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어깨 □
"네, 아버님. 말씀하시죠."
나의 대답에 결심을 굳히신 듯,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이어가셨다.
"자네는 그럼 아버님과는 요즘 연락을 전혀 하지 않는 건가?"
"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이후로는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다.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것에 대해 슬프게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립거나 했던 적도 결단코 한 순간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가슴이 살짝 아파왔다.
그런 내 기분을 아시는 지, 아버님은 천천히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래."
아버님은 단지 '그래, 그래'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주원아."
"네, 아버님."
"내가 자네한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네, 하나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그래. 실은 그냥 나이든 남자의 실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어. 그래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난 이번 결혼 허락하겠네. 뭐, 내가 허락할 것도 없지. 유나가 하겠다고 하면 누가 그 고집을 꺾겠나. 그런데 말이야······"
쉽지 않은 부탁인지, 아버님은 다시 뜸을 들이셨다.
"결혼 전에 한 번만 자네 아버지를 찾아뵙고 자네를 보여드려 주게. 자네가 이렇게 잘 컸다고. 그래서 이제 장가까지 가겠다고. 물론 나는 자네 아버지를 몰라. 그리고 그런 행동이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지도 잘 모른다네. 난 부족함 없는 집에서 편하게 컸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그냥 내 오지랖이야."
우리 아버지를 만난다라······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지난 생을 떠올렸다.
지난 생에선 부모님의 이혼 이후 한 번도 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할 때도 연락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찾아뵙고 오라고 말한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아내와 아내의 식구들은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나중에 단 한 번, 얼굴도 모르는 고모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에 와서 아들 노릇을 하라고.
'지금부터 한 이십 년 후쯤일까?'
나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갈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러자 고모는 몇 십 년 만에 연락한 조카에게 전화로 실컷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욕을 먹으면서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통쾌했다.
친척들 전부가 나 몰라라 할 땐 언제고, 장례식에서는 아들 책임을 하라니.
'어림도 없지.'
그때 다시 유나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나이든 남자의 실없는 오지랖일 순 있지만, 자네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자네가 유나랑 결혼하면 난 분명 자네에게 최선을 다할 거야. 정말 친아들처럼 대해줄 거야. 딸의 남편과 잘 지내는 것은 내 꿈이기도 하거든. 같이 낚시도 하고, 손주들이랑 캠핑도 가고. 같이 술도 한 잔 하고. 여기는 제주도니까, 아이들이 외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겠지. 난 그런 점이 유리해. 그런데 왠지 자네를 그냥 데려오면 내가 남의 아들을 빼앗는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래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자네가 아버지를 한 번 뵙고 왔으면 좋겠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아버님은 혹시 내 기분이 상할 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결혼 전에 꼭 친아버지를 찾아뵙고 장가간다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미안하네. 유쾌하지 못한 부탁을 해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제가 놓치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십시오."
"지적이라니. 결혼하면 자네도 어른이야. 서로 돕고 배우면서 사는 거지. 아무튼 고맙네. 내 부탁을 선뜻 들어줘서."
"아닙니다. 부탁이라뇨. 앞으로 언제든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유나의 아버님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해요?"
어머님이 유나와 함께 웃으며 다가오셨다.
"아빠, 우리 주원이 괴롭힌 거 아니죠?"
"허어!"
아버님은 세상 억울하고 섭섭하고 기막힌 표정을 지으셨다.
* * *
그리고 우린 서울로 올라왔다.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가진 않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계속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졸전이 다가왔다.
졸업 전시는 일주일간 열린다.
학교의 전시장에서 열리는데, 작품 배치부터 청소, 조명 설치까지 전부 학생들이 직접 해야 한다.
'물론 나는 부자니까······'
인부를 몇 명 고용해서 플렉스 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시를 설치하는 것조차 중요한 공부가 된다.
'일반적인 미대 졸업생이라면 앞으로 계속 전시를 열어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졸업 전시 자체가 서양화과의 마지막 수업인 셈이다.
전시를 며칠 앞두고, 김태민, 수진 선배부터 나, 유나, 이정원 기타 등등, 그리고 졸준위 위원장 김대성까지.
학교 전시실에 모여 가벽을 세우고, 페인트를 칠하고, 레일 조명을 달고, 음향과 영상 장비를 설치하고, 모두 정신없이 지냈다.
다 같이 모여서 웃고 떠드니까 즐겁긴 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대학원에 가는 가 봐요."
"그러니까. 학창시절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진짜 이상하네. 후루루룩."
김대성이 내게 대답하고는 짬뽕을 한 젓가락 들이켰다.
전시 준비를 하다 단체로 배달시킨 중국 요리.
이제 학교에서 먹는 짬뽕도 마지막이었다.
대한민국에 널린 게 중국집이지만, 이제 학교에서 먹는 짬뽕은 다신 맛보지 못할 것이다.
밥을 다 먹고 잠시 쉬는 시간.
난 유나에게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일 아침에 울산에 다녀오려고."
울산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의 주소와 연락처는 포항에 사는 친척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울산에는 자동차 부품 공장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그 중 하나에서 일하고 계셨다.
유나는 내 말을 듣자 말자, 곧바로 되물었다.
"같이 갈래?"
"그래 줄래?"
"응. 같이 가자."
"그럼 넌 우리 아버지는 만나지 말고, 그냥 차에만 있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래. 그럴게."
다음 날.
아침 일찍 유나를 태워서 울산으로 출발했다.
이번 생에서는 대략 십육, 십칠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사이 전생이 끼어 있어서, 사실은 거의 사오십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당연히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예 내 인생에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왔다.
유나는 그냥 놀러가는 사람처럼 편하게 조수석에 앉아있었는데,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크게 위안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탓에 오전 중에 울산에 도착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아버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 혼자였다면 몇 번 망설였겠지만, 옆에 유나가 있어서 시간을 끌지 않았다.
전화벨은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
너무 오랜만인데, 이상하게 너무 익숙했다.
나는 한참 만에 겨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주원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상대편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래, 연락처를 물었다는 말은 들었다."
"네. 다른 이유는 없고요, 그냥 인사나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올지 미리 말해줬으면 내가 시간을 비웠을 텐데.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중인데······"
"괜찮습니다. 잠깐 얼굴만 뵈면 되거든요."
"그래. 그럼 회사 근처로 와줄 수 있겠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옆에서 유나가 내 손을 꼭 붙잡아줬다.
아버지 회사 근처에 차를 세우고 잠시 기다렸다.
초조한 모습을 유나에게 괜히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차에서 내려서 기다렸다.
유나는 계속 조수석에 앉아 이따금 창밖을 내다봤다.
곧 공장 안에서 회사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사십 년? 오십 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는 아버지.
하지만 너무 익숙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익숙한지 금방 답을 알았다.
바로 전생의 나이든 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조금 키가 작고, 조금 살쪘고, 조금 얼굴이 까만 것 빼고는 완전 붕어빵이었다.
'조금 탄 붕어빵이라고 해야 하나?'
나 자신마저 속이고 싶은지, 이 와중에도 내 안에서 농담이 튀어나왔다.
공장에서 나오던 아버지도 나를 발견하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지간이라는 게 이럴 땐 아주 유용했다.
모르는 사람끼린 유심히 관찰해야 표정을 읽을 순 있는데, 워낙 닮은 사이라서 그냥 곧바로 생각이 읽혔다.
"주원아."
"아버지."
우린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한국대에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다. 넌 엄마를 닮은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잘 돼서 정말 다행이다."
"네. 그리고 이제 졸업해요."
"축하한다."
"그리고 이번에 장가도 가요."
"아······"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안심하세요. 결혼식에 와달라거나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아버진 달리 대꾸도 하지 못하셨다.
"그래, 축하한다. 네 엄마가 좋아하시겠구나. 정말 축하한다.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정말 잘했구나."
내 생각에도 내가 참 잘 해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있어볼래? 내가 큰돈은 아니라도, 어디 보자, 근처에 은행이······"
"아니요. 괜찮습니다. 따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으세요."
"하지만······"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아버지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온 거예요. 그게 다입니다. 장인어른 되실 분이 그렇게 시키셨거든요."
"장인어른?"
"네,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래, 다행이구나."
"제 어깨요."
"응?"
내가 내 어깨를 툭툭 치자 아버지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셨다.
"기억나세요? 제가 열 살 때인가, 그때 크게 다쳤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결국 군대도 공익으로 갈만큼 많이 다쳤어요.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었죠. 병원비도 걱정이었겠지만, 너무 놀라셔서 누군가 필요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아버진 결국 오지 않으셨죠."
"미안하다. 나도 그땐 너무 어려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몰랐단다."
아버지를 참 많이 원망했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니 내 입으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벌써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아니, 용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원망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유나의 아버님이 왜 아버지를 만나고 오라고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결국 나를 위해서였다.
아버지나, 아버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마음 편히 마음껏 행복해지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갑자기 장인어른이 더 좋아졌다.
눈물이 날 것 같긴 했지만 난 잘 참았다.
"이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깨도 잘 나았어요."
그리고 나는 품속에서 흰색 봉투를 꺼냈다.
돈봉투였다.
"아들이 두 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죠?"
그러니까 내 이복동생.
그런데 '동생'이란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 놈은 고등학생이고, 한 놈은 중학생이야. 그런데 둘 다 공부를 못 해. 걔들은 날 닮았나봐."
"그렇군요. 2천만원이예요. 두 사람을 위해서 써주세요."
"아니, 괜찮단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돈을 받겠니."
사실 나한테는 별로 의미 있는 액수도 아니었다.
"아니요. 받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연락하고 지내잔 의미도 아니고,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래도 태어나게 해주셨으니까 뭔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받으세요. 정말 괜찮으니까."
아버지를 향한 내 최소한이자, 마지막 보답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가 건네는 봉투를 받으셨다.
"그럼 가 볼게요."
"그래, 주원아. 미안하다. 그리고 결혼해서 잘 살아라. 넌 절대 나처럼 멍청한 실수는 하지 말고."
당연한 말씀을.
세상에 유나보다 예쁜 여자는 없습니다.
"아버지도요. 술이랑 담배 좀 줄이시고요."
"어? 그래, 그러마."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술과 담배를 줄이면 조금은 더 오래 살 수 있을 지도.
뭐, 이제 내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장인어른을 아버지로 여길 계획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울산에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못다 한 효도는 포항 어머니와 장인, 장모님께 하면 충분하다.
나는 아버지께 살짝 목례를 하고는 유나가 기다리는 차로 돌아갔다.
시동을 걸고, 차가 떠날 때까지 아버지는 계속 그 자리에 서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