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호롱불을 지나던 풀벌레가 날개를 태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퍼덕거리며 몸부림치는 이름 모를 날벌레.
내지르는 날갯짓 소리에 무심히 시선이 돌아갔다.
“애들은 무슨 생각일까요?”
“뭐가 말이냐.”
“타 죽을 걸 몰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참지 못하는 걸까요.”
맹렬하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바닥을 뒤집던 몸부림도.
푸드덕대던 날갯짓도.
고갈되는 생명의 기운은 침묵을 종용했다.
“멈출 수 없는 게다.”
“…….”
“우리 같은 놈들이지.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달려드는 멍청한 종자들.”
“저는 아닌데…….”
“네놈이 제일 멍청하지.”
빅터는 마른 빵을 뜯어 입가로 가져갔다.
“오죽 멍청하면 잠꼬대로 저 지랄을 할까.”
그러고는 한입 크게 베어 물며 박살 난 벽면을 바라보았다.
휭하니 뚫려 버린 석벽.
나는 시선을 돌려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고 싶냐?”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진짜 모르겠다.
그저 꿈에서 몬스터를 만났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일어나 보니 벽에 바람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도 빅터의 바로 옆자리.
“노린 거 맞지?”
“설마요.”
“맞잖아.”
“아닌데요.”
“…….”
“오러는 거두시지요.”
따가운 빅터의 시선을 무시하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여기서 쭈그러들면 두고두고 시달릴 게 빤하다.
그러니 끝까지 모르쇠다.
“기왕 휘두른 김에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자.”
이것도 무시하자.
보나마나 가르침을 빙자한 복수가 분명하다.
“해 뜨면 대련이다.”
“너무 많이 먹었나. 잠이 솔솔 오네.”
나는 못들은 척 침상으로 향했다.
어설픈 연기로 기지개를 켜고, 오크 색 침상 위로 몸을 뉘었다.
‘속 좁은 노인네 같으니.’
내가 당할 줄 알고?
대련 같은 거 안 해도 다 안다.
내 몸 상태야 몸 주인인 나만 알면 되는 거 아닌가.
“일어나라.”
“…….”
“일어나라고 했다.”
“…….”
“지금 일어나면 4성만 쓰지.”
“이젠 5성.”
“이젠 6…….”
“어라, 잠들었었나?”
비겁한 영감탱이… 오러를 무기로 쓰다니.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저 영감은 능히 8성의 오러를 휘두르고도 남을 인간이다.
* * *
쩡―!
둔탁한 충돌음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비산하는 주황색 불꽃.
마주한 해머와 검이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확실히 4성은 뛰어넘는구나!”
해머의 주인인 거한이 4성 오러 유저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추측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가능하니까.’
40㎏가 넘는 해머를 그렇게 휘두른다는 건, 보통의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하여 거한의 기준을 4성이라고 상정했다.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5성으로 올려 주세요!”
놈의 해머에는 오러의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육체만 강화할 뿐인 오러 유저.
“5성은 격이 다르다.”
빅터의 검에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저것이야 말로 5성의 증거가 아니겠나.
지금 빅터의 검엔 오러가 흐르고 있었다.
“막아 보거라.”
역시 분위기가 다르다.
내가 받아 낼 수 있을까?
“후우…….”
불과 삼일 전.
나는 거한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었다.
고작 한 방.
그 한 방을 막지 못해 두 번의 죽음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슈아아아악―
그때보다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쾅!
4성은 기본이고 이제는 5성까지!
매섭게 몰아치는 빅터의 검에 묵직한 해머로 응수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다르다니.”
내 성취를 확인한 빅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동시에 날아드는 은백의 칼날.
쾅!
쾅!
쾅!
“괴롭힐 맛이 나는구나!”
빅터는 망나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가온 절체절명의 상황.
“미쳤네, 이 영감이!”
머릿속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뭐라? 미친 영감?”
“내, 내가 언제요!”
망했다.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상황은 이미 틀린 것 같다.
“그래, 제대로 한 번 미쳐 보자.”
빅터는 손바닥에 침을 뱉어 양손으로 비볐다. 그러고는 야무지게 검을 잡아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내밀었는데…….
“와 씨! 그거 5성 맞아요?!”
푸른색 검기가 칼날을 타고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5성이다.”
“거짓말!”
“5성 맞다.”
“아니잖아요!”
“어허.”
“어디서 개수작이야!”
“……”
젠장.
오러가 창처럼 늘어난다.
“잘못했어요…….”
빠른 태세 전환에 이은 무릎 꿇기.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가드 올려라.”
“고정하시지요, 스승님.”
좌우지간 화끈하게 시작되는 4일째 아침이었다.
* * *
빅터의 참교육으로 시작된 상쾌한 아침.
워낙 일찍부터 설쳐서인지, 그 난리를 치고도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다.
‘미친 영감탱이.’
술통만 한 해머가 반으로 쪼개지는 줄 알았다.
아니, 선 채로 땅에 박혔을라나?
하여간 살풀이하듯 휘둘러 대는 검을 안간힘을 다해 막아 냈다.
사실 ‘막았다’라고 하기 보단, ‘처맞고 있었다’가 옳은 말이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중이다.
“영감, 아니, 스승님. 아침부터 왜 이렇게 달려요?”
“빡세게 굴린다 안 했느냐.”
도대체 얼마나 굴리려고?
이 시간에 이 난리면,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늘어질까.
“확실히 네놈은 다르다. 회복 시간도 길지 않고, 힘을 소진하면 그 이상으로 채워지니 굴려 먹기 딱 좋은 놈이지.”
칭찬인가?
뭐가됐건 몸 쓰는 데 최적화됐단 얘기 아닌가.
그러면 된 거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마차 대용품을 찾으러 갈 거다.”
“뭘 또 끌어야 돼요?”
거참, 끄는 걸 왜 저렇게 좋아해.
기껏 팔아 놓고 다시 구한다고?
“잔말 말고 따라오너라.”
하… 가자니까 따라가긴 하는데.
진짜 많이도 안 바란다.
마차를 끌건 인력거를 끌건.
제발 사람이 할 수 있는 짓만 하면서 살자.
나는 툴툴거리며 빅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걸어, 시작의 마을을 벗어난 지도 어느덧 한 시간.
주변의 풍경은 덩굴식물에서 키 작은 양치류로 변해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별로 없네요?”
바글바글할 거라던 마수들은 뜨문뜨문 잊을만하면 모습을 드러냈다.
이래서야 마경이라는 이름이 울고 갈 판.
왠지 서운할 정도로 평범한 숲이었다.
“서식지가 겹치는 구간이라 그렇다.”
“서식지요?”
“그래. 강한 개체와 약한 개체가 만나는 지점이지.”
“하면, 약한 것들이 숨었다는 건가요?”
“돌대가리는 아니구나.”
칭찬을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사람이 배배 꼬여서 말을 예쁘게 할 줄 모른다.
‘쯧… 이래서 꼰대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젊은 내가 이해할 수밖에.
하여간 빅터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 센 녀석이 등장할 차례다.
이 구역을 평정한 놈.
얼마나 강한 녀석인지 몰라도, 생긴 건 그냥 그럴 것 같다.
저 앞에 보이는 구부정한 놈처럼 말이다.
“마침 저기 나왔구나.”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상대는 원숭이처럼 생긴 놈이었다.
생김새만 그렇단 얘기다.
덩치는 생각보다 커서 나와 비슷, 아니,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거기에 통나무처럼 길게 뻗은 굵은 팔과 다리.
나무늘보처럼 느긋하게 움직이지만, 제대로 맞으면 어디하나 부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싸우는 요령이 있나요?”
나는 녀석의 공략법을 물어보았다.
“있지.”
빅터는 대답했다.
“무조건 빨리 쓰러뜨려라.”
알기 쉬워서 좋구나.
이런 개떡 같은 답이라니.
“그게 무슨…….”
울컥한 맘을 달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따위로 시작한 말이지만, 분명히 뼈 있는 내용이 뒤를 이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틈을 주지 마라.”
“…….”
“만약 다른 짓을 할 시간을 주게 된다면… 네놈은 지옥을 구경하게 될 게다.”
그 다른 짓이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요점은 맹공.
그 외의 다른 공략은 없었다.
공략이 없다는 건 해법이 없거나, 필요 없다는 것.
고로 닥치고 공격이다.
쿠오오오오―
어기적거리는 놈의 무릎에 시선을 모았다.
첫 번째 타격은 저곳.
느릿한 놈의 팔을 피해 상체를 숙여 사정거리로 파고들었다.
이어지는 통렬한 휘두르기.
빠아악!
놈의 무릎이 휘청이며 힘없이 좌로 무너졌다.
해머는 다시 올라갔고.
콰지직!
쓰러진 놈을 향해 사납게 내리꽂혔다.
비산하는 뇌수와 뼛조각들.
전투는 싱거우리만큼 빠르게 종료되었다.
“폼 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빅터의 말에 돌아보자, 그늘진 수풀을 헤치며 또 다른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또 하나가.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놈이 등장했다.
“뭐하고 섰어?”
빅터의 핀잔은 이어지지 못했다.
빠각!
나의 해머는 이미 놈들을 향했으니까.
공략법이 없던 이유는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약한데?’
팔다리가 통나무 만하면 뭐하나.
휘두르질 못하는데.
공격을 해야 상대가 쓰러지건, 자빠지건 할 것 아닌가.
한데 이 녀석들은.
‘뭐 하자는 거야?’
공격을 하는 건지 휘적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에 느리기는 또 어찌나 느린지, 가지고 있던 긴장감마저 사라질 지경이었다.
콰지직!
어쨌건 다가오는 놈들에게 해머가 날아갔다.
다른 짓을 할 틈을 주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빅터가 그렇게 말했는데.
“응?”
맨 뒤에 나타난 놈이 팔에서 무언가를 끌러 냈다.
이어서 두 다리까지.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처절한 기함을 토해 냈다.
크워어어어어어!
무슨 짓을 한 걸까.
알 수 없는 놈의 변화에 주춤한 것도 잠시.
“어억!”
날듯이 달려온 놈은 화살처럼 주먹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거대한 통나무가 번갈아 가며 휘둘러졌다.
“미친…….”
따라잡기 버거운 속도였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놈의 주먹 앞에, 나의 해머는 용도가 변경되어 방패가 됐다.
“그렇게 서 있다간 결국 당하고 말게다.”
지켜보던 빅터가 한 수 거들었다.
‘젠장.’
틀린 말이 아니다.
이대로 계속 공격을 허용하는 건 위험하다. 결국 얻어맞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고, 그때부터 전황은 급격히 기울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쾅! 쾅! 쾅!
말도 안 되는 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크워어어어어!
쾅! 쾅! 쾅!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게 고작 정면을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어떡하지.’
파훼법이 보이지 않는다.
미천한 경험의 나로서는, 이 압도적인 속도를 이겨 낼 방법과 요령이 전무한 상태다.
하나 빅터는 다르지 않겠는가.
“뭘 멀뚱히 보고 있어요! 고수의 한마디가 필요한 시점이잖아요!”
“미친 영감이라며?”
“어떤 자식이 그런 망발을!”
와… 이제 진짜 위험하다.
그나마 막아내던 공격이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온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저건 또 뭐야!”
어느새 기어 나온 또 다른 놈이 팔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벌써?!”
이 자식은 아까보다 더 빠르다.
저놈마저 합류한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결과는 빤하다.
주먹 두 개도 버거운데 네 개를 어찌 막겠나.
“쳐 내라.”
한데 빅터는 저런 소리만 해 대고 있다.
“패링이다. 막지 말고 쳐 내는 거다!”
오… 감사합니다.
그런 무섭고 정신 나간 방법이 있었군요.
그러니 기각합니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걸 어떻게 쳐 내겠습니까.
“한두 대 맞아도 안 죽는다. 겁먹지 말고 쳐 내라!”
“보여야 치든가 하죠!”
“멍청아, 주먹을 보지 말고 몸통 돌아가는 걸 보는 거다! 타이밍을 찾아!”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거냐고!
빗발치는 놈의 주먹도 모자라 또 다른 녀석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이제 96으로 줄겠네.’
이제 믿을 거라곤 왼쪽 눈 위의 숫자 97뿐이다.
과거로의 회귀…….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살아난다는 게 중요하니까.
반드시 되돌아 갈 거라 믿으며 눈앞에 있는 놈에게 집중했다.
우워워웍!
괴성과 함께 내딛는 두꺼운 발.
이어서 돌아가는 놈의 골반이 보였다.
아직, 아직은 성급하다.
1초가 수십 단위로 쪼개지며, 놈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쫒았다.
순간 움찔거리는 몸통.
본능은 이성보다 빠르게 나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지금!’
보이지 않는 놈의 주먹을 향해 해머를 쳐 올렸다.
그저 예측하고 휘두를 뿐.
결과는 하늘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쩌어억!
예상은 완벽했다.
타이밍을 뺏긴 놈의 주먹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고.
[조건이 충족되어 올려치기 수련이 활성화됩니다.]
[올려치기 숙련도 1/10,000]
기다리던 삼신기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