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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3화 (13/203)

13화

“로제 아가씨, 반크스 님이 돌아 오셨습니다!”

“외삼촌이?”

“네.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알겠어, 지금 나갈게!”

쿠당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열린 문으로 로제가 뛰어나왔다.

“어디, 어디 계셔?”

로제는 빠르게 좌우를 살피며 마을 한복판으로 향했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물어볼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눈에 검정색 준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잘빠진 녀석의 고삐를 틀어쥔 다부진 체격의 남자.

익숙하다 못해 친근한 저 모습은 로제가 기억하는 외삼촌 ‘반크스 데 제노비안’이 틀림없었다.

“외삼촌!”

“어, 그래. 올라오면서 보니 마을이 꽤나 어수선하더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고블린 로드가 침입했어요.”

“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너희들은 별일 없었고?”

“네, 저희들은 무사해요. 어느 기사님들이 도와주셔서 화는 면했는데, 마크와 루스가 죽었네요. 얀센은 심하게 다쳤고요.”

“허… 녀석들이 죽었다니. 정말로 큰일 날 뻔했구나.”

로제의 외삼촌 반크스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이 많아서 그렇다.

부하들의 목숨을 자신의 가족처럼 아끼는 남자.

아리안의 혼이란 그의 이명은, 단지 고강한 무위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신은 잘 보살폈지?”

“네. 아리안까지 가는 건 무리일 듯하여, 볕이 좋은 곳에 잘 안치시켜 놨어요. 귀중품은 도로시가 따로 챙겨 놨으니 조금 이따가 전해 드릴게요.”

“그래, 애썼다. 그런데 도움을 주셨다는 기사분들은 어디 계시냐? 내 직접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반크스는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마을의 풍경.

눈에 띄는 사람도 달리 보이지 않았다.

“아, 그분들은 어제 바로 가셨어요.”

“저런… 은인이신데 얼굴도 못 보게 되었구나.”

참으로 경우 바른 사람이다.

기사의 표본 같은 남자랄까.

반크스는 예와 도리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남자였다.

“그런데 삼촌.”

“응?”

“저희를 도와주신 기사분들이요.”

“그래, 그분들이 왜.”

“어떤 분인지 아세요? 이름을 들으면 외삼촌 배 아파 쓰러질지도 몰라요.”

“녀석, 호들갑은.”

과장된 조카의 말에 반크스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진짠데… 그 기사님 존함이 뭐냐 하면요.”

로제는 뜸을 들이며 외삼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후에 일어날 외삼촌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빅터 크로제.”

“뭐?”

“오러 마스터 빅터 크로제 님이세요.”

“아케른의 빅터 공?!”

“네, 맞아요. 그 빅터 님이에요.”

반크스의 표정이 놀라움에 굳어 버렸다.

빅터 크로제가 누군가!

소속된 국가는 다르지만, 같은 무인으로서 늘 동경해 왔던 우상과도 같은 남자였다.

지금에 와서야 같은 8성급 오러 마스터라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채워진 연륜이 다르다.

빅터는 이미 여물 대로 여문 8성이고, 반크스는 이제야 8성의 문턱을 넘은 신입 오러 마스터였다.

“참으로 아깝구나. 부하를 잃은 것도 모자라 귀한 인연까지 놓치고 말다니.”

반크스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절해, 마치 연인을 떠나보낸 사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너무 실망마세요 삼촌. 그분의 제자님이 카슈타르에 오기로 했으니까요.”

“제자?”

“네. 저와 도로시, 그리고 얀센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시죠. 어쩌면 빅터 님도 함께 오실지 모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네요.”

“오, 그것참 잘됐구나!”

반크스는 선물을 앞 둔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으로 기뻐했다.

사실 그와의 재회는 로제가 더욱 기대하는 중이지만, 지금은 그저 관심 없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아참, 알아보신 일은 어떻게 됐나요? 소문이 사실이던가요?”

“아… 그게 말이다.”

환하던 반크스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시작의 마을을 찾긴 찾았는데.”

“정말 있었군요!”

“그래 있었다. 한데… 우리가 찾던 단서는 그곳에 없는 것 같더구나.”

로제의 얼굴에도 실망의 기운이 내려앉았다.

시작의 마을.

사실 로제에겐 마지막 남은 기회였다.

보란 듯이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했어야 하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명분이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원치 않는 결혼식이다.

“시작의 마을 얘기는 부풀려진 소문일지도 모르겠다.”

반크스는 낙심한 로제를 다독이며 도로시에게 명했다.

“이제 아리안으로 돌아갈 테니 채비를 갖추자꾸나.”

로제는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했어…….’

푸르던 하늘이 잿빛으로 보이는 느낌이었다.

― 반드시 찾아서 카슈타르 가문에 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얼어 죽을.

힘이 되긴 무슨 힘이 돼. 더럽게 못생긴 놈에게 시집이나 가게 생겼는데.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

“이반 님, 와 주실 거죠…….”

빅터 크로제의 잘생긴 제자뿐이었다.

***

깨에엥!

늑대인간은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후드득 날아갔다.

네발로 달릴 때는 똥개처럼 보이더니, 서서 덤벼들자 제법 몬스터다운 기세를 뿜어냈다.

물론 그래 봤자 이미 저세상으로 갔지만.

“이놈이 마지막이네요.”

“네놈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구나.”

“훌륭하신 스승님을 둔 덕분이지요.”

“지랄용천을 하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수림에 들어왔다.

숲으로 이루어진 바다답게, 시선이 닿는 모든 공간이 진초록 정글로 빼곡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이렇게 묻는 이유는 선택을 해야 해서다.

양쪽으로 갈라진 두 갈래 길.

한쪽은 누가 봐도 알 것 같은 선명한 가도였고, 다른 한쪽은 짐승들이나 다닐 것 같은 작고 흐릿한 오솔길이었다.

“이쪽이 길인 것 같은데요?”

나는 선명히 드러나 있는 넓은 가도를 지목했다.

어떻게 봐도 완벽한 길이니까.

“그렇지 거기가 길이다. 마차가 있었다면 그리로 갔을 게다.”

있었다면?

뭐야, 이러면 본론이 아직 남았다는 얘긴데…….

“그러니 우린 이쪽으로 갈 거다.”

그럼 그렇지.

빅터는 짐승의 길을 택했다.

계속해서 느끼지만, 상식이란 범주가 이 영감에겐 없는 것 같다.

“굳이 여기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칼부림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냐. 으슥한 게 몬스터도 많을 것 같구나.”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번뜩이는 저 눈도 이렇게 보니 몬스터를 닮은 것 같다.

“어차피 오늘 밤을 보내려면 저기로 가야 한다.”

“그 안에 뭐가 있는데요.”

“마을이 있지.”

“이 숲속에요? 마경이라면서요. 몬스터가 바글바글한데 마을이 있다고요?”

빅터는 왠지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까짓 게 뭘 알겠냐는 그런 얼굴 말이다.

“네놈이 뭘 알겠냐.”

이것 봐라!

바로 나오지 않는가.

사람이 단순한 건지 솔직한 건지 모르겠다.

어찌 저래 겉과 속이 일치하는 걸까…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참으로 알기 쉬운 사람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숨겨진 마을이 나온다.”

“숨겨진 마을이요?”

왜 그런 것 있잖은가.

외딴곳에 모여 사는 은둔 고수 집단 같은 거.

주변 환경도 그렇고 분위기까지 받쳐 주는 게, 어지간한 사연 하나씩은 다들 가지고 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시작의 마을이라 불렀다.”

그것 봐라.

은둔 고수들의 마을은 시작의…….

어라?

시작의 마을이라고?

“거기라면 이미 지나왔는데요.”

어제 머물렀던 마을.

그 마을의 이름도 시작의 마을이었다.

“거긴 가짜다.”

“가짜요?”

마을 이름이 나오자 빅터의 분위기는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짜 시작의 마을은 그런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하면…….”

“마경으로 향하던 인간의 전초기지였다. 삶과 죽음의 영역이 끝없이 교차하던 곳이지.”

어쨌건 고수들이 모인 마을인 건 맞았다.

비장한 사연이 있는 곳이란 것도 이제 알겠고.

잘 알겠는데…….

그게 마을 전체를 감출만큼 특별한 사연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숨겨진 마을이 된 건가요? 전초기지라면서요.”

가라앉은 빅터의 시선이 빽빽한 정글을 응시했다.

잠시간 이어지는 의미 불명의 침묵…….

“세상엔 굳이 알 필요 없는 진실도 있는 법이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곤 좁은 오솔길로 스며들 듯 걸어갔다.

* * *

중앙에 있는 대수림을 감싸며, 네 개의 국가와 한 개의 자유도시가 공존하는 단일 대륙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 땅을 가리켜 크루시아 대륙이라 칭했다.

내가 살고 있는 최남단 브라함 제국을 시작해, 왼쪽으론 사라센 제국이 있고 사라센을 지나면 자유도시 리베가 나온다.

그 리베를 지나면 아리안 왕국이 나오고, 아리안을 통과하면 카잔 왕국, 그리고 다시 브라함에 도달하는 것이 크루시아 대륙의 형세다.

하여 소속 국가 좌우편이 아닌 다른 국가로 이동할 경우, 무조건 여러 나라를 통과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 이유는 대수림.

일명 마경이라 불리는 숲의 바다 때문이었다.

“이곳을 왜 마경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앞장서 걷던 빅터는 불현듯 마경의 유래를 물어왔다.

“글쎄요?”

내가 답할 말이 있을까?

마경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전래 동화 같은 오래된 이야기들뿐.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유례 된 이름이 아닌가요?”

대충 이런 종류의 판타지였다.

악마와 그의 사역마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던 유일한 장소였다는.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로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믿지 않는 쪽이다. 마계니 악마니… 너무 현실감 없는 소재라서 그렇다.

“단지 숲이 무성하고 몬스터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아까 지나온 협곡만 해도 보통의 산과 들은 아니었다.

하나 빅터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사실이다.”

“사실이라고요?”

빅터는 마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 놀랄 것도 없다. 고작 30년 전 얘기니까.”

내 인생 기준이라면 오래된 얘기지만, 세대로 따진다면 고작 한 세대 위.

전래 동화라고 말하기엔 민망할 만큼 짧은 시간이다.

“그러면 지크의 영웅담이 진짜라는 거예요?”

“지크는 모르겠다만, 등장하는 지역과 사건들은 사실에 기반한 것들이지.”

신탁을 받은 빛의 용사 지크의 마왕 정벌기.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듣고 보았을 흔하디흔한 영웅담이다.

‘그게 진짜였어?’

하여간 이놈의 팔랑귀가 문제다.

빅터의 말을 듣는 순간, 안 그래도 흉흉한 이곳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쏟아져 나오는 마수에 맞서 인간들은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들과 그것들을 사역하는 악마들… 시대를 대표하는 강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이 이곳 마경이다.”

“하면 왜…….”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다.

시작의 마을도 그렇고, 마경의 유래도 그렇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의 싸움.

그 험한 시대를 승리로 이끈 영웅들이 무슨 이유로 감춰진 걸까.

“그건 말이다.”

빅터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얼굴… 어쩌면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욕심이 부른 비참한 최후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느껴지는 건 헛헛한 공허함과 가슴 먹먹한 회한들 뿐.

“그 모든 일들의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걸음을 멈춘 빅터의 시선이 한 점으로 향했다.

덩굴에 가려진 낮은 가옥과 이끼 가득한 석벽들이 있는 곳.

“이곳이 진짜 시작의 마을이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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