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0월 평가 □
거제도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언제나 회사를 오래 비우면 그만큼 더 바빠졌다.
휴가가 항상 좋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40일이나 푹 쉬었으니까······'
양평 카페로사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덕분에 확신을 갖고, 카페로사 3호점, 4호점, 5호점이 동시에 공사에 들어갔다.
5DE와 하이유나의 백화점 입점도 성공적이었고, 수진 선배의 영화도 착착 진행되었다.
영화는 아마도 내년 상반기에 무리 없이 개봉될 듯 했다.
'내가 없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말은······'
이제 새로운 일을 벌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졸업 때까지만 참자.'
학교도 정신없긴 마찬가지.
미대 4학년의 방학은 방학인 듯, 방학이 아닌 듯, 졸전 준비와 함께 정신없이 끝나 버렸다.
9월이 개강이었지만, 개강 전에 이미 모두들 학교에 출근했기 때문에 개강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덧 10월이 되어 버렸고, 어김없이 10월 졸전 평가가 시작되었다.
이제 우린 담담했다.
포기한 사람은 포기한 대로 담담했고, 방학동안 최선을 다한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담담했다.
* * *
대망의 10월 평가 날.
우리들의 마지막 결전.
미대 강당.
유나는 세 점의 그림을 교수들 앞에 걸었다.
하나는 흐린 날의 제주도 풍경.
1학기 평가 때 미완성이라 다시 완성해서 가져왔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점은 거제도 풍경.
비가 온 날의 숲과 별장이었다.
주위를 메운 나무에서 녹색 물감이 비에 녹아내린 것처럼 세상에 온통 녹색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비와 바람이 그림 밖으로 전해지는 듯.
그림이 멈춰있지 않고 잔잔히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사실이 있다.
유나가 그린 풍경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유나는 우리가 머물렀던 연못가 풍경을 그렸지만, 자기 마음대로 공간과 사물을 편집해서 재구성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직 그림 속에만 있는 장소.
'하긴 뭐, 잘 그린 모든 풍경화들도 다 그렇겠지만.'
어쩌면 풍경화의 진정한 풍경은 작가 내면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6월 평가에서 지금은 겨우 두세 달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유나의 그림이 다시 크게 발전했다.
원래도 거의 완성형이었지만, 지금은 더 원숙해졌다.
유나는 계속 성장 중이었다.
사실 미대 교수들은 풍경화를 싫어한다.
'왜냐면 미대니까.'
교수들은 철학적 사유가 들어간 그림, 미술사의 흐름을 연장한 그림, 학생다운 참신한 시도가 담긴 그림.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끔 예외가 있다.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시도가 없더라도 일단 그림이 충분히 아름답다면.
그래서 가끔 다른 이유 없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그림이라면 예외가 성립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유나의 그림이 그랬다.
교수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학기 그림 말고 새로 가져온 그림 두 점을 걸면 되겠군요. 산 속 별장 풍경인가? 아무튼 잘 했다. 수고 많았다."
강영 교수의 발언에 다른 교수들도 동의했다.
그렇게 유나의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조금 건너서 나.
나는 회색과 검은 색, 푸른색으로 도시의 밤을 그렸다.
서울의 밤, 거리 풍경.
더 자세히 말하면 전생의 늦은 밤 퇴근길 장면이었다.
이 그림은 졸전을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 그린 그림이었다.
'왜냐면······'
나는 이제 내 전생과 화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루 종일 비좁은 사무실에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늦은 밤, 나를 반겨주는 이 없는 답답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와 똑같이 지친 사람들을 거리에서 스치고.
집에선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다시 다음 날을 맞아야 했다.
그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피곤보다는 절망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만든 나 자신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삶이었을까?'
지난 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결국 지금 이 순간을 향해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매일 밤 무너지고 울었지만 나는 어쨌거나, 계속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힘들었지만, 나름 애쓰고 있었다.
'이젠 전생의 나를 칭찬해주자. 고생 많았다. 이주원. 지금의 나는 전부 네 덕분이다.'
어쩌면 나는 엄청난 부와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전생과 똑같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발악할 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 생은 내가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조금은 여유를 갖자.'
나는 어두운 서울의 거리 위에 마치 전생의 나에게 선물하듯, 거제도의 푸른 밤하늘을 그려 넣었다.
은은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한 푸른 밤하늘.
'그래서 조금 유치한 것 같기도 해. 물론 내 마음에 들긴 하지만.'
서춘일 교수가 잠시 내 그림을 응시한 후 평가를 내렸다.
"이주원 군."
"네."
"자네는 피규어와 목판화 세 점을 내기로 했지."
"넵."
"그걸로 일단 작품의 개수는 충분하니까, 이 그림은 일단 두고 보기로 하지. 다른 학생들의 작품 개수를 보고, 공간이 모자라면 자네가 양보하는 걸로 하세."
"알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합격이란 말.
작품이 단순히 수준 이하라면 '자네는 탈락이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열심히 하긴 했는데, 교수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지금처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미대 4년 내내 교수들 맘에 들기 위해 그림을 그렸으니까, 마지막 한 점 정도는 뭐.
나는 발표를 마치고 당당히 내 자리로 돌아갔다.
시원섭섭했다.
그리고 드디어 김태민의 차례가 되었다.
'어라? 김태민답지 않게······'
김태민은 무려 세 점의 유화를 가져왔다.
'하나만 달랑 가져와야 내가 아는 김태민다운 건데······'
그리고 셋 다 인물화였다.
하나는 수진 선배.
하나는 김용철 작가.
하나는 어라?
마지막 한 점은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김태민이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인물화를 좋아합니다. 인물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하면, 누군가를 관찰하거나, 혹은 당당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기분입니다. 졸업을 위한 그림이니까,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제게 중요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세 번째 인물화 속에 그려진 사람.
책상에 앉아서 조각칼을 들고 목판을 노려보는 젊은 남자.
바로 나였다.
나를 그리다니.
'그런데 김태민에겐 내가 저런 이미지였구나.'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악물고, 이마를 찡그리고 조각칼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 같은 느낌.
"전에도 느꼈지만, 자네는 인물화를 참 잘 그리는 군. 그런데 졸전에 셋 다 걸 지는 못 해. 셋 중 하나를 고르라면 자네는 어떤 그림을 고르겠나?"
서춘일 교수의 질문에 김태민은 잠시 망설였다.
"음······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제 여자 친구입니다. 누가 뭐래도 셋 중 제일 예쁘죠. 그리고 두 번째 그림은 제 아버지입니다. 저를 태어나게 해주셨고, 또 제가 그림을 시작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김태민은 담담하게 나에 대해 말했다.
"제 대학 생활을 재미있게 만들어준 친구입니다. 겉돌고 있던 저를 친구들 사이로, 수업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친구지만 배울 점도 많았고, 의지도 되고······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일을 재미있게 만들어줬습니다. 음······그래서 저는 세 그림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태민이 그렇게 대답하자, 교수들이 대신 고민했다.
"내가 제일 맘에 드는 것은 여학생 그림인데, 여자 친구는 에칭으로 많이 그렸으니까, 남은 두 그림 중에는 목판을 새기는 그림이 낫습니다. 동세도 재미있고, 표정도 재미있고."
"나도 동의하네. 그리고 아버지라면 졸전이 끝나고 또 그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친구라면 졸전에 걸면, 아마 자기들끼리 느낌이 새롭겠지. 어떤가 자네는?"
서춘일 교수의 제안에 김태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좋습니다."
그렇게 김태민은 에칭으로 새긴 판화 책 한 권, 그리고 이주원의 초상화 한 점을 졸전에 내기로 했다.
'내가 모델이 될 줄이야.'
정말 전혀 생각 못했다.
그런데 내 초상화가 졸전에 걸리는 것 보다, 김태민이 내 덕분에 그림에 재미를 붙였다는 사실이 더 고맙게 여겨졌다.
'이렇게 내가 한국 미술의 발전에도 이바지했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한국 미술계의 앞날까지 챙기는 사람.
한국 미술계는 내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미술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태민과 나의 승부.
나는 1학년 때 작고 소박한 목표를 하나 세웠었다.
바로 졸업 전에 김태민을 이겨 보는 것.
그리고 이번 10월 평가로 서양화과 학생으로서의 공식적인 과제는 전부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승자는 누구인가?
음······.
일단 4년 내내 학점은 내가 조금 높았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열심히 수업을 들었지만, 김태민은 설렁설렁 들었으니까.
'그럼 내가 이긴 건가?'
하지만 학점은 학점일 뿐.
그럼 이번 졸전을 살펴보자.
나는 목판화 3점과 피규어 3점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김태민은 동판화 열 몇 점과 유화 한 점.
'작품의 개수로는 김태민이 더 많군.'
하지만!
'연작은 한 작품으로 쳐야 해!'
연작을 한 작품으로 치면 나는 판화와 피규어, 두 작품을 졸전에 내는 것이다.
그리고 김태민은 동판화 책과 인물화.
역시 두 작품을 졸전에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승부인가?'
아니다.
김태민의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이주원의 초상화다.
결국 내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졸전에 한 작품만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승부는 내가 허락해줘야 겨우 무승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의 승리인가?
그런데 왜, 나의 승리라고 우길수록 자꾸 더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이런 유치한 장난은 그만해야겠다.'
졸업은 우리 그림 인생의 1막일 뿐이었다.
그리고 김태민과 나는 이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김태민은 본격적인 고시 준비를 할 것이고, 나는 사업을 할 것이다.
하지만 고시든, 사업이든, 사실은 우리 둘 다 우리가 진정한 화가가 되기 위한 밑작업일 뿐이다.
김태민은 선생님이 돼서, 사랑하는 사람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면 정말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나는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세상에 충분히 보답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도 나만을 위한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우리의 두 번째 승부가 다시 펼쳐질 지도 모른다.
물론 두 번 째 승부에선 절대 김태민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엔 내가 봐줘서 무승부.'
물론 작품 개수로만 무승부.
게다가 김태민은 자기가 나와 겨뤘다는 사실을 끝까지 모른다.
어쨌거나 비록 혼자 한 경쟁이긴 하지만, 김태민과 겨룰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나 이주원, 한국 미술계의 대들보와 1대 1로 겨뤘던 남자다!'
내 최고의 친구이자, 라이벌.
그리고 내 그림 스승이자, 목표.
우리의 졸업을 축하해야겠다.
* * *
10월 졸전 평가가 끝나고 나는 한숨 돌렸다.
그래서 그동안 미뤘던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원 디자인에 출근해서 새로운 디자인들을 뽑았다.
그때 유나에게 연락이 왔다.
"오후에 강남으로 와줄 수 있어?"
응? 거긴 왜?
나야 부르면 가야지.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유나가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유나의 일을 많이 줄이긴 했지만, 유나도 학교가 바쁘지 않은 날엔 꾸준히 출근해서 같이 일하곤 했었다.
'강남에 무슨 일이지?'
나는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시간에 맞춰 유나를 만나러 갔다.
"여기야, 주원아!"
어랏?
유나가 손을 흔든 곳은 수입차 매장 앞이었다.
그런데 유나만 있는 게 아니라, 정장을 입은 영업사원이 유나 옆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간 내게 유나가 웃으며 말했다.
"주원아, 내가 너 차 사줄게."
"응? 나 차 있는데?"
"오래 탔잖아. 그리고 짐 싣는 차잖아. 넌 언제나 돈 벌어서 어머니랑, 나랑, 내 동생들만 챙겼잖아. 그러니까 졸업 선물로 이 누나가 한 턱 쏠게. 네가 타고 싶은 차, 맘껏 골라봐."
참고로 유나는 모든 자산 관리를 내게 맡겼다.
그래도 나는 만일을 대비해 유나가 언제든 쓸 수 있는 비상금 통장을 마련해줬다.
그리고 매달 월급까지 지급했는데, 유나는 늘 여학생만큼만 썼다.
그러니까 유나의 통장에도 꽤 거액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으악.'
이주원 인생에 수입차 매장에서 마음껏 고르라고 하는 여자를 만나다니!
게다가 엄청 예쁘기까지 하다니!
역시 기회가 있다면 회귀는 꼭 하고 볼 일이다.
하지만 미안.
고급 수입차는 촌놈 이주원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유나의 손을 붙잡고 잠시 매장 바깥으로 나왔다.
"유나야."
"응?"
자기가 준비한 선물에 스스로 뿌듯했는지, 유나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진짜, 고마워. 그런데 미안. 마음만 받을게."
"그럴 줄 알았다. 괜찮아. 너 많이 벌잖아. 안심하고 하나 골라. 넌 열심히 사니까, 가끔 사치 부려도 돼."
"사치라면 매일 부리고 있어."
"응? 네가?"
"좋아하는 공부를 4년이나 했고, 과분한 여자 친구를 5년이나 사귀었잖아. 너랑 사귀는 게 매일 나한테는 최고의 사치야."
"뭐야, 그게."
"진짜 마음만 받을게. 아직은 나를 위해 많은 돈은 쓰고 싶지 않아."
그건 내 진심이었다.
"그리고 요즘 국산차도 좋아."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래도 유나는 뽀로통한 표정.
모처럼 선물하려고 큰맘 먹었는데 내가 거절해서 김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직원 아저씨가 엄청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
그거야 뭐.
영업 직원에게 그런 일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유나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살짝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 맞다. 유나야. 아버님은 차를 얼마나 타셨어?"
"우리 아빠 차? 글쎄. 내가 고등학교 때 바꾸셨나? 잘 모르겠네."
"아버님 차는 어떤 기종이야?"
"우리 아빠 차? 몰라. 흰색인데."
원래 차를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 차에 별 관심이 없는 건지.
'아버지 차는 잘 모르면서, 남자 친구에게 수입차를 사주려고 하다니.'
이걸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아니면 역시 자식은 키워봤자 다 소용없는 것인가?
살짝 웃음이 나긴 했다.
"그럼 아버님 차를 바꿔드리자. 어차피 아버님 뵈러 갈 때 선물은 뭐 드려야 하나 고민했었거든."
"우리 아빠 차?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아빠를 왜 만나러 가?"
"그야, 이제 졸업이니까. 널 달라고 말씀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