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저 앞에 산자락 보이시죠? 거기만 돌아가면 바로 마을이 나옵니다.
“생각보다 멀지는 않네요?”
의외였다.
솔직히 상당한 거릴 예상했건만, 찾아온 마을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데 마을의 위치가 이상했다.
‘보통은 능선 바깥에 터를 잡는 법인데…….’
이 마을은 산자락 사이에 있어 발견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용케 마을을 꾸미셨네요.”
이렇게 외진 곳에 마을을 만든 것도 용하고, 살고 있다는 것도 대단했다.
그래서 문제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으니 뭔들 안 찾아왔을까.
고블린이 아니라 오크가 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건 화전의 흔적이구나.”
한눈에 보이는 듬성한 비탈.
빅터는 산자락 안쪽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영주님 눈을 피하다 보니…….”
노파는 주눅 든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들의 정체는 영지를 불법 점거한 화전민들.
화전을 일굴 땅을 찾아 이 외진 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마을 주변엔 고블린 군락이 형성되어 갔고, 불법 점유자인 마을 사람들은 당연한 도움조차 요청하지 못했을 테다.
‘터전을 잃거나 노예가 될 테니까.’
어느 쪽이든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닌 듯했다.
“안내는 이쯤에서 끝냅시다. 여기서부턴 나와 이 녀석만 갈 테니 노파는 물러가 계시오.”
한사코 따라온 노파는 그제야 걸음을 물렸다.
계속해 걷는 사람은 나와 빅터뿐.
“요령을 알려 주마.”
빅터는 바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고블린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놈들은 단순하다.”
무작정 덤벼들고 또 덤벼든다.
오죽하면 진격의 난장이라 하겠나.
“공격 패턴도 위아래, 그리고 좌우뿐이지… 어쩐지 네놈이랑 비슷하구나.”
“헐……”
수치스럽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공격 패턴만 따지자면 고블린이 나보다 하나 더 많다!
“그러니 너처럼 초심자가 상대하기 아주 좋은 놈들이다. 포위되는 것만 주의하거라.”
단순하니까.
물론 그 단순함을 극복할 무언가는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이해했느냐?”
“이해는 했죠.”
“좋아 그럼 가거라!”
“어디를요?”
“어디긴 마을이지.”
빅터는 다짜고짜 나를 마을로 내몰았다.
하여 되물었다.
“저 혼자요?”
나 혼자 가는 게 맞는 건지.
“그래. 마을은 너 혼자 들어가라.”
“……”
빅터는 하나뿐인 제자를 미끼로 만들려 했다.
그럼 몸빵은?
괴수인 당신이 안 하면 누가 하냐고?
“뭐 하고 섰어?”
한데 이 영감은 진심이었다.
“50마리가 있대요.”
“나도 들었다.”
“마을 안에 있다니까요?”
“나도 안다고.”
그런데 날 혼자 보내?
아무리 하위 몬스터라고 해도 무려 50마리다.
힘 하나 믿고 덤비기엔 너무 과한 숫자가 아닌가.
“잊어버리신 거 같은데요. 저 무기 잡은 지 고작 하루 지났어요.”
“충분해.”
“아니요, 그럴 리 없어요.”
방심한 인간을 쓰러뜨리거나, 암반을 때려 부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처음 겪어 보는 일대 다수의 상황이 아닌가.
“등 뒤만 내주지 마라. 그것만 지킨다면 50마리 쯤은 순식간에 사라질 게다.”
무슨 메뚜기 잡는 것처럼 말하지만 상대는 어엿한 몬스터다.
그리고 나는 그 몬스터 사냥이 처음인 인간이고…….
“마주하면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게다. 걱정하지 말고 가거라.”
그런 내게 빅터는 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이렇게 된 이상 믿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스승님은요?”
“마을을 털러왔으니 로드도 따라왔을 터. 나는 마을 외부를 돌면서 로드와 본대를 찾을 생각이다.”
경로를 묻는 나의 질문에 빅터는 놈들의 대장을 지목했다.
몬스터 주제에 잔머리를 굴리고 몸을 사리는 녀석.
마을이 완전히 함락될 때까지, 놈은 바깥에 머물며 본대와 함께 기다릴 것이다.
그게 고블린 로드의 습성이니까.
“표정이 왜 그래? 네가 로드를 찾을래?”
“다녀오시지요.”
생각해 보니 50마리가 더 쉬울 것 같다.
고블린 로드는 오크조차 한 수 접어주는 흉악한 놈.
같은 괴수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뒤통수 조심해라!”
망할 영감의 당부를 뒤로하며, 나는 마을 입구로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저쪽이 좋겠군.’
당연히 정문은 아니다.
무슨 환대를 받겠다고 당당히 마을 정면으로 가겠는가.
적당히 허술한 담장을 지나 마을 측면을 파고들었다.
일단 그렇게 들어오긴 했는데.
케에에엑?
시작부터 고블린 한 무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뭐지… 이 심리적 안정감은.’
빅터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주하면 알 거라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이해됐다.
일단 작다.
성안에서 보던 꼬맹이들만 하다.
아니, 그보단 크려나?
외모는 험하지만 녀석들의 작은 체구는 안도감을 불러왔다.
하나 방심은 금물.
부아악― 콰직!
한 방에 머리를 터뜨리며 마을로 전진했다.
인간이 아니니 죄책감도 그리 생기지 않았다.
키에에엑—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놈들에게 차례로 해머를 내리찍었다.
스쳐도 사망이라고, 술통만 한 망치머리는 부딪치는 모든 걸 박살냈다.
‘좋아, 영감 말대로 충분해!’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성큼 걸어 마을 중앙으로 나섰다.
마을의 풍경은 평범했다.
그저 적당한 오두막이 듬성듬성 자리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랄까.
하나 왼쪽 구석에 있는 저 집만큼은 유달리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저기 있네. 여기사.’
바글바글한 고블린을 보니 저기가 최종 목적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
“흐흐흑! 아가씨,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요?”
“닥쳐! 더 이상 말하지 마! 차라리 장렬하게 싸우다 죽자. 너도 칼 들어!”
앙칼진 표정으로 검을 뽑아든 금발 벽안의 여인.
호기롭게 소리치며 전의를 불태웠으나, 실상은 충격과 공포로 정신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하아… 이젠 틀린 것 같아요. 몸종 팔자는 주인 따라간다더니, 철딱서니 없는 주인을 만나 객사하게 생겼군요. 하필 고블린이라니… 뭔가 웅장한 몬스터라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을 텐데.”
“닥치라고!”
정신 나간 몸종의 말에 금발의 여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객사라니……
이런 헛된 죽음 따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로제 아가씨,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볼 테니 그 틈에 빠져나가세요.”
“도로시!”
로제라 불린 금발 여인은 몸종의 이름을 사납게 외쳤다.
“내가 분명히 닥치라고 했지?! 입 다물고 칼이나 들어! 그리고 휘둘러!”
풍성한 금발에 짙고 깊은 파란 눈.
화려한 갑옷에 빛나는 검을 든 그녀의 이름은 ‘로제 데 카슈타르’다.
아리안 왕국의 손꼽히는 명가이자 풍요의 땅 카슈타르의 주인.
제논 데 카슈타르 백작의 영애인 그녀는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 결혼이라뇨? 저는 누군가의 신부로 늙고 싶지도 않고, 그런 남자와 살기도 싫어요!
결혼해서 얻는 건 고작해야 안주인이란 칭호뿐.
평생을 한 남자의 그늘에 파묻히는 수동적인 삶 따위, 바란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예비 신랑이라던 그 녀석은 어떠한가.
‘더럽게 못생겼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잘난 구석 하나 없는 신기한 몸뚱어리였다.
그런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하는 기분은 어떨까.
음식이 넘어가긴 할까?
‘절대 못 삼키지!’
하여 그녀의 반항이 시작되었다.
신부 수업이나 하라는 부친의 말을 요리조리 피해 시간을 끌었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실을 찾으며 끈질기게 외삼촌을 설득.
기어코 이 원정에 동참했건만, 결과는 이런 끔찍한 참사였다.
“외삼촌만 계셨어도…….”
고블린 따위에 쫓기진 않았으리라. 그녀의 외삼촌은 아리안의 혼이라 칭송받는 당대 최고의 기사가 아니던가.
한데 하필 외삼촌이 다음 여정을 살피러 간 사이, 이런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신 차리고 버텨 도로시! 외삼촌이 올 때까지만 견디면 돼!”
말이야 이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부질없는 희망이다.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잖아요… 우린 끝났어요.”
외삼촌은 오늘 아침에 떠났으니까. 아무리 빨리 돌아온들 여기는 이미 끝난 뒤일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
로제는 어설픈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함께 있던 견습 기사 둘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
마지막 남은 중급 기사 한명이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지만, 솔직히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버텨낼 수 있을까?
신이 우릴 지켜 주실까?
하지만 로제의 바람은 하늘에 닫지 않았다.
“끄아악!”
가까스로 버티던 마지막 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꺄악! 아가씨!”
평생을 함께 살아온 도로시는 고블린의 손에 머리채를 붙잡혔다.
“안 돼! 도로시!”
로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몸종이지만 친자매나 다름없던 그녀다.
“꺄아아악!”
그런 도로시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지켜보는 로제의 머릿속에 두 가지 단어가 쉼 없이 교차했다.
좌절, 그리고 체념.
“이럴 바엔 차라리…….”
도로시의 목숨을 거두고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콰지직―!
거대한 쇳덩이가 내리꽂히며 눈앞의 고블린이 폭발했다.
이런 게 기적이란 걸까.
갑자기 등장한 거구의 남자는 엄청난 속도로 해머를 휘둘러 댔다.
꿈을 꾸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
시커먼 해머가 호를 그릴 때마다 고블린의 머리는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남자의 공격은 폭풍처럼 몰아쳤고, 마을 회관을 꽉 채우던 고블린들은 어느새 다진 고기가 되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누구지?’
창틈으로 쏟아지는 역광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외삼촌?’
로제는 외삼촌을 떠올려 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외삼촌은 저렇게 거대하지 않은 탓이었다.
게다가 이런 굉장한 해머를 휘두르지도 않고, 이 시간에 여기 있을 리도 없었다.
하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런 로제의 생각에 답하듯, 의문의 남자는 창가로 다가섰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감춰진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고.
“하아…….”
외삼촌이 아니라는 걸 로제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외삼촌, 그러니까 엄마의 남동생은.
“잘생겼어…….”
저렇게 멋지고 잘난 얼굴이 아니었다.
* * *
징그러운 놈들.
저 많은 고블린의 목표가 고작 여기사와 몸종 하나라니.
집착하는 이유야 모르겠다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아 있는 주민들은 오히려 안전해진 상황이었다.
“마을 회관은 제가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생존자 분들을 모아 주세요.”
마을 외곽의 고블린을 정리하고 대치중이던 남자들을 구해 냈다.
이제 여기사를 구할 차례.
통나무로 지어진 작은 회관 건물은, 빙 둘러싼 고블린으로 인해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현관은 물론이요, 창문에 지붕까지.
놈들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벽을 물어뜯으며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벌레가 따로 없네.’
썩은 고기에 모인 파리 때 같은 모습이다. 그러니 저 안쪽은 얼마나 끔찍할까.
“후우…….”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마을 회관을 향해 달려갔다.
작전은 걷어 내기.
몰려 있는 놈들을 유인해 좁은 장소로 가는 게 일차 목표였다.
한데 그럴 수고를 덜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시당했어…….’
놈들은 집안의 여기사에게 미쳐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유리 같은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지만,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무시해 줘서 고맙다, 이 땅꼬마 새끼들아!’
시쳇말로 주워 먹기랄까.
이런 현상은 내부 진입에 성공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꺄악, 아가씨!”
“안 돼, 도로시!”
때마침 두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에 고블린들은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놈들이 흥분할수록 나의 존재감은 더욱 옅어져 갔고, 그럴수록 놈들의 뒤통수는 무방비로 변해 갔다.
‘나야 고맙지.’
눈먼 고블린 사냥은 광풍처럼 회관 내부를 들쑤셨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숫자들의 향연과 점점 늘어 가는 고블린의 사체들.
“괜찮으신가요?”
마침내 나는 쓰러진 여기사와 얼굴을 마주하는 데 성공했다.
“……”
하지만 여기사와 또 다른 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사한 건 분명한데 반응이 없다.
의아한 마음에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
“웬일이니…….”
침묵을 깬 여기사는 헛숨을 들이키며 낮게 중얼거렸다.
반쯤 풀려 있는 깊고 푸른 눈.
“미쳤다. 저 얼굴……“
“아가씨!”
금발의 여기사는 마을의 여자들과 똑같은 소릴 하며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덕분에 이렇게…….”
얼빠진 여기사를 대신해 곁에 있던 여인이 공손히 예를 표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대의 얼굴이 내 심장을 폭행하는군요……”
여기사는 생명의 은인인 나를 범죄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로제 데 카슈타르.”
눈앞의 여기사는 홍조를 띠우며 살며시 손을 내밀어 왔다.
‘……?’
어쩌라는 걸까.
앞으로 뻗은 희멀건 손은 무슨 뜻이며,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잡으라는 건가?
덥석.
“아읏, 그렇게 세게 쥐시면…….”
이것도 아니야?
하여간 귀족들의 예법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인사 한 번으로 끝나면 될 일을 참으로 어렵게 끌고 간다.
한데 곁에선 여자가 입을 뻐끔거리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응?’
저건 또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손을 들어 자꾸 입에 가져다 대는데, 설마 주먹을 뜯어먹으란 얘긴 아닐 것이고…….
‘아!’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갔다.
상대는 힘든 싸움을 이제 막 끝낸 상황.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쳐 있을 터다.
‘허기질 땐 이게 최고지.’
나는 주머니 속 육포를 꺼내 여기사의 손에 살며시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놀랐을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다 먹어도 돼요.”
여기사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움찔거렸고.
‘훗……’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 마을 회관을 걸어 나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