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졸업전시 □
서울에서 울산까지 운전해서 내려왔기 때문에 나는 좀 걷고 싶었다.
유나도 마찬가지.
울산은 처음이었지만, 내비게이션을 찍어서 어렵지 않게 바다를 찾았다.
차를 주차하고, 우린 나란히 모래 위를 걸었다.
11월 초의 겨울 바다.
너무 춥지도 않았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걷기에 아주 좋았다.
아버지를 만나서 복잡했던 마음도 파도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진정되었다.
"유나야, 오늘 같이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너라도 나처럼 똑같이 따라왔을 거잖아."
난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끼리 마치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것처럼 다시 프로포즈를 하는 게 좀 어색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였다.
유나에게 꼭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유나야."
"응?"
나는 유나 앞에 서서 유나의 두 손을 붙잡았다.
"나랑 결혼해 줘.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유나는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시 나를 쳐다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하자. 나도 널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유나의 승낙.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설마 이게 끝이야?"
"응? 무슨 소리야?"
"첫 프로포즈는 거절하고, 네가 감동할 때까지 계속 무한반복 하는 거 아니었어?"
"네가 수 쓴 거잖아. 거절하기 애매한 상황에 프로포즈 해놓구선."
"내가 그랬나?"
"그리고 그 짓도 어릴 때나 하는 거지. 여러 번 시켜도 별로 나아지지도 않더구만. 또 오늘은 배도 많이 고프고."
"배가 고파서 그냥 승낙했다고?"
"그럼 뭐, 너한테 감동해서 승낙한 줄 알았냐?"
쩝.
나아진 게 없다니.
이주원의 고백 센스가 배고픔보다 못하구나.
어쨌든 나는 이제 유나랑 결혼한다.
아버님이 내린 미션도 통과했고, 유나도 동의했다.
너무 쉽게 통과해서 뭔가 허전하긴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행복이 피어올랐다.
눈앞에 배고프다고 보채는 예쁜 여자가 이제 내 아내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예쁜 여자를 닮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
난 언제나 이 여자와 이 여자의 아이들을 보살필 것이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맞이할 것이고, 또 같이 늙게 될 것이다.
"유나야."
"응?"
나는 유나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을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기억하고 싶었다.
품안에 차오르는 따뜻함부터, 뱃속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허기, 볼에 닿는 바닷바람까지.
내 두 번의 삶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순간.
하지만 유나와 결혼하게 되면, 매순간이 지금처럼 특별해질 것이다.
* * *
드디어 졸업 전시가 오픈했다.
다과가 준비된 학교의 전시장.
교수들과 선배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찾아온 유명한 미술 관계자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졸업 준비 위원회 위원장인 김대성이 당당하게 선포했다.
"그럼 한국대 서양화과의 졸업 전시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학생들은 모두 지난 몇 년간의 고생을 떠올리며 신나게 박수 쳤다.
교내 전시장에서 나름은 성대하게, 어찌 보면 소박하게 열린 졸업전시.
그 모든 과정을 총괄한 김대성은 마치 자기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듯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수고했다, 김대성!'
그리고 스스로를 과격하게 칭찬했다.
김대성은 감격에 젖어 힘들었던 지난 몇 년간을 떠올렸다.
파란만장한 그의 미대 라이프.
'운으로 합격했다고 놀림 당하던 내가 이젠 졸업 전시 위원장이 되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졸준위의 대표가 딱히 실력으로 선발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또 자기가 하겠다고 나이로 밀어붙여서 억지로 받아낸 자리였다.
하지만 사나이 김대성은 이제 그런 사소한 문제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오빠! 졸전 축하드려요!"
"졸준위 위원장이라니!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학생들.
의외로 김대성의 작품을 보러온 손님도 꽤 많았다.
김대성의 작품 앞에는 은근히 꽃과 선물도 제법 많이 쌓이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것이 김대성의 클라스다.'
김대성은 서양화과와 디자인과 복수 전공.
그래서 작년에는 디자인과 졸전도 치렀다.
덕분에 남들보다 교내 인맥이 두 배나 많은 것이었다.
게다가 작년과 올해 졸전에서 오지랖 넓게 부지런히 선물을 미리 뿌린 덕에, 이제 그 수확을 거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나이 김대성은 역시 그런 사소한 일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이 필요한 것만 기억한다.
그래서 그저 자신의 작품 앞에 쌓이는 꽃과 선물을 보며 뿌듯해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절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아!'
김대성은 전시장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 어떤 남학생과 비교해도 자신의 선물 개수나 손님 수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나름 성공적인 학창시절을 보냈구나. 이주원? 김태민? 속빈 강정이지. 특히 내 선물 대부분이 여학생들에게서 왔다고. 그 사실이 중요하지.'
괜히 서양화과 훈남 2인조에게 경쟁의식을 갖는 김대성.
그런데 그때였다.
"여기가 대표님들 졸업 전시하는 데 맞지?"
"맞네, 여기네!"
와르르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졌다.
바로 하이 유나의 직원들이 점심시간 동안 전시를 보기 위해 한국대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직원들이 어찌나 많은지.
와르르 직원들의 행렬은 며칠에 걸쳐 계속 이어졌다.
'하하하, 주원이가 경영한다는 소문의 그 회사가 크긴 정말 크구나. 이주원, 걔는 회사 대표니까 예외로 하자. 그래도 내가 김태민보다는 손님이 많아.'
하지만 다음 날 와르르.
이번엔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수십 명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졌다.
"와! 태민 선생님! 선생님 보러 왔어요!"
"너희들 왔구나!"
귀여운 어린 학생들이 우당탕 김태민을 향해 달려갔다.
김태민은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서, 교생 담임을 맡았던 반에서 단체로 졸전 관람을 온 것이었다.
김태민은 자기를 찾아온 학생들과 일일이 사진도 찍었다.
"자, 나가자. 선생님이 한 턱 낼게!"
"와아! 선생님 최고!"
그렇게 우르르.
김태민은 어린 손님들을 데리고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부럽지 않아. 부럽지 않다고! 양보단 질이지. 남학생 손님들을 어디다 쓰게?'
하지만 김대성을 찾아왔던 여학생 손님들은 그저 꽃바구니를 두고, 같이 사진 한 번 찍고는 먼저 돌아갈 뿐이었다.
누구도 김태민의 손님처럼 우당탕탕 진심으로 떠들어주진 않았다.
문득 김대성의 마음에 쓸쓸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것인가.'
그때였다.
뜻밖의 인물이 김대성에게 다가왔다.
그는 바로 서양화과의 조교 남.동.민.
"클클클, 고생 많았다, 대성아."
"동민이 형!"
"그래, 남들 한 번 하기도 힘든 졸전을 두 번이나 하고. 게다가 남들 다 하기 싫어하는 졸준위 위원장까지 맡다니. 이 전시 전체가 김대성의 또 하나의 졸업 작품인 셈이지."
"형! 역시 형밖에 없어요!"
남동민의 칭찬에 김대성은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래. 우리 대성이. 저게 언제 인간 되나, 과연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늘 걱정했었는데, 결국 해냈구나. 수고했다."
남동민은 김대성을 토닥이며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때.
그들에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
"여어, 우리 위원장. 고생 많았다."
"이준성 교수님!"
"흐흐흐, 내가 널 인간을 만들었지. 너는 거의 내 덕분에 졸업하는 거다. 어떠냐? 인정하는 부분이냐?"
"그, 그건······"
"형, 고생 많았어요."
이번엔 이주원이었다.
이주원이 다가와 김대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이주원 뒤에 더 서 있었다.
"대성아."
"상미야!"
처음에 윤상미를 다시 만났을 땐 무척 어색했었다.
하지만 졸전을 준비 하느라 거의 지난 1년간 작업실에서 같이 밤을 샜다.
"학원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같이 졸전이라니. 진짜 신기하다. 그치? 고생 많았어, 대성아."
크으, 상미와 다시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제야 모두들 나의 수고를 인정해주는 구나.
많이 발전했다, 김대성!
졸전을 준비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문득 김대성은 자기가 이 학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동민이 형! 저도 한국대 서양화과 대학원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저도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고 싶어요! 교수가 되어서 영영 이 학교에 남고 싶습니다!"
"대성아, 그건 좀······"
"야! 야, 임마."
"형, 진정하세요."
"대성아, 난 먼저 가볼게. 누가 불러서······"
한국대 서양화과 졸업 전시는 원래 손님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번 졸업 전시는 특히 찾아온 사람이 더 많았다.
이미연 이사, 산양미술관 관장, 김용철 작가 등등 여러 미술 쪽 거물들도 방문했다.
거기에 일반인 관객들도 아주 많았다.
특히 영화배우인 이수진의 지분이 아주 컸다.
원래 졸전이 끝나면 갈 곳을 잃은 남은 도록들이 여기저기 뒹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전시장 입구에서 무료로 배포하던 도록은 일찌감치 동나 버렸다.
그러고도 남는 도록이 없냐고 묻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록을 돈 받고 팔 걸!"
이정원이 큰소리로 불평했다.
어쨌든 전시가 끝날 때까지 전시장이 붐비니까 그만큼 보람은 있었다.
* * *
졸업 전시와 상견례를 위해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셨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셨고, 나도 자주 포항에 내려갔었다.
그래서 내가 입학하고 어머니가 서울에 오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일하고 계시던 백반집에 무려 일주일간이나 휴가를 내셨다.
어쩌면 이번 생, 지난 생 통틀어 이번 7일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최장기 휴가일 지도 모른다.
그만큼 알차게 보내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더 자주, 더 많이 쉬도록 해드려야지.
"엄마. 이번에 올라오신 김에 저랑 실컷 데이트해요."
"그래, 아들 덕에 서울 구경 한 번 해보자."
이번엔 어머니도 작정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먼저 내 회사와 빌딩들을 순회 공연시켜드렸다.
전에 유나의 어머님이 올라오셨을 때와 비슷한 코스이긴 했는데, 그때보다 회사의 규모가 몇 배로 성장해 버렸다.
"그러니까, 이 빌딩이 네 거라고?"
"정확히는 유나랑 반반이요. 1층부터 6층까지 전부 하이유나에서 쓰고 있어요. 그리고 맞은 편 빌딩도 저희 껀데 거긴 원 디자인과 5DE가 쓰고 있어요."
"맙소사."
어머니는 길 옆 벤치에 주저앉아 잠시 호흡을 진정시키셔야 했다.
아직 내 건물들은 한참 남았지만, 어머니의 정신 건강을 위해 나머지 순회공연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경복궁도 가고, 63빌딩도 가고, 남산도 갔다.
어머니는 특히 수족관을 관람하실 땐 마치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이주원, 효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모실 걸.'
그리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즉석 떡볶이도 먹고, 피자도 먹고, 냉면도 먹었다.
"엄마, 먹쉬돈나가 먹고, 쉬고, 돈내고 나가란 뜻이래요."
"서울 사람들은 식당이름도 요상하게 짓는 구나."
마지막은 당연히 졸전 관람.
먼저 한국대를 한바퀴 구경시켜드렸다.
"엄마, 내가 한국대생이에요. 이제 졸업이긴 하지만."
"그래, 내 아들이 한국대 학생이다."
"전부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가 아니었으면 못해냈을 거예요. 입학부터 졸업까지."
어머니는 뿌듯해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졸업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이게 내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유나구나."
어머니는 내 판화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셨다.
이런저런 모든 이유들을 떠나서 아들의 작품이니까, 어머니는 내 판화가 마냥 좋으신 것 같았다.
"색이, 색이 참 예쁘네. 유나도 예쁘고. 너무 좋네. 수고했다. 주원아."
"네, 고마워요. 엄마."
"안녕하세요, 어머니."
나와 어머니를 보고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주원이 친구 김태민입니다. 주원이한테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어휴, 다들 어쩌면 이렇게 잘생기고 예쁠까."
그렇게 어머니는 친구들과도 같이 사진을 찍으셨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졸업전시인 것처럼 하나하나 모두 기억해두시려고 애쓰시고, 또 기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