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9화 (9/203)

09화

“저기요… 이 육포는 왜?”

하라는 손등 키스는 않고, 시뻘건 고깃덩일 덥석 쥐어 준 남자.

“……”

남자는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표표히 자릴 떠났다.

“도로시.”

“네, 아가씨.”

“나… 드디어 짝을 찾은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로제는 눈을 빛내며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완벽해!”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상대는 저런 남자여야 한다.

강하고, 숨 막히게 멋지다.

“좋아, 내 남자로 만들어 주지!”

“무슨 수로요?”

“엉? 그야 당연히 나의 뛰어난 미모로…….”

도로시는 벽에 붙은 거울을 뜯어 로제에게 내밀었다.

“거울? 거울은 왜?”

그리고 로제는 털썩 주저앉았다.

정체불명의 이물질이 더덕더덕 달라붙은 머리와 얼굴.

아리안 왕국의 대표 미녀이던 로제는 그곳에 없었다.

“갑옷까지 걸치고 계시니 아주 씩씩하고 듬직해 보이시네요.”

확인 사살을 날린 도로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울을 치웠다.

* * *

마을 회관을 나와 널브러진 고블린 사이를 걸었다.

처참하게 으깨진 육편 조각과 알 수 없는 분비물들.

발밑에 달라붙은 그것들은 끈질기게 매달려 질척거리고 있었다.

“쯧…….”

땅바닥에 발을 비비며 이물질을 털어 냈다.

부츠는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어슬렁대던 고블린은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을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곁으로 다가온 남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부상을 입은 듯하지만, 수준은 경미하다.

“영지 소속 경비병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어찌 알고 저희를 도와주신건지…….”

“지나는 길에 어린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훌쩍거리던 꼬맹이를 떠올리며 남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혹시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많은 녀석 아닙니까?”

“네. 당신처럼 붉은 머리였습니다.”

“아… 무사했군요.”

남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

‘빼다 박았네.’

활짝 웃는 남자와 꼬마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놈들을 모두 처치했으니 이제 사람들을 데리러 가야겠습니다.

“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들떠 있는 남자를 향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진짜 보스는 아직 등장조차 안 했으니까.

“고블린 로드가 남아 있습니다.”

훨씬 많은 수를 거느린 본대와 함께 말이다.

“고블린 로드요?”

아이의 아빠는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염려치 말라 전하려 했으나 말을 접었다.

그것은 빅터의 영역.

영감이 돌아오기 전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뭐…….’

솔직히 걱정은 안 된다.

가장 무서운 괴물은 영감이니까.

로드고 나발이고, 마주치는 순간 사망 확정이다.

그러니 느긋하게 기다릴 일만 남았다.

분명히 그럴 터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흐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니겠나.

빅터와 헤어진 마을 어귀를 바라보며 혹시 모를 사태를 떠올렸다.

아무리 빅터가 강하다 한들 마주쳐야 쓰러뜨릴 터.

행여나 재수 없게 엇갈리기라도 한다면.

“아악! 살려 주세요!”

저렇게 엉뚱한데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고, 고블린 로드! 와아악!”

로제라는 여기사와 그녀의 일행들.

즉, 몸종으로 보이던 여자 한 명과 다 죽어 가던 기사 하나가 사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등 뒤에 커다란 혹을 달고서.

“아이고…….”

말이 씨가 된다더니.

방정맞은 주둥이가 사달을 불러왔다.

“꺄아아아아아!”

피리 소리 같은 여기사의 비명이 마을 가득 울려 퍼졌다.

그에 호응하듯.

고블린 로드는 괴성을 지르며 여기사의 뒤를 쫓았다.

크에에엑!

요란하게 번쩍이는 넓적한 칼이 놈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위험하다.

당장에라도 내리칠 흉흉한 기세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나설 수밖에.

감아쥔 해머를 들쳐 매고 여기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금발의 여기사.

“와 주셨군요!”

마주친 그녀의 두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찰랑이는 금발을 휘날리며 내 품에 안겨 들려 했으나.

“머리 숙여요.”

그대로 지나친 나는 해머를 들어 크게 휘둘렀다.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진 건 힘뿐이지만, 그걸로 오러 유저를 꺾었다.

고블린 로드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네놈이 4성 오러 유저보다 강하진 않겠지.

쩡―!

둔탁한 울림과 함께 놈의 칼과 나의 해머가 격돌했다.

크에에엑!

결과는 나의 완벽한 승리.

허공에 떠오른 건 놈이 휘두르던 넓적한 칼이었다.

맞부딪쳐 오던 놈의 칼은 몇 번의 회전 끝에 지면에 들이박혔고.

크륵…….

놈은 쭉 찢어진 눈알을 뒤룩거리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영악스런 놈이네.”

상황의 유불리(有不利)를 이해하는 녀석이다.

잃어버린 무기를 찾을지, 그대로 공격할지.

놈은 나를 보며 최적의 상황을 찾고 있었다.

“잘 골랐어.”

놈의 선택은 무기.

녀석은 슬금슬금 자신의 무기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지능이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 번의 격돌로 이미 힘겨루기는 끝난 상태니까.

나는 놈이 생각보다 약해서 놀랐고, 놈은 내가 생각보다 강해서 놀랐을 것이다.

“대가리 굴릴 거 없어. 어서 가서 집어.”

…는 개뿔!

칼자루를 향해 몸을 날린 놈의 푸르죽죽한 손등을 거대한 해머가 납작하게 짓이겨 버렸다.

콰지직―

끄에에에에에!

고통에 찬 괴성이 마을을 뒤흔들었다.

고블린 로드는 작살나 버린 손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고, 정신없이 흔들리는 놈의 동공을 향해 나는 깔끔한 마무리 일격을 때려 넣었다.

쩌저적―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 무리의 왕은 질척한 뇌수를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이렇게 또 한 번 생명을 빚지게 되는군요.”

어느새 다가온 여기사가 두 손을 모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이반입니다.”

“아, 이반 님…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신지… 혹시 풀 네임을.”

“그냥 이반입니다.”

“그냥 이반……. 음, 성이 없으시다…는 말이군요.”

그 말인즉 하찮은 평민이란 뜻이다. 그러니 그만 불편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은인이신데 보답을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딱히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보다 고블린 로드가 가지고 있던 물건에 더욱 큰 호기심이 일었다.

‘흠… 제법 잘 만든 검인데.’

몬스터 주제에 이런 건 어디서 구했을까 싶다.

설마 만든 건 아닐 테고.

“좋은 칼이군요. 아마도 지나가는 상인이나 어설픈 귀족 기사에게서 뺏었겠죠.”

금발의 여기사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썼다.

“아가씨 같은 기사군요.”

하나 그런 그녀의 노력은 몸종에 의해 허사가 되었다.

“뭐, 뭐래는 거야?”

“그렇잖아요. 칼은 다룰 줄도 모르면서 번쩍거리는 비싼 걸로 차고 다니고, 갑옷도 세공만 잔뜩 해 놔서 이게 방어구인지 파티복인지도 모르겠으니까요.”

거침없는 몸종의 말에 여기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아리안 왕국의 꽃이라는 분이 도대체 왜 이러지는지 모르겠네요. 평소에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데!”

왠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무시하자.

“참으로 영민하고 곱디고우신 분이 왜 이러시는 건지. 아가씨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다들 넋을 잃을 텐데요.”

자기들끼리 윙크를 보내 건 말 건, 상관할 바 아니다.

저 여기사는 귀족이다.

그것도 꽤나 명망 있어 보이니, 나와는 그 어떤 접점도 없는 높으신 종족이다.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마을 회관에서 말씀드렸는데.”

“로제 데 카슈타르.”

“맞아요. 그게 제 이름이죠. 지금은 보답할 방법이 없지만… 아리안 왕국에 오시게 된다면 이걸 보여 주세요.”

여기사 로제는 펜던트를 풀러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초승달에 검이 교차하는 문양.

보아하니 가문의 문장이 분명하다.

“그 누가 됐건 극진히 대접할 것입니다.”

“이런 귀한 걸 왜…….”

생명을 구했으니 보답하려는 마음은 알겠다.

잘 알겠는데… 통성명을 통해 언질 했듯, 나는 성이 없는 평민이다.

그러니 저런 호의는 너무 과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불편한 친절일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저 같은 평민이 다룰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정중히 펜던트를 돌려줬다.

“평민이 왜요? 은혜를 갚는데 평민 귀족이 따로 있나요?”

여기사 로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브라함 제국은 어떻지 몰라도, 저희 아리안 왕국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신분만으로 논하지 않아요.”

펜던트는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고, 로제는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카슈타르는 이반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릴 겁니다.”

귀족답지 않은 그녀의 화법에 내심 감탄한 것도 잠시, 나는 그녀가 한 말을 곱씹으며 무언가를 떠올려야 했다.

‘잠깐… 카슈타르라면?’

― 아리안 왕국의 카슈타르에 가 보거라.

대장간을 떠나던 날, 데릭이 알려 준 문제의 그 장소였다.

‘이거야 원…….’

이런 걸 가리켜 운명이라고 하나?

내 뜻과 상관없이 목적지가 스스로 정해지는 느낌이다.

‘이러면 갈 수밖에 없지.’

이제 카슈타르는 방문 확정지다.

“알겠습니다. 아리안 왕국에 방문하게 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호의에 답했다.

로제는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가볍게 화답한 뒤 고블린 로드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널브러진 고블린 로드를 보자니, 챙겨야 할 물건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먼저 놈이 사용하던 넓적한 검.

만듦새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단 소재가 독특했다.

‘이런 건 처음 보는 건데.’

대장간 문턱을 넘은 지 10년이 지났건만, 이 검의 소재는 본 적 없는 낯선 재질이었다.

그러니 일단 챙기고.

다음은 팔뚝에 차고 있던 완갑이다.

자꾸 거듭해서 말하게 되는데.

이 자식, 몬스터 주제에 사람처럼 장비를 걸치고 있다.

완갑이라니.

나도 아직 만져 보지 못한 물건이거늘.

“딱 들어맞는군.”

마치 내 물건처럼 팔뚝에 착 달라붙는다.

그리고 마지막 전리품인 이것.

허리에 차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전대의 형태다.

‘설마, 돈주머니는 아니겠지.’

돈 모으는 몬스터라…….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만약 이 자식이 돈을 들고 있다면, 나는 몬스터보다 가난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돌조각 따위보단 돈이 낫지.

암… 당연하고말고.

실없는 망상과 함께 전대를 들어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나는.

“어억?!”

익숙한 감각에 헛숨을 내뱉었다.

절그럭거리는 이 느낌과 질감은 분명히 주화의 그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끽해야 동화 몇 개겠지.’

실망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대하지 않는 것.

애써 부정한 생각을 떠올리며 손바닥 위로 전대의 입구를 맞대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작은 주머니를 뒤집었다.

뒤집었는데…….

좌르르륵―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묵직한 감각이 좁은 손바닥을 덮쳐 왔다.

‘…좌르르륵?’

황급히 눈을 뜬 나는 손바닥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몬스터보다 가난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으니까.

“나 빼고 다들 부자였구나…….”

손바닥을 채운 황금색 동전은 이제 가득하다 못해 주르륵 쏟아지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