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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4화 (14/203)

14화

짙은 녹음이 우거진 비밀의 정원.

제멋대로 뻗어 나간 넝쿨들이 문명의 흔적을 지우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지나간 옛 시간의 흔적.

잊혀진 인간들의 발자취.

을씨년스런 이곳의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도 시작의 마을이었다.

“긴 시간이 지났건만… 저 녀석은 여전하구나.”

마을 가운데 우뚝 선 탑을 바라보며, 빅터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다가선 빅터는 석탑을 어루만지며 지나간 시간을 보듬었다.

왜 저리도 슬퍼 보이는 걸까.

“곧 어두워질 테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돌아선 빅터는 어느 낮은 건물로 들어갔다.

뽀얗게 먼지 내린 오래된 마루.

멈춰진 세월을 지나치며 두 남자의 발자국은 새로운 흔적을 남겨 놓았다.

“흠…….”

특별할 것 없는 실내였다.

어디서나 볼 것 같은 평범한 석조 건물.

나의 첫 소감은 이 정도였다.

“단출하네요.”

“그저 누울 자리니까.”

빅터는 덤덤히 대답했고,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도가 그뿐이라면 꾸밈새는 완벽하니까. 보이는 것은 침상하나와 조잡한 책상뿐이었다.

“하기야, 전초기지가 이 정도면 궁전이네요. 천막이 아닌 게 어디야.”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침상으로 다가섰다.

낡은 침상 위엔 먼지 가득한 얇은 담요가 단정히 펼쳐져 있었다.

손을 뻗어 걷어 내자, 오크 색 침상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여긴 좀 누울 만하네.”

엄살 가득한 너스레를 떨며 침상에 몸을 뉘었다.

꼴에 침상이라고, 잠들고 싶은 충동이 슬며시 올라왔다.

“그런데 밤이 되면 뭐가 달라지나요?”

침침해지는 눈을 비비며, 나는 맥락 없는 질문을 던졌다.

유달리 어둠을 강조하던 빅터의 행동 때문이었다.

“달라지지. 그것도 아주 극명하게.”

그리고 그 행동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곳의 마수들은 어둠과 함께 두 배로 강력해진다. 놈들을 몰아내고 입구를 봉인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마계의 영향을 받고 있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이유였다.

두 배라니…….

닥치고 받들어야 할 행동 규범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강해진다면 여기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이깟 작은 집이 무슨 힘이 있겠냐는 것이다.

무려 두 배인데.

훅 불면 사라지지 않겠나.

“이 마을은 괜찮다.”

하나 빅터는 태연했다.

“결계석이 심어져 있어서 마수들이 싫어하지. 마계 입구를 봉인한 그 결계석과 같은 돌이다.”

신뢰할 만한 안전장치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그 마계 입구라는 거요.”

그러니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디에 있고, 누가 봉인에 성공한 것인지.

“스승님도 가 보셨나요?”

“아니. 내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

“감히 다가갈 실력조차 안 됐지.”

그럴 수도 있겠다.

무려 30년 전 일이니까.

딱히 상상은 안 가지만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법 아니겠나.

햇병아리 시절 말이다.

“마계를 봉인한 신탁의 기사는 여덟 명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지크 같은 놈이 아니라.”

불쌍한 지크.

한때는 동경하면서 읽은 영웅담의 주인공이었는데…….

동심을 짓밟은 빅터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진, 카론, 미나이, 하멜, 그레이시, 루즈, 브레인, 세브첸키……. 모두가 시대를 대표하던 최고의 강자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었지.”

“그분들은 살아 계신가요?”

되돌아간 나의 질문에 빅터는 다시금 침묵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라면 필시 좋은 결과는 아닐 터.

“인마대전(人魔大戰)의 영웅 중 남아 있는 생존자는 없다. 그러니 봉인된 입구를 아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지.”

“그렇군요.”

역시나 돌아온 답은 비극적 결말이었다.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볼 겸 집안 곳곳을 살펴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으음?”

나는 묘하게 생긴 낙서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글씨 같은데… 뭐라고 쓴 걸까요?”

“진, 이 집의 주인 이름이다.”

빅터는 앉은 채로 나의 질문에 답했다.

“이 글자를 읽을 줄 아세요?”

“나도 모른다. 그저 주인을 알고 있을 뿐이지.”

“아… 그런데 진이라면, 봉인에 참여한 8인 중 한 분 아닌가요?”

“맞다.”

빅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체격이 장대했다. 아마 네놈과 비슷하던 것 같구나.”

눈대중을 맞춰보던 빅터는 계속해 기억을 떠올렸다.

“하여간 힘도 엄청났지. 오러도 다루지 못했고……. 하지만 누구보다 강했다.”

“저랑 비슷하네요?”

“흠… 그렇구나. 누구보다 강한 것만 빼면.”

“쳇…….”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도 너와 비슷하던 것 같구나.”

나를 바라보는 빅터의 눈에서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왠지 울컥해 보이는 표정.

“참으로 몹쓸 세상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빅터는 쓰디쓴 한마디를 낮게 뇌까렸다.

* * *

“우리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 3일만 넘지 않으면 흔적은 그대로니까.”

어둠이 내리는 산길을 터벅터벅 걷는 두 남자.

“빅터가 관련된 이상 주변 파악을 확실하게 해 둬야지.”

리의 행방을 쫒던 카이 형제였다.

“다 늙은 인간이 뭐가 걱정돼서.”

“큭큭큭, 누가 들으면 내가 겁먹은 줄 알겠다. 응? 동생아.”

“쫄았잖아.”

“쫄기는. 너는 추적의 묘미를 몰라서 그래.”

남자는 잔뜩 신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단서를 찾고 관련된 놈들을 하나씩 쫓는 거야. 그렇게 천천히 뒤를 좁혀 들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려서 스윽! 크… 이거야 말로 진정한 암살자의 모습이지!”

추적의 묘를 떠벌이는 이 남자의 이름은 레이.

현장의 흔적을 통해 당시 상황을 똑같이 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3일이란 제한적 기한이 있지만, 사건의 진위 파악과 행적을 찾는 데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묘미 좋아하네. 고문하고 싶어서 안달 난 변태 새끼가.”

또한 동생 로우의 말처럼 고문을 사랑하는 가학적 취향이 농후한 미친놈이기도 했다.

“크흐흐, 아… 그 대장간 노인네 고집 세더라. 이름이 뭐였지? 데릭? 한마디도 안 불고 뒈진 놈은 5년 만에 처음이잖아. 그치?”

잔뜩 신난 레이는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곤 속에든 내용물을 손바닥 위로 쏟아 냈는데.

“시발! 그 이빨 좀 버려!”

“왜? 이건 기념품이야. 나의 고문을 끝까지 버틴 인간이 내게 남긴 선물이라고. 경외와 존경을 담은 추억, 뭐 그런 거지.”

천연덕스런 레이의 말에 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저 인간은 대화가 불가능한 쓰레기다.

뼛속까지 변태인 정신병자.

“쯧…….”

본인의 직업 역시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지만, 레이와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깔끔하고, 암살자로서의 품위를 지킨다.

로우는 이렇게 형인 레이와 선을 그었다.

말하자면 정신병 걸린 암살자와 정신 멀쩡한 암살자인 것이다.

“노인네가 이빨도 억세더라고, 뽑는 데 애먹었다니깐?”

“더러우니까 치워라.”

“하여간 난 이 노인네 마음에 들었어. 우락부락한 대장장이에 데릭… 이름도 남자답잖아.”

레이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흥분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붉게 달아오른 용광로의 불빛과 시뻘건 쇳물에도 꿈적 않던 노인의 근성과 의리.

풍차에서 마주한 제키라는 놈도 끈질겼지만, 대장장이 노인과 비교할 순 없었다.

“하여간 정신병자라니까. 풍차에서 얘기 다 들어 놓고는 뭐 하러 다른 사람을 잡아?”

“사람이 다르잖아, 사람이. 풍차 주인은 싱거웠다고. 그렇게 조금 버티다 술술 뱉어 내면 재미가 없잖아. 입을 다물 거면 끝까지 다물고 있어야지.”

레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데릭의 기억을 떠올렸다.

“남자가 말이야. 대장간 노인 정도는 돼야 남자인 거야.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죽였냐? 이빨을 홀랑 뽑아서?”

“내 방식 알면서 그러냐. 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죽인다고.”

“지랄하네, 둘 다 죽였으면서.”

“아니야, 풍차주인은 하다 보니 죽은 거고 대장간 영감은 마음을 담아서 보낸 거야. 이건 엄연히 다르다고.”

레이는 데릭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래간만에 고문의 희열을 맛보게 해 준 노년의 남자.

혼절한 그의 입에서 잠꼬대하듯 이반의 이름이 흘러나오던 그 순간.

― 크핫핫! 좋았어, 데릭! 특별히 넌 한칼에 죽여줄게!

데릭의 노구는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뭐가?”

황홀감에 도취된 레이에게 로우는 의문을 제시했다.

“이반이라는 놈 말이야. 빅터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잖아.”

“그렇지.”

“근데 각자 우리 애들을 건드렸고.”

“죽을 짓을 한 거지.”

“그래 놓고는 함께 떠났다고?”

“아무렴 어때. 한 놈만 쫒으면 두 놈을 다 잡게 생겼는데.”

레이의 말에 로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일견 일리 있는 말이니까.

귀찮은 것보단 차라리 아리송한 게 낫다.

“잡아서 족치자고. 너한테도 고문할 기회를 줄게. 재밌으니까 너도 해 봐.”

“필요 없어!”

“아… 새끼, 왜 그렇게 낭만이 없냐. 너는.”

어느덧 넘어선 산등성이.

툴툴거리던 형제는 숨겨진 오지 마을에 당도했다.

“뭐 이런데다가 마을을 만들고 지랄이야.”

“그러게. 덕분에 오지게 많이 걸었네. 화난다. 그치?”

짜증 섞인 로우의 푸념에 레이는 부추기듯 동조했다.

거기에 보태 병적인 증상까지.

“그래서 확정! 여긴 다 죽여야겠다.”

본색을 드러낸 레이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희생자를 찾았다.

때마침 어린아이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칼에 주근깨 가득한 꼬마는 카이 형제를 보며 천진하게 소리쳤다.

“어? 모르는 아저씨들이 또 왔다!”

“또 왔어? 우리 말고 다른 아저씨들이 더 왔다 갔구나.”

“네!”

“그래, 우리 천천히 얘기해 보자. 알겠지?”고블린이 지나간 화전민 마을에 또다시 긴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다 함께 공멸했다는 건가요?”

인마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마계의 입구를 봉인했다는 8인의 영웅들.

신탁의 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30년이 지났을 뿐인데, 생존자가 아예 없다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빅터 영감은 이리 멀쩡하지 않나.

멀쩡하다 못해 어딘가 아파야 할 지경이다.

한데 더욱 고강한 무위를 뽐냈다는 자들이 남김없이 죽었다?

듣는 내 입장에선 개연성을 찾기 힘들었다. 작위적인면도 적잖이 보이고 말이다.

“브라함 연대기를 알고 있느냐?”

“알죠. 그거 금서잖아요.”

약소국 브라함 왕국의 제국 발전사 브라함 연대기.

차라리 역사서에 가까운 이 책은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설령 있다고 한들 읽어서도 안 되고, 읽었다면 티내서는 안 되는 이상한 책인 것이다.

“본 적은 없고 얘기만 들었죠.”

사라센 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브라함 왕국.

하여 넓은 영토를 쟁취하고 제국으로 성장하는 게 이 책의 요지였다.

따라서 금서가 돼야 할 이유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한데 금서다.

이유는 한 가지.

“찬탈자의 이야기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데드릭 폰 케이사르.

선왕을 시해한 서자의 일대기다.

이 모든 사건이 담겨 있으니 금서가 될 수밖에.

작자 미상의 이 책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났고, 뒤숭숭한 흔적을 남긴 채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나 신기하게도 책을 접한 시민들이 동요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얘길 누가 믿겠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사건의 스케일이 너무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왕위니, 찬탈자니.

백성들이 다루기엔 쉽지 않은 주제였던 것이다.

하나 빅터는 또다시 상식을 뒤집었다.

“그러면 반역에 대한 얘기도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요?”

영웅담에 이어 이 허무맹랑한 소설마저도.

“이 또한 사실이다.”

그는 실화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헐…….”

“그 빌어먹을 서자와 나라는, 인마대전의 영웅들에게 해선 안 될 짓을 시켰다.”

“그렇다면…….”

“영웅들은 선대의 왕조를 모조리 쓸어버렸지. 그리고 역사는 그들의 흔적을 모두 지워 냈다.”

그것은 반역으로 세워진 핏빛 제국의 이야기.

이제야 이해됐다.

이것은 패륜을 지우기 위한 국가적인 암약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마대전 같은 역사가 통째로 사라졌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인과는 돌고 돌아 어딘가에 쌓여 가고 있을 테고.

“어디 가서 나불거리지 마라. 재수 없으면 목 달아나니까.”

철저히 죽음으로 비밀을 다스려 왔을 것이다.

“그런 얘기라면 애초에 하질 말아야죠!”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딱히 관심 가는 얘기도 아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달랐으니까.

황제 따위… 누가 되던 아무 상관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심장한 말도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너에게도 무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겠지.

썰 풀 때 알아봤다.

쉽게 말해, 이미 난 코가 꿰였고 편하게 살긴 글러 먹었단 얘기다.

“살아 보니까 말이다…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더구나.”

나이를 헛 잡쉈네.

그런 걸 이제야 깨닫다니.

어쨌건 난 아무것도 안 들린다. 계속해서 엮을 생각인가본데 더 이상은 안 속는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무슨 상관인가.

이것은 국가가 관련된 일.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멀리 간 얘기 들이다.

그런데 왜 이 영감탱이는 들쑤시지 못해 안달인 걸까.

“살아 있는 영웅이 있다더구나.”

“찾으러 갈 생각인거죠?”

“그럴 계획이다.”

“저는요?”

“배신은 죽음이지.”

미친 영감탱… 방금 오러가 올라왔던 것 같은데.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뭔가요?”

“전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세상을 체험하는 것.”

불투명한 보상이다.

국가가 나서서 지워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찾다가 잘못되면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으니.

“너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빅터는 다른 차원의 풍경을 내게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좋아요, 속아 드리죠.”

뜬금없이 웅장한 그 얘기에 기꺼이 속아 주기로 결심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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