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도록 □
10월 평가 전, 2학기가 시작한 직후.
미대 졸업반은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작품을 다 못 끝낸 사람은 매일 밤을 샜고, 아쉬움이 남아서 벼락치기 새 작품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린 도록에 관한 회의도 열었다.
졸업 준비 위원장은 바로 '그 사람'이 맡았다.
나서기 좋아하고,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 사람!
바로 김.대.성.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본인이 워낙 강력하게 원해서 우린 막을 수가 없었다.
김대성이 앞에 나가서 회의를 진행했다.
"자, 이제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중요한 안건이 있습니다. 바로 졸전의 제목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림에도 제목이 있듯, 전시에도 제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졸업 전시.
각각 개성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미대인만큼, 취향도 가지가지이다.
그런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목을 찾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잠깐의 회의 끝에 모두 고민에 빠졌다.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학생이 많지 않으니까, 모두 한 명씩 일어나서 의무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제목과 그 이유를 말해봅시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죠."
오올, 김대성.
웬일로 괜찮은 제안을 했다.
이렇게 진행한다면 결국 회의가 끝날 무렵엔 제목 하나가 강제로 정해지긴 할 것이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이라도, 제목을 아예 못 정한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래서 학생들이 한 명씩 출석부 순서에 따라 자기 생각을 말했다.
'졸전의 제목이라······'
나도 잠깐 동안 생각해봤다.
그리고 머릿속에 거제도에서 본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유나와 함께 저녁에 하천을 따라 산책했는데, 다리의 기둥에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수위표.
물의 높이를 재기 위한 높이 표시였다.
"자, 다음 차례는 이주원."
김대성이 너무 회의를 잘 진행해서 조금 적응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졸업 전시는 우리에게 목표가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어쨌거나 지난 이십 몇 년 동안 우리가 제일 열심히 작업을 한 시기니까요. 그래서 이번 졸전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수위표'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나중에 작가 생활을 하다 가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때, 도록을 펼쳐서 이번 졸전을 떠올리며 자신의 상황을 점검하는 겁니다."
"괜찮은데요?"
"나도 찬성이요."
"곧바로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보죠!"
내가 발표를 마치자 여기저기서 찬성의 의견이 들렸다.
훗.
이것이 회귀자의 작명센스 클라스.
'유나야, 나중에 우리 아이들 이름도 기대하라고.'
곧바로 거수로 표결을 했고, 여유롭게 과반수를 돌파했다.
그렇게 우리 전시의 제목은 '수위표'가 되었다.
이게 뭐라고, 은근히 뿌듯했다.
10월 평가가 끝난 후엔 도록을 촬영했다.
사진 촬영은 사진 작업을 하는 졸업한 선배가 싸게 맡아주기로 했다.
찰칵찰칵.
작품 촬영 당일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서 울고불고 사진사에게 매달리는 학생도 있었지만, 뭐 그런 사람들이야 늘 있으니까.
어쨌거나 우리 패밀리는 모두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작품 촬영이 끝난 후에는 도록에 실릴 우리들 사진 촬영.
도록에는 꼭 학생들의 사진과 연락처가 같이 실린다.
그걸 바탕으로 일쪽으로 연락을 받는 학생들이 그리 많은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도록에 적힌 예쁜 여학생들의 연락처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남학생들은 많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주원아, 이리 와 봐."
"응?"
유나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내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주더니, 화장품 파우치를 꺼냈다.
"뭐야? 날 화장하려고?"
"한 번 밖에 없는 졸전 도록인데, 예쁘게 나와야지. 너 졸업 앨범도 안 찍잖아."
요즘 대학 졸업 앨범은 앨범 촬영비를 내는 사람만 찍는다.
그리고 나는 졸업 앨범 촬영은 거절했다.
전생에선 돈 아끼느라.
이번 생은 돈은 많지만, 그래도 뭔가 예술가답지 않은 것 같아서.
아무튼 나는 유나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서 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다.
그런데 우리 옆에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서 있었다.
'태민아, 보고 있나? 이것이 바로 여친의 내.조.라는 것이다!'
우릴 보고 뭔가 생각이 났는지 수진 선배도 김태민의 앞에 섰다.
그런데 잠시 김태민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됐다. 우리 태민이는 오늘도 잘생겨서 따로 손 안 봐도 되겠다."
억.
수진 누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어이, 한유나.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하지만 유나는 패배를 인정하듯,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내 얼굴에 덕지덕지 화장품을 발랐다.
크윽.
작품으론 무승부인데.
어쨌거나 김태민과 겨루는 건 늘 손해만 보는 것 같다.
아, 맞다.
"저기요, 제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외치자, 촬영을 위해 모여 있던 졸업반 학생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도록에 우리 단체 사진도 하나 싣기로 하죠. 이번에 졸업 앨범 안 찍는 사람도 많은 걸로 아는데, 이왕 모인 김에 다 같이 한 장 찍죠."
"오오, 역시 이주원. 괜찮은 생각인데?"
그렇게 우리들은 자연스레 모두 한 자리로 모였다.
키가 조금 큰 편인 나와 김태민은 뒤에 서고.
수진 선배와 유나는 우리 앞에 섰다.
그리고 각자 자기 자리를 잡는 학생들.
이정원과 김대성까지 은근슬쩍 우리 옆에 섰다.
"자, 여기 보고. 모두 웃으세요. 하나, 둘, 스케치!"
그리고 찰칵.
이렇게 단체사진까지 찍으니까 졸업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 * *
도록 촬영도 마치고, 유나와 함께 제주도로 향했다.
아마 졸업 전시 때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실 것이다.
그리고 유나의 부모님도 서울에 올라오실 것이다.
7일간의 졸업 전시에 부모님을 따로 초대하는 것도 이상했고, 별 다른 협의 없이 부모님들이 전시장에서 마주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졸전 전에 유나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졸전 때 정식 상견례를 갖기로 유나와 의논했다.
'이런 기분이구나.'
제주도로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계속 싱글벙글 웃음이 났다.
내가 너무 좋아하자, 유나는 괜히 자기가 진 기분이 드는지 슬쩍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뭐, 그래봤자 나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지만.
그렇게 도착한 유나의 제주도 집.
지난 번 영 아트가 끝난 후에 한 번 와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땐 유나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정식으로 유나의 부모님과 할머니가 계신 자리에 찾아뵙는 것이다.
살짝 떨리긴 했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어서 와, 주원아."
일단 유나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셨다.
"아이고, 어서 와. 오랜만이네."
유나의 할머니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집 안 쪽 어두운 거실에서 유나의 아버님이 쓸쓸한 표정으로 혼자 방황하고 계셨다.
'어른이 된 유현이 느낌?'
다행히 아버님은 무서운 이미지는 아니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신지 아니면 여자들이 다소 드센 집안이라, 자연스럽게 그리 되신 것인지는 몰라도.
아버님은 편하고 잘 웃으시는 성격이셨다.
그래서 그만큼 나도 긴장이 덜 되었다.
그리고 정식 인사는 아니었지만, 유나와 사귀는 동안 서울에 오셨을 때 이미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어서 와. 편하게 앉게."
그리고 유나의 어머님이 준비하신 환영의 밥상.
끝없이 밥상에 얹어지는 반찬들.
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반찬의 개수만 봐도 벌써 허락을 받았군.'
이것이 예정된 사위의 당당함!
나는 그 어느 곳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리고 이어진 식사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우린 5년 가까이 사귀었고, 또 같이 일해 왔다.
게다가 유나의 동생들도 모두 나를 친형제처럼 대했고, 양가의 어머니들도 서로를 무척 좋아했다.
어쩌면 게임은 이미 오래전에 결론 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버님은 식사 내내 쓸쓸한 표정이셨다.
'하긴, 나라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자식을 길러본 적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큰딸의 결혼은 평생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특히 유나라면 정말 아버지에게 의지가 되는 큰딸이었을 것이다.
아버님은 당연히 서운하고, 또 약간은 내가 원망스러우실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 지금 이 순간 저는 세상에서 아버님이 제일 부럽습니다.'
따뜻하고 현명한 아내.
아내를 닮은 예쁜 두 딸.
그리고 착하고 재미있는, 자기를 닮은 막내아들.
거기에 초특급 부자 예비 사위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나 형제들은 정말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저도 아버님처럼 나이 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처럼 멋진 가정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담아 아버님께 술을 따라 드렸다.
가족이 될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큰 행운이었다.
"그래, 자네도 한 잔 받아."
"네, 아버님."
내가 너무 당당하게 아버님이라고 부르자 아버님은 그것마저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었다.
유나의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실감이 나실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어머니와 유나가 차와 과일을 가져왔다.
아버님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리시는 지 어머님이 이따금 은근슬쩍 아버님의 손을 잡아주셨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들의 서운함은 결국 시간이 약이겠지.'
하지만 나는 노련한 회귀자.
아버님의 마음을 조금 더 빨리 낫게 해드릴 묘약을 알고 있다.
그리고 유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가방을 열고, 미리 챙겨온 수입차 카탈로그를 꺼냈다.
그러자 활짝.
아버님께서 세상 행복한 소년의 미소를 되찾으셨다.
* * *
식사 후, 아버님과 잠시 집 주위를 산책했다.
"실은 자네와 전부터 밥 한 끼 먹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어. 유미랑 유현이 많이 챙겨줘서 고맙네. 둘이 어찌나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아닙니다. 유나가 저를 챙겨주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차.
겸손을 차린다고 그렇게 말했더니, 아버님은 다시 한 번 서운한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아버님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사실 나도 자네를 많이 좋아한다네. 난 우리 유나를 믿어. 유나가 시시한 놈과 사귈 리는 없지. 유나가 일단 오케이 했다면 나도 오케이야. 그리고 집사람도 자네를 좋아하고, 어머니도 자네를 좋아하고, 유미도 자네를 좋아하고. 유현이는 뭐. 그러니까 자네는 삼중, 사중으로 검증된 거지."
"아버님의 검증이 제일 중요합니다."
"허허허."
조금 입에 발린 말인데도, 아버님은 상당히 좋아하셨다.
어쩌면 그만큼 가장의 권위가 고프셨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버님은 내 가정사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물어보셨다.
식사 때에는 그냥 좋은 말씀만 하셨지만, 둘이 남게 되자 이미 알고 계신 이야기들도 꼼꼼히 직접 확인하셨다.
"어머님이 고생이 많으셨겠구나.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컸으니까, 무척 자랑스러우실 거야."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유나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래, 다행이야. 유나를 좋아해주셔서. 우리 유나가 똑똑해 보여도 허술한 데도 많아. 자네, 그거 아나? 작은 강아지들이 더 시끄럽게 짖는 거?"
난 동물을 싫어하진 않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아마 그만큼 여유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혼하게 되면, 유나가 원한다면 동물을 기를 수도 있겠지.
나는 가만히 아버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강아지들이 큰 개들보다 더 시끄럽고 요란하게 짖는다네. 그런데 그게 상대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작으니까, 겁이 많아서 그런 거야. 자기가 약한 걸 들킬 까봐 더 요란하게 짖는 거야. 유나도 마찬가지야. 유나가 조금 사납긴 하지만, 그건 겁이 많아서 그런 거야."
아버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가 겁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
가족을 실망시킬까 봐, 두 배로 독하게 그림 그려왔다.
또 부지런히 동생들을 챙겨왔고.
그리고 나한테도 본심을 쉽게 말하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가끔 사납게 굴 때도 여전히 예뻐 보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늘 똑같을 자신이 있습니다."
"허허허. 나도 그런 생각으로 집사람이랑 결혼했지."
아버님은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데, 자네······"
아버님은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