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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2화 (12/203)

12화

“스승님, 이 자세 맞나요?”

“제법 좋아졌구나. 그런데 밥 좀 먹고 하면 안 되겠느냐?”

“아, 식사하시죠.”

나무 그늘에 자리 잡은 우리는 도시락을 뜯어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정성스레 포장된 맛깔난 음식들이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즐겁고, 느껴지는 향기는 코를 자극해 식욕을 돋게 했다.

하나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이런 하찮은 식도락이 아니다.

‘오른팔 각도를 좀 더 좁히고, 마지막에 왼팔을 자연스럽게 뻗어 내면…….’

보다 완벽에 가까운 움직임을 위한 가상의 이미지 구축.

나는 상상 속의 나를 움직여 하나의 동작을 완성해 나갔다.

“음, 나름 먹을 만하구나. 이후에 지나갈 일이 있거들랑…….”

벌떡!

별안간 떠오른 심상 속 이미지가 동화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영감(靈感).

부아아악!

나는 지체하지 않고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이 동작은 어떤가요? 방금 떠오른 게 있어서 해 봤는데.”

“흠… 기술의 이름이 무엇이냐?”

“머리를 부수는 일격! 본 크래셔가 어떨까 싶습니다!”

“오, 그것 참 지랄 같구나. 밥이나 먹자…….”

“본 크래셔!”

“이제 그만…….”

“보오온 크래셔!”

“…….”

자리에서 일어선 빅터가 전신에 오러를 휘감았다.

“식사하시죠.”

이번엔 여기까지.

자로고 사람이란, 멈추는 순간을 알아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이집 음식 잘하네요.”

나는 양념된 밥을 집어 야무지게 삼켰다.

좋은 맛이다.

그러니 부들거리는 빅터의 주먹은 못 본 걸로 하자.

* * *

점심을 먹은 우리는 또다시 걸었다. 목적지는 마경(魔境) 대수림(大樹林).

급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한가할 틈도 없는 기묘한 여정이다.

이유는 바로 열정.

멈추지 않는 나의 수련 때문이었다.

할 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내려치기에 이은 휘두르기가 추가되니, 숫자 오르는 재미에 해머를 놓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횡 베기만 되는 줄 알았던 휘두르기는 큰 변화를 보여 줬는데.

‘이것도 인정해 줘?’

변화된 각도에서도 숙련도를 상승시켜 줬다.

핵심은 원리와 정확한 동작이었고, 횡 베기 및 사선 베기 모두 휘두르기 숙련도에 포함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수련의 폭은 몇 배로 늘어났으니.

“안 지겹냐? 조금 모자란 애들이 뭐 하나 시키면 하루 종일 그것만 하던데.”

나는 모지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재미있어 죽겠는데.’

어쩌겠냔 말이다.

안 될 때는 답답하고 힘들지만 해내고 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니 멈출 수가 없다.

“거의 다 온 것 같구나.”

걸음을 멈춘 빅터의 말에 시선을 옮겨 먼 곳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평지가 끝나는 지점.

높게 솟은 절벽 사이로, 좁게 뻗어나간 협곡이 자로 잰 듯 갈라져 있었다.

“저기가 대수림인가요?”

“그저 입구일 뿐이다. 저 계곡을 통과해야 대수림이 나오지.”

드디어 마경이다.

구전으로 떠돌던 온갖 괴담과 영웅담의 근원지.

“가자, 서두르면 노숙은 피할 수 있을 게다.”

“네.”

나는 해머를 쥔 손을 고쳐 잡았다.

“해머는 치워라.”

“네?”

“등 뒤로 메라고.”

“왜요? 이것도 다 수련의 일환인데 멈추면 시간이 아깝잖아요.”

“들어가면 휘두를 일 많이 생기니 아쉬워할 것 없다. 그보다 해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데 상관없겠느냐?”

“빨리 안 오고 뭐 하세요?”

나의 해머는 등 뒤에 걸쳐진지 오래였다.

빠른 태세 전환이야 말로 나의 숨겨진 장점이자 비기.

슬기로운 삶을 위한 유연한 행동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얍실한 놈.”

“판단이 빠른 겁니다.”

“주둥이만 살아서.”

“언변이 좋은 거죠.”

“남자 놈이 말만 번지르…….”

“그분 참 엉덩이 무거우시네. 서둘러야 한다면서요? 해 넘어가잖아요.”

빅터의 몸이 또다시 오러에 휩싸였다.

“모시겠습니다, 스승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은 멈추는 순간을 알아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그러니 부들거리는 빅터의 주먹은 이번에도 못 본 거다.

* * *

“무슨 일인가.”

가볍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로이드는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카이 형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오늘도 같은 옷이었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저 감색의 로브만 1년이 넘도록 덮어쓰고 다녔다.

“연락이 왔다고?”

“네. 세비앙 영지에서 리의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계속해 봐.”

로이드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고, 감색 로브 남자는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리는 돌프에게 죽었다고 합니다.”

“죽었어?”

“네.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로이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리의 죽음은 어차피 예상한 것이니 새삼 놀랄 것 없는 보고다.

하나 이 보고가 문제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것은 녀석의 완전한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틀 전 오후의 일이었다.

5분의 회귀가 두 번 이어진 뒤 리와 추격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건… 리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모든 게 정상이었다면, 리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일주일 전으로 되돌아 왔어야 했다.

하나 리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돌프 역시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리를 죽인 남자마저 누군가에게 당했다고 한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걸까.

“돌프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쉐인도 당했다고 합니다.”

“쉐인까지?”

“네. 범인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으로 행선지가 파악되어 추격 중이라고 합니다.”

로이드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틀어졌다.

리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판을 새로 짜야 한다는 것.

정체 모를 범인을 잡는다면 반전의 기회가 찾아올까?

“한데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라.”

“그게…….”

감색 로브의 사내는 쭈뼛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

대답을 기다리는 로이드의 표정이 짜증으로 차갑게 식어 갔다.

또 들어야 할 비보가 있다는 것이 그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말하라 했다.”

로이드는 대답을 재촉했고, 감색 로브의 사내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남은 추격대 역시 괴멸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 추격대를 괴멸시킨 사람이…….”

여기서 부터가 본론이겠지.

“빅터 크로제라고 합니다.”

쾅―!

로이드의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의 주름.

분기탱천한 중년의 남자는 소리치듯 재차 물었다.

“빅터라고?”

“네… 확실하다고 합니다.”

“큭, 크크큭… 크하하하!”

표정을 바꾼 로이드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운명인가?

아니, 잘라 내지 못한 화근 정도라고 해 두자.

“얌전하게 처박혀 있었으면 천수는 누리다 갔을 터인데. 어리석은 놈이 제 명을 재촉하는구나.”

“하면 지원병을 보낼까요?”

“놔둬라. 이빨 빠진 늙은이 따위 카이 형제면 족하다.”

“알겠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인 로브의 남자는 뒷걸음을 치며 모습을 감추었다.

* * *

쭉 뻗은 협곡의 입구.

마침내 도착한 빅터와 나는 이곳을 지나갈 방법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협곡의 길이는 대략 2㎞ 정도다.”

“긴 건가요?”

“협곡치고는 짧은 거리지. 그저 좁은 틈이라고 보면 된다.”

하기야 대충 눈으로 보아도 그렇게 보인다.

마치 인위적인 힘이 작용한 것 같은 정교한 절단면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스승님. 절벽 여기저기에 숭숭 뚫린 저 구멍들은 뭔가요?”

“그건 이 협곡의 주인인 놈들의 거처다.”

“저 많은 게 다 몬스터 둥지라구요?”

“저건 시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많이 있지.”

아니, 저런 곳을 통과하는데 마차에 침대, 거기에 간이 욕조까지 싣고 지나가려 한 건가?

그것도 사람인 내가 끌면서?

하여간 저 영감의 안전기준은 당최 가늠할 수가 없다.

사는 세상이 다른 건지.

보는 눈이 다른 건지.

어쨌거나 무슨 수가 있으니 이곳까지 온 것 아니겠나.

구시렁거려 봤자 저곳을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길 통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말씀하세요.”

“첫 번째는 몬스터를 정리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개체 자체가 약한 놈들이니, 차근차근 가다 보면 안전하게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게다.”

달리 설명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그야 말로 정석이니까.

안전제일을 추구한다면 반문할 말이 딱히 없을 정도다.

“두 번째는요?”

다음 계획을 묻는 나의 질문에 빅터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조건 달리는 거지.”

“달린다고요?”

“그래. 놈들이 쫓아오든 막아서든, 눈앞에 있는 것들만 치우면서 달리는 게다. 잘되면 빠르게 협곡을 지나가겠지만 꼬이면 죽을 수도 있지.”

“약한 놈들이라면서요?”

“약하지. 그런데 무언가가 자신들의 앞을 달려가면 흥분해서 미치는 놈들이다. 광전사처럼 변하지.”

말이 좋아 광전사지 똥개 같은 느낌이 아닌가?

앞서 달리면 흥분해서 쫓는다…….

똥개 맞잖아?

“어쨌건 위험할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고민할 필요 있나요? 굳이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럼 답은 나왔네요.”

결론을 낸 빅터와 나는 협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달렸다.

“아니 왜?!”

광기 충만하신 빅터 영감이 별안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차근차근 가면 된 다면서요!”

“그러면 늦어, 인마!”

“아익, 이럴 거면 의논은 뭐 하러 했어요?!”

“그냥 가자니 허전해서 한 게다. 정신 차리고 앞이나 살펴라.”

하여 우리는 협곡을 달리기 시작했고, 수백 마리의 똥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뒤를 따라왔다.

컹컹컹!

“이놈들 뭐예요? 개에요? 똥개?”

“미친놈, 딱 보면 모르냐? 늑대인간이 아니냐.”

처음 알았다.

늑대인간도 컹컹 거린다는 걸.

또한 영감 수준 정도가 되면 이런 놈들도 약한 개체가 된다는 걸.

“왼쪽에 두 마리 온다. 네놈이 처리해라.”

그리고 하나 더 깨달았다.

콰직―

캐엥!

나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이놈아,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

“늦는다면서요.”

내 안의 광기 또한 영감에게 뒤지지 않았다.

전사, 혹은 투사.

여태껏 모르고 있던 나의 또 다른 자아는 비로소 개화해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거리 대략 1,500m.’

달리는 발이 대지를 박차고, 평범한 나의 시간은 흥분으로 가득 찬 열탕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각성.

풍차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은 빅터를 만나 신세계로 이어졌다.

고작해야 2박 3일 차.

밀도 있게 채워진 짧은 시간들은 나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대장간 잡일이나 하던 놈이 몬스터를 때려잡다니.

“보온 크래셔!”

아무래도 나의 몸엔.

“저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싸움꾼에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콰지직― 빠각!

부아아악!

피륙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이반! 뒤를 봐라!”

“알고 있어요!”

캐에엥!

콰드드득―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고!”

“간다, 이놈아.”

툴툴거리는 빅터를 두고 나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늑대인간들.

“보오온 크래셔어어어어어!”

무리를 박살 낸 나는 또 다른 놈들을 찾아 신나게 달려 나갔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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