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만, 마을로 올라갔을 줄이야.”
뒤늦게 올라온 빅터 영감은 정색을 하며 혀를 찼다.
마을 밖 고블린 본대는 이미 괴멸된 상태.
전투가 시작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고블린 로드는 행적을 감췄다고 한다.
“본대를 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뭐냐.”
빅터는 고개를 저으며 로드의 사체를 살폈고, 형체가 사라진 놈의 상반신을 보며 쓰게 웃었다.
표정의 의미가 모호한 얼굴이었지만 이후의 대답은 확실했다.
“제법이구나. 잘해 주었다.”
결과에 만족한 듯, 빅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시선을 돌려 여기사 로제를 바라보았다.
“허허, 이러니 고블린 로드가 사라졌지.”
로제를 바라보던 빅터는 코끝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혹시, 쿠르쿠마로 만든 향수를 사용하셨는지?”
“아… 네, 제가 살짝 뿌리긴 했는데……”
쿠르쿠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짙은 향이 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을 회관 안에서는 물론 탁 트인 이곳에서도 느껴졌으니까.
“저런, 큰일 나실 뻔했군요. 고블린 녀석들은 그 냄새에 아주 민감하답니다.”
“그런… 어쩐지, 이 녀석들 죽자고 저만 따라 오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했네요.”
로제는 몸서리를 치며 빅터의 말에 대답했다.
향수가 문제였다니.
놈들의 광기는 이 달콤한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귀족 사이에선 꽤 유행하는 향수지만 외지에선 이런 참사를 부르곤 하지요. 하여 변방을 지나는 귀족 중에 희생자가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그렇군요. 저희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만, 이분 덕분에 다행히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공손히 답하는 로제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상황이 차분해진 탓인가?
이제 와서 보니 상당히 예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갖추고 있는 복장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랄까.
“한데, 기사라고 하기엔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곱군요. 한 송이 가녀린 꽃 같습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빅터의 말인즉, 서임 받은 기사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니까.
희고 가녀린 팔.
검은커녕 막대기 하나 잡아본 적 없는 손이다.
한데 그녀는 기사인 척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머… 당치 않으십니다. 꽃이라니요. 자주 듣긴 했지만 부끄럽습니다…….”
“아가씨!”
홍조 가득한 로제와 그를 말리는 도로시.
처음 볼 때부터 그랬지만 어디를 봐도 무관의 모습은 없다.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빅터와 로제는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아니, 시작했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아리안 왕국의 고귀한 혈통이자, 풍요의 땅 카슈타르의 주인,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님의 하나뿐인 영애, 로제 데 카슈타르이십니다.”
몸종의 소개에 로제는 사뿐히 예를 갖췄다.
빅터 역시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눈썹을 까딱거렸다.
‘귀찮게.’
나는 목청을 다듬으며 로제와 그의 일행을 향해 인삿말을 뱉어냈다.
“곁에 계신 이분은 1,000명을 홀로 대적한 검의 달인, 고고한 아케른의 별이자 헤모니아의 야수 카르간을 쓰러뜨린 저의 스승 빅터 크로제이십니다.”
“어머나! 귀하께서 그 유명하신 빅터 크로제 백작님이신가요?”
그 유명하신?
로제가 아는 빅터와 내가 아는 영감은 이름만 같은가 보다.
사람을 말 대신 끌고 다니는 변태 영감인데… 도대체 얼마나 유명하기에 타국의 여인마저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과찬입니다. 그저 늙어 가는 오지의 변경백이지요.”
고강한 무술 실력에 연륜 있는 나이, 높은 양반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건 너무 높이 올라갔다.
백작님이라니, 그것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변경백이다.
‘어쩐지…….’
사람 부려 먹는 솜씨가 남다르다 했다. 국경을 책임지고 있으니 오죽했겠나.
“과찬이라뇨. 오러 마스터가 과찬이면 저희 같은 범재들은 어찌 살아야 한답니까.”
로제는 살갑게 웃으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와 같은 어벙함은 보이지 않는 것이, 확실히 귀족의 면모가 행동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하하하, 젊은 영애께서 입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놀라운 말과 행동들이 오가고 있지만, 그중에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빅터였다.
‘오러 마스터라고?’
직접 들은 바 없으니 그의 성취도는 알 수 없었다.
딱히 물어볼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성 앞 풍차 마을 사건으로 빅터의 강함은 이미 논외 대상이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소개한다고 주절주절 떠들 필요도 없었잖아.’
1,000명을 대적하든, 야수 카르간을 쓰러뜨렸든 다 필요 없다.
오러 마스터 빅터 크로제 백작.
담백한 열두 자면 모든 게 종결된다.
현 시대의 정점이니까.
그 이상의 경지는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혼자 다니는 거야?’
호위 무사는커녕 그 흔한 몸종이나 종자도 없었다.
그러니 상상이나 했겠나.
‘이거… 제대로 올라탔는데?’
내가 정점과 인연이 되다니.
쥐고 있는 인연과 혈통이 전부인 세상이다.
그 하나로 나의 존재는 특별하거나 비참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오러 마스터 빅터 백작님의 제자입니다.
이 한마디가 주는 기대와 신뢰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솔직히 빚 대신 팔려온 종자 비슷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금화는 두둑하니까.’
이상한 수집욕을 가진 고블린 로드 덕분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제법 든든해졌다.
그러니 채무자라는 족쇄를 잘라 버리면…….
‘당당한 사제 관계가 되는 거지.’
괜스레 위축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싫으면 언제든 때려치울 수도 있고.
“한데 국경을 넘으실 때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최근 카잔과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터라 국경 통과가 쉽지 않습니다만.”
“아리안 왕국이야 중립에 가까운 나라니까요. 약간의 쟁점은 있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답니다.”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의 말에 수긍했다.
이제 슬슬 떠날 시간.
“저희는 가던 길을 갈 예정인데, 영애께서는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까?”
빅터는 떠날 차비를 하며 로제의 일정을 물었다.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요. 저희는 내일쯤 이동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러면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가시는 여정에 축복이 함께하시길.”
빅터는 가벼운 목례로 이별을 나누었고.
“기다리겠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로제는, 속삭이듯 웅얼거리며 새침하게 돌아섰다.
* * *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이제 적응하기 시작했구나.”
끔찍했던 새벽의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한바탕 난리를 치른 지금은 오히려 가뿐한 상태였다.
그 모든 괴로움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멀쩡해진 나의 몸은 아침과는 다르게 편안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며칠은 고생할 거라 생각했는데, 네놈도 정상은 아닌 게야.”
누가 할 소릴.
본인이야 말로 대륙 최고의 비정상 아닌가.
“어제도 말했지만, 근육은 상처와 치료를 반복하면서 강해진다.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혹사시키고, 회복하면서 점차 한계를 확장시키지.”
“그렇지만, 너무 과하면 탈나는 법 아닌가요.”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지. 그런데 네놈은 인간이 아니잖느냐.”
“무슨 소리에요. 이상한 걸로 트집 잡지 말아요.”
마차 끄는 모습만 보면 신종 몬스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족 보행 뭐 그런 거.
“술통만 한 해머를 휘두르고, 마차를 끄는 순간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게다. 오러가 없는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
결국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사람을 추켜세우고 나면.
“흠… 길도 평탄하니 달리기 좋은 가도구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죄악이지… 수련이다! 전방의 고갯길까지 전력 질주!”
“네?”
이런 미친 짓을 시킨다.
“달리라고 이 녀석아!”
“어떻게 달려요!”
어찌 이리 한결 같을까.
함께한 지 고작 하루가 지났건만, 저 양반의 성격이 어떤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아이익!”
꼬였다. 꼬여서 시키는 것마다 죄다 이상하고 해괴망측하다.
“좋아! 속도가 붙는구나!”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나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지금 이 마차는.
“이런 미친놈을 봤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달려온 걸까.
걷다 달리길 반복하며 지나온 길은 어느덧 세비앙 영지를 벗어났다.
이윽고 당도한 작은 역참 마을.
입구에 붙은 마을 명판이 이채롭다.
『시작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작의 마을?’
참으로 요상한 이름이다.
보통 마을 이름이라고 하면 무슨무슨 언덕이나, 노을, 강변 혹은 지역 이름이 붙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하기야 마을 이름이 어떻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쉴 수 있는 공간과 주린 배를 채워 줄 식당뿐이었다.
“저 앞의 여관으로 가자.”
수상한 명판을 지나쳐 빅터가 일러 준 여관으로 향했다.
“어이쿠 사람이잖아?”
그러고는 기겁하는 남자 앞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게… 끈다고 끌려와 지는 건가?”
마을 주민들은 나와 마차를 번갈아 보며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당장 질문을 쏟아 낼 기세랄까.
‘말시키지 마라.’
쓰러지기 직전이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아직 기운이 넘치는구나.”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최소한 두 발로 서 있을 정도는 된다.
“기운은 모르겠고, 허기져 죽겠네요.”
무리해서 도착한 역참이다.
시간이나 이동 거리를 따진다면, 이곳에 오기 전에 야영을 하는 게 맞는 일정이었다.
― 내일부터 대수림을 가로지를 테니, 오늘은 편하게 쉬도록 하자.
하여 세 시간을 더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
뭐랄까…….
마지막 만찬 같은 개념이다.
“짐은 어떡하죠?”
“여관 주인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물건이니 개인 물품만 챙겨 오너라.”
“가시죠.”
필요한 짐을 챙긴 나와 빅터는 허름한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관 1층.
대충 자리 잡은 4인용 테이블 몇 개가 우릴 환영하며 자태를 뽐냈다.
가장 가까운 곳을 택해 털썩 주저앉은 나는, 숨도 고르지 않고 큰소리로 주인에게 외쳤다.
“이집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 다 가져오세요!”
“네?”
“뭐, 인마?”
‘네’는 여관 주인이고 ‘뭐 인마?’는 빅터 영감이다.
“다 주세요! 최대한 빨리!”
배고픔에 눈이 뒤집힌 나는 고함치듯 크게 답했다.
“이 녀석아, 누구 맘대로 음식을 시키는 게야?”
“제 맘대로요.”
“돈은 내가 내는데?”
“제가 쏠게요.”
맞다. 내가 쏠 예정이다.
그러니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시켰다.
“그럴 돈은 있고?”
“스승님보다 많을 걸요?”
나는 전대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집어던졌다.
무심하게.
돈 좀 만져 본 놈처럼.
“어쩌라는 게냐?”
“열어 보세요.”
빅터는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며 전대를 주워들었다.
“…….”
익숙한 촉감에 멈칫하는 빅터.
이윽고 주머니를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 냈다.
촤르르르―
황금빛 동전은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테이블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이, 이게 다 뭐냐?”
이 양반이 노안이 오셨나.
거 딱 보면 모르나?
“골드잖아요. 골드.”
그것도 무려 42골드.
대장간 잡부 시절로 계산하면 14년을 숨만 쉬고 살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다.
먹고, 자고, 입고, 깝죽 대고 다니면 평생을 일해도 못 모을 돈이고…….
귀족인 빅터의 입장에서도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거금인 것이다.
그러니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아니겠나.
“허허…….”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턱 끝이 올라간다.
“이놈, 설마 도둑질을?”
“뭐랍니까. 그럴 시간이나 있었나요.”
“그러면 어디서 이런 거금을 구했단 말이냐.”
“전리품입니다.”
“전리품?”
빅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 게 뭐 있나.
사냥한 거라곤 고블린 뿐인데.
“고블린 로드요.”
나는 영감의 생각을 자르며 골드의 출처를 밝혔다.
끝이 아니다.
굴러다니던 골드를 모아 10개를 따로 떼어 냈다.
그러곤 빅터의 앞으로 가지런하게 밀었다.
“뭐하는 게냐?”
“빌린 돈을 갚는 겁니다.”
“허허… 이 녀석이.”
빅터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화를 바라봤다.
“난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건만.”
“헐…….”
순간 지진이 온 듯 동공이 흔들렸지만 의연하게 버텼다.
아까워하면 안 된다.
무릇 인간의 관계란 주고받을 게 없어야 진정성이 생기는 법.
나는 이 찝찝한 부채감을 털어 내고 싶다.
하여 벗어나고 싶었다.
고아로 시작된 객식구의 삶.
빚에 떠넘겨져 누군가에게 종속된 삶을.
“받으시죠.”
“흐음…….”
“그 대신.”
나는 빅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엄청 귀찮게 할 겁니다.
“나도 빡세게 굴려 주마.”
대충할 생각 없으니까.
이제부터가 진짜 나의 길이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