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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4화 (4/203)

04화

“그러니까… 저 녀석을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요?”

“그렇다네.”

“아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놈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사고파는 게 좀…….”

내말이 그 말이다!

다짜고짜 사람을 산다는 게 상식적인 말은 아니잖나.

“내 듣자하니 빚을 진 것이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라고 들었네만.”

“이반이 이곳으로 올 때 빚을 지고 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데릭은 잠시 말을 멈추며 내 얼굴을 힐끔 바라봤다.

“……”

그리고 짧은 망설임 끝에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빌린 돈 대신 저 아이를 맡겨 둔 것이지요.”

나도 속사정은 모른다.

그 빌어먹을 인간 누구이며,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가지 아는 것이라면, 적어도 나의 친부모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빚을 정리해 주면 저놈을 데려가도 상관없겠나?”

“그야, 당사자 생각에 달린 문제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두 노인네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쩔래?

라는 표정인데.

애초에 내게 선택권이 있긴 한 걸까?

어느 쪽이던 내가 원해서 함께 하는 건 아니잖나.

한쪽은 빚이 있어서.

다른 한쪽은 그 빚을 갚아 줘서.

젠장…….

생각해 보니 억울해 미칠 지경이다.

도대체 얼마나 큰 빚을 지었기에 23년을 꼬박 때려 박았음에도 여전히 청산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 돈… 나는 구경도 못해봤건만.’

말 나온 김에 빚이 얼마나 되는지 속 시원하게 들어보기나 했으면 좋겠다.

매번 물어볼 때마다 모르는 게 약이라며 빙빙 둘러대니, 나도 저 영감탱이가 영 미덥지 않던 참이다.

“이참에 물어나 보죠. 당최 빚이 얼마나 되는데요?”

“알고 싶냐?”

“네.”

“10골드다.”

“아… 10골, 10골드요?!”

“그래. 더하고 뺄 것 없이 정확하게 10골드.”

세상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10골드라니.

내 몸을 죄다 나눠 판다고 한들 저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수준의 대장장이.

즉, 기능공이 되기 직전의 잡부라고 상정하면 월 평균임금은 대략 25실버 전후다.

그 이전을 논하자면 반 토막에 또 그 반 토막으로 떨어질 테니, 어린 시절부터 입고, 먹고, 재워 준 것을 제한다면.

‘그러니 여태 이 모양이었지.’

노예나 다름없는 내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큰돈을 빌려줬어요? 영감님 부자였네!”

“네놈을 살리려고.”

“절 살렸다고요?”

예상치 못한 데릭의 대답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기묘하게 죄여 왔다.

“그래. 온몸이 새파래져서는 아주 볼 만했지. 홉고블린 같았으니까.”

처음 듣는 나의 과거 이야기.

상상을 웃도는 빚의 총액도 놀라웠지만, 그 돈의 사용처는 더욱 놀라웠다. 내가 죽을 뻔했었다니.

쫑긋해지는 귀와 바짝 마르는 입술은 이어질 다음 사연을 기다렸다.

하지만 데릭은.

“돈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표정을 다잡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말해 보게.”

“저놈을 데려다가 뭘 하실 생각입니까.”

솔직히 조금 놀랐다.

데릭 영감에게서 저런 표정이 나오다니.

내가 알던 그 얼굴이 맞나 싶다.

“저런 무재를 데려다가 어디에 쓰겠나. 당연히 검을 들게 할 생각이네.”

“저 녀석… 기운만 세다 뿐이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녀석입니다. 괜히 어설프게 칼 잡았다가 객사하기 딱 좋은 놈이죠.”

“그래?”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남자는 쓰게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사람을 한참 잘못 보았구만.”

백발의 노인은 별안간 오른팔을 휘둘렀다.

“어억!”

그냥 휘두른 게 아니라 손에 쥔 해머를 내던진 것이다.

“미쳤어요?!”

나는 가까스로 붙잡은 해머를 들고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저세상 구경할 뻔했으니까.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눈앞의 숫자가 96으로 변했을 것이다.

“보게나. 저놈은 양의 탈을 쓴 마수 같은 놈이라네… 그리고 나는.”

순간 번뜩이는 노인의 안광.

“마수를 조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몸이지.”

백발의 노인은 품에서 전대를 꺼냈다.

“이거 받게. 10골드는 충분히 넘을 걸세.”

대충 한 움큼 집어 데릭의 손에 쥐어 주더니 자리를 털며 벌떡 일어섰다.

“그 돈으로 건장한 녀석들 몇 놈 더 구해서 일하시게나. 힘만 센 팔뚝 두 개보단, 적당한 팔 여러 개가 자네에겐 더 큰 이득이지 않겠나.”

그러고는 나를 향해 날선 목소리로 질문해 왔다.

“네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게냐.”

“……”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모습이라니…….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나를 따라나선다면.”

백발의 노인은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세상을 내려 보게 될 게다.”

* * *

“으아앙! 이반! 진짜 가는 거야?”

“안 돼! 가지 마, 이반! 나하고 우리 엄마랑 같이 살아!”

어느새 몰려든 아이들은 비좁은 대장간 입구를 막아서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잠깐 다녀오는 거야.”

“진짜? 몇 밤 자고 오는 건데?”

“글쎄? 엘리스가 조금 더 클 만큼 자고 일어나면?”

“이만큼?”

엘리스는 조막만한 손을 뻗어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그래, 그만큼.”

“알겠어. 그럼 다녀와서 우리 같이 사는 거다? 약속.”

“약속!”

“우와, 엘리스는 좋겠다.”

“헤헤헷!”

울다 웃어 대는 아이들을 달래며 떠날 채비를 마치자.

“이반.”

데릭은 조용히 다가와 웅얼거리듯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기회가 되거들랑 아리안 왕국의 카슈타르에 가 보거라.”

“카슈타르요?”

“그래. 그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만남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가는 여정이 만만한 길이 아니다.

일단 아리안 왕국으로 가기 위해선 사라센 제국의 국경을 넘거나 카잔 왕국을 지나야 하는데.

문제는…….

양쪽 모두 이곳 브라함 제국과 외교적 마찰이 있다는 것이다.

사라센 제국은 적대 관계.

카잔 왕국과는 긴장 상태.

‘그러면 자유도시 리베를 거치는 수밖에 없는데…….’

이곳으로 가는 길은 현시점에선 없다고 보면 된다.

아니, 있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길이다.

그곳은 마경(魔境).

악마의 잔재들이 날뛴다는 대수림(大樹林)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행여나 기회가 된다면 아이작이란 남자를 찾아 보거라.”

“그 사람이 누군데요?”

“너를 이곳에 맡기고 떠난 남자다.”

이것 참…….

여전히 놀랄 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이번엔 내 출생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사내의 행적.

개인적인 궁금함은 전혀 없으나, 내 삶의 시작에 대한 호기심은 늘 갈증 상태였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찾아볼게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한 번 찾아볼 생각이다.

“인사들 나눴으면 이제 슬슬 떠나도록 하지. 본래 이별이란 짧을수록 아쉬움이 덜한 법이니까.”

백발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잔뜩 들어 버린 데릭과 낡은 대장간.

그리고 해맑은 철부지 꼬맹이들과 촉촉한 눈빛의 여인들까지.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무거운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도착한 성문 앞.

“이걸 다 들고 가라고요?”

나는 어마 무시한 크기의 짐 보따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게 고작 저 노인 한 명을 위한 짐 꾸러미라니…….

말도 안 된다.

덩어리로 놓인 짐이 무려 네 개. 거기에 나의 짐과 해머까지 합한다면 140㎏ 전후?

‘누굴 당나귀로 아나.’

아니, 이 정도면 당나귀도 주저앉지 않을까?

무게도 무게지만, 고작 팔 두 개로 저 많은 걸 어찌 들 수 있겠냔 말이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물어 보거라.”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 거죠? 이게 다 필요하긴 해요?”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백발의 노인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래 봬도 태생이 드높다 보니 말이다. 한 끼를 먹어도 사이드 디시가 네 가지는 있어야 하고, 전쟁터를 나가도 침대 없인 잠을 청하지 않는 몸이란다. 그러니 이 정도 짐은 약과인 샘이지.”

사이드 디시?

빵 한 덩이에 스프 한 접시면 충분히 한 끼를 때울 수 있었고, 적당히 마른 지푸라기만 있으면 하루의 피곤을 날리며 꿀 같은 잠에 빠져들던 게 바로 나다.

고로 이런 미친 짐 보따리가 왜 필요한 건지 여전히 납득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이 양반은 짐꾼이 나 혼자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많잖아요. 설마 이런 걸 들고 다니셨어요?”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냐. 짐꾼이 생겼으니 새로 장만한 것들이다.”

저기요, 영감님.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요. 그 짐꾼이 저 혼자거든요.

팍팍한 심정으로 짐 더미를 살펴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런데 이건 뭐죠?”

“야전침대 아니냐.”

“이건요?”

“그건 간이 욕조.”

“가지고 갈 건가요?”

“당연하지.”

“이런 걸 어떻게 들고 다녀요!”

이 노인은 나의 팔다리가 한 쌍 뿐이라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평온하게 답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마차에 실고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 내 이미 적당한 놈으로 하나 준비해 뒀으니, 네놈이 이고지고 다닐 필요는 없느니라.”

“아… 그렇군요.”

나는 깨달음을 얻은 바보처럼 고갤 끄덕였다.

마차라니, 그렇다면야 짐이 얼마나 되건 무슨 상관이겠나.

여하튼 이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되었다.

적어도 생각이란 건 하고 산다는 것.

노인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는 것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노인은 고개를 내밀며 성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르신, 저는 마차 몰아 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상관없다.”

“직접 모시게요?”

“뭐, 비슷하지.”

역참 앞을 서성이며 기다리기를 10여분.

“오, 드디어 왔구나.”

아담한 소형 짐마차를 보며, 백발의 노인은 손을 흔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남자.

‘제키 아저씨?’

익숙한 얼굴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키였다.

불과 몇 시간 전.

함께 사선을 빠져나온 성 앞마을 풍차의 주인이었다.

“아이고,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몇 군데 손을 봐서 넘겨드린다는 게 시간이 좀 걸리고 말았습니다.”

“괜찮소.”

너스레를 떠는 제키에게 노인은 적당히 답해 주었다.

“마차 대금이 얼마라고 하셨소?”

“말하고 짐마차를 포함해 4골드입니다.”

“흠… 돈이 좀 모자란데 깎아 주실 수는 없는지.”

“얼마나요?”

“1골드 정도가…….”

“어림없지요.”

두 사람은 잘도 웃으며 서먹서먹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마차만 따로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차만 따로요? 안 될 거야 없습니다만,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

“말 대신 이 녀석이 끌 겁니다.”

노인은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뭐야?

내 뒤에 다른 말이라도 있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손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요?”

“그래 너.”

“웃자고 하는 소리죠?”

“진심인데.”

“돌았… 무슨 마차를 사람이 끌어요!”

돈이 모자라면 짐을 파는 게 상식이라는 거다.

침대에 욕조 같은 쓰레기들!

거기에 정체불명의 조리 기구나 그릇 같은 것까지 싹 다!

하지만 노인은 완강했다.

“짐승 같은 놈이 있는데 말은 사서 뭐에 쓰게. 이참에 수련도 할 겸 네놈이 마차를 끌 거라.”

“그거 기발한 생각이군요.”

“뭐가 기발해요!”

곁에 있던 제키가 묘하게 수긍하며 고갤 끄덕였다.

저 양반도 제정신이 아닌 게, 아무래도 오후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무예의 기본은 흔들림 없는 하체 만들기다. 든든한 다리가 받쳐 줘야 강력한 공격이 이어지는 법. 네놈의 두 다리도 이참에 말벅지로 만들어 보자꾸나.”

노인은 재갈을 흔들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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