러니 화가 나지 않겠나.
나는 정말로 죽을 뻔했는데.
몸에 달고 있는 게 어찌나 무거웠는지 물에 빠지자마자 가라앉았다.
강바닥 끝까지……
그리고 기어서 올라왔다.
헛소리가 아니라, 물에 빠졌는데 절벽을 붙잡고 기어 올라왔다.
‘떠오르질 않는데!’
어떻게 수영을 했겠나.
하여간 물귀신 되는 줄 알았다.
숨 막혀 죽을 뻔했다는 얘기다.
“멀쩡하니까 된 거지. 엄살 부리지 마라.”
“죽을 뻔했거든요! 죽었으면 어쩔 거냐고요!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대책이 없고 막무가내에요?”
“……”
“본래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지고, 어!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 가요?”
“……”
“아니, 제 말은!”
“……”
“그러니까, 제 얘기는!”
“……”
“어허… 그렇게 쓰려고 배운 오러가 아닐 텐데요?”
“……”
“알겠어요, 어디든 가 보죠.”
“……”
“……”
빌어먹을 영감탱이.
“좀 더 해 보시지?”
“……”
우리는 강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별다른 말없이.
가끔 쏟아지는 빅터의 구박을 받아 내며.
‘젠장, 언젠가는 반드시!’
무거운 걸음을 꾸역꾸역 이어 갔다.
계곡을 따라 내려간 지 10여분.
좁은 강둑길은 끝이 보였고, 높다란 절벽이 가는 길을 막아섰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길을 살피던 그때.
“뭐 저렇게 잘 올라가?”
빅터는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원숭이처럼.
벽면 가득한 덩굴을 붙잡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위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역시 오러 마스터.
나이를 잊게 하는 날렵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나 감탄은 잠시뿐, 보고 있자니 슬슬 걱정이 몰려왔다.
나도 올라가야 하는 건가.
이런 몸을 하고?
“안 오고 뭐하고 있는 게야!”
역시는 역시였다.
저런 기행을 영감 혼자할 리 없었다.
“쯧.”
빅터의 호령에 눈살을 찌푸리며 절벽으로 다가섰다.
까마득히 솟은 암벽.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효…….’
눈앞이 캄캄해졌다.
걷기도 힘든데 이 무게를 들고 절벽을 기어올라야 하다니.
“서둘러라.”
아랑곳없는 빅터는 계속해 절벽을 올랐고, 수직이던 등반 방향은 이제 강 쪽을 향해 수평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쩝…….”
어쩌겠나.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고, 해내고 나면 내 몸이 달라진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붙을 수밖에.
터억―
나는 덩굴을 붙잡고 무거운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흐으읍!”
그리고 내 눈앞엔…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것은 또 다른 지옥.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자 중력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쉽게 풀이해서 말하자면.
“죽겠네.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난이도.
수갑과 족쇄의 무게는 기본이요. 나의 체중까지 더해 끌어 올려야 한다.
근육에 실리는 부담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끄읍!”
쭉쭉 이동하는 빅터를 따라 안간힘을 쓰며 뒤를 쫒았다.
하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나의 손과 발의 힘은 너무나도 쉽게 소진되어 갔다.
‘젠장.’
이 빌어먹을 족쇄만 없어도 펄펄 날았겠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수갑이니 뭐니 핑계도 댈 수 없었다.
그걸로 따지자면 오히려 빅터가 더 많이 들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끝까지.
악착같이.
나는 이를 꽈득 깨물며, 빅터가 향한 강 쪽으로 진행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한데 있어야 할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앞서가던 빅터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소리 없이, 연기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뭘까.
무슨 일일까…….
솔직히 말해, 그 영감이 어찌됐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안 든다.
애초에 그 인간의 안위 따윈 내가 걱정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걱정되는 건…….
이렇게 갸우뚱할 때마다 나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찝찝한데.’
나는 불길한 마음을 달래며 절벽을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턱―
절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땅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이곳은 작은 평지.
그러니까, 절벽 중간에 위치한 작은 동굴의 입구이던 것이다.
사라졌다 생각한 빅터는 당연히 그곳에 서 있었고.
“올라오느라고 수고했다.”
영감은 덤덤한 표정으로 나의 노력을 칭찬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나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동굴을 바라보았다.
절벽 중간에 있는 기이한 동굴이 아닌가. 분명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가 저 안에 있을 것이다.
하여 다시 질문했다.
“저 동굴이 목적지인가요?”
“그렇기는 한데, 네놈은 신경 쓸 것 없다. 하니 근력 수련에만 집중 하 거라.”
돌아온 대답은 신경 꺼라였다.
빅터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신 이어지는 무뚝뚝한 한마디.
“숨 돌렸으면 다시 시작하자.”
가슴이 철렁해짐을 느낌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얼굴로 다가왔다.
“…….”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었고.
“어어억?!”
버둥거리던 나의 몸은 멍청한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 * *
“아, 진짜 왜 이래요!”
다시 기어 올라온 나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뻥―
하지만 돌아온 건 발길질이었고.
“끄아아아아아…….”
나는 비명과 함께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왔다.
“노망인가?!”
뻥―
“우아아아아아…….”
하지만 날아가야 했고.
“이 양반이 제정신이 아니네!”
뻥―
“시바아아아아…….”
또다시 날아갔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언젠가 복수할 날을 꿈꾸며.
저 괴팍한 영감을 쓰러뜨릴 날을 상상하며.
아등바등 올라온 절벽 위에서 빅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하나 빅터의 모습은 차분했다.
“고생했다. 오늘은 거기까지 하고 쉬자꾸나.”
피워 올린 모닥불과 끓고 있는 스프 냄비…….
곁에서 지글거리는 저것은 붉은 오크의 고기가 분명하다.
‘화를 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미칠 것 같은 향기라니.
결국 나는 홀린 듯 빅터의 앞에 자리해 고기를 받아들었다.
“와아… 이거 진짜 돼지고기… 더 맛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는 정신없이 고기를 뜯고, 스프를 들이켰다.
오늘 하루의 피로와 은원이 이 저녁 한 끼로 스르륵 사라지는 느낌이다.
“내일부턴 붉은 오크만 잡아야겠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극상의 맛이었다.
술을 부르는 맛.
곡물을 먹고 싶게 하는 맛.
여하튼 기대 이상의 만족스런 저녁 식사였다.
끝이 아니었다.
“이쪽에 와서 자리를 잡아 봐라.”
식사 이후 빅터는 자신의 앞으로 나를 불러 앉혔다.
다가간 나는 정좌를 하며 자세를 잡았고, 빅터는 오러 운용을 시작했다.
등 뒤로 밀려드는 오러에 지친 근육이 안정되며 나른해졌다.
서서히 이완되는 육체와 정신.
풀려 버린 긴장감은 이제 녹다시피 사라지고 있었다.
꾸벅…….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눈꺼풀이다.
역발산의 괴력이 있어도 이길 수 없는 것.
결국 나는…….
앉은 채로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끄아아아…….”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또 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역시.
또 달라졌다.
“흐음.”
그토록 무겁던 수갑과 족쇄가 하룻밤 사이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다.
“몸 상태는 어떠냐.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듯하구나.”
“생각보다 좋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가자.”
“어디를…….”
뻥―
어디긴 어디였겠나.
눈 뜨자마자 하늘을 날랐다.
그리고 강바닥.
숨을 참고 바닥을 기어 강벽에 타고 올랐다.
마침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고.
“망할 영감탱.”
나는 숨쉬기도 전에 망할 영감을 찾았다.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저은 나는 덩굴을 움켜잡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하루.
“후웁!”
짧은 기합과 함께 힘차게 몸을 당겨 올렸다.
턱!
턱!
턱!
등반 속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확연히 차이 나는 속도에 나 스스로가 놀랄 정도다.
‘말도 안 돼.’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변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다.
스윽―
절벽 위에 오른 나는 날아오는 빅터의 발을 가볍게 피했다.
“그만해요! 뛰어내려도 제가 뛰어내릴 테니까.”
그렇게 다시 강으로 뛰어들었고, 점심 전까지 여섯 번을 더 오르고 내렸다.
붉은 오크 고기로 점심을 먹고 달콤한 오침을 취했다.
훈련은 계속되었다.
뛰어내리고 올라오길 반복하던 끝에, 해가 질 무렵엔 등반 횟수가 스무 번에 이르렀다.
“우아… 더는 못하겠네요.”
팽팽해진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완벽한 탈진 상태.
부들거리는 두 팔과 다리는 더 이상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라.”
빅터의 오러 운용은 오늘도 계속되었고.
“…….”
나 역시 앉은 채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난 나는 해머를 휘둘렀다.
슈우우욱―
여전히 느리고 힘들지만,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등바등할 단계는 이제 지난 것이다.
‘며칠만 더 한다면.’
무게에 완벽히 적응할 것 같다.
정확한 동작에 신경 쓰며 삼신기를 하나씩 반복했다.
좌우로 휘두르고 내리친 뒤 쳐 올렸다.
깔끔하게 축적되는 숙련도 수치.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좋은 자세다.”
어느새 다가온 빅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젠 무게를 제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구나. 오늘 하루 더 여기서 머물 것이니, 머무는 동안 한시도 낭비하지 말거라.”
말을 마친 빅터는 빵 한 덩이를 주워 동굴로 향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확인할 것이 있어 잠시 다녀올 예정이다.”
말을 마친 빅터는 동굴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흔적이 여기서 끊겼네. 아니, 끊긴 게 아니라 뛰어내린 것 같은데.”
빅터와 이반의 마지막 흔적을 두고 레이는 상황을 유추하고 있었다.
“저기에 뭐가 있다고 뛰어내려?”
“기억 안 나? 너 완전 길치구나?”
의아해하는 로우의 질문에 레이는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에 로우는 얼굴을 구겨 댔고.
“저 아래가 어딘데?”
짜증 가득한 말투로 레이에게 반문했다.
다짜고짜 길치 취급이라니.
“우리가 처음 왔을 때 거기잖아.”
돌아온 레이의 대답은 뜬금없는 추억팔이였다.
여길 오긴 언제 왔다고 저러는 건지.
듣고 있던 로우의 표정은 점점 더 의뭉스럽게 변해 갔다.
하지만 그 순간.
“잠깐… 설마 여기가?”
불현 듯 떠오른 기억에 루이는 동공을 키우며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래 인마. 이제 기억 나냐?”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
“그럼 빅터의 목적지가 거기란 말이야?”
로우는 기억 속 장소를 떠올리며 레이에게 되물었다.
“글쎄. 내려가 보면 알겠지.”
“내려가 봤자 강이잖아. 남아 있는 흔적도 없을 것 같은데.”
애매한 레이의 답에 로우는 부정적인 말로 반박했다.
“뭐… 귀찮게 되기는 했는데, 결국 물가로 나갔을 테니 흔적은 다시 남았을 거야.”
“계속 강으로 갔으면?”
“크크크, 그럼 우리도 따라가는 거지.”
말을 마친 레이와 로우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이쪽이야!”
수면 위로 올라온 로우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레이는 이미 강가에 올라선 상태였다.
무언가 발견한 듯, 팔짱을 끼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적이라도 찾은 거야?”
강가로 다가가며 로우는 레이에게 물었다.
“응. 이것들 바로 물 밖으로 나왔네. 저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레이는 손을 뻗어 멀리 보이는 절벽을 가리켰다.
대략 10분이면 도착할까?
“왠지 마주칠 것 같단 말이지.”
레이는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동생 로우를 재촉하며 하류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어 도착한 가파른 절벽 아래. 레이는 로우의 어깨를 툭 치며 암벽 어딘가를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뜨며 응시하는 로우.
“찾았다 그치?”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절벽으로 향했고.
“저기요, 아저씨?”
어느새 절벽을 오른 형제는, 등반 중인 남자의 발밑에 도착해 그를 불러 세우는 데 성공했다.
“엥?”
남자는 맹한 소리를 내뱉으며 돌아봤다.
저 덩치에 ‘엥?’이라니.
“위에 올라가면 빅터가 있나요?”
레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등반 중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이한 표정을 짓는 잘생긴 젊은 남자.
“만나서 반가워, 이반.”
레이는 활짝 웃으며 희멀건 손을 내밀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