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장마 □
우리는 한가롭고 즐거운 거제도의 여름을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집 앞 연못에서 차가운 안개가 자욱이 피어나 주위를 뒤덮었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
그럼 난 하얀 안개를 가르고 연못에 가서 미리 던져둔 통발을 확인한다.
통발엔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데, 그 중 몇 마리만 꺼내고 전부 놔준다.
"옜다. 이 녀석들."
아침에 집 밖에 나가면 벌써 고양이들이 앵앵 거리며 발 옆에서 뒹굴고 난리를 피운다.
잡은 물고기들을 고양이들에게 던져주면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고양이 밥그릇도 사료로 채워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설렁설렁 아침을 만들고 있으면 유나가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같이 아침을 먹었다.
낮 동안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지면 거제의 시가지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주위를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웃고 떠드는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여름이지만, 산과 바다의 바람은 무척 시원했다.
"같이 살아보는 건 또 다른 것 같아. 너도 좋지? 내가 매일 아침도 챙겨주고. 집 밖엔 고양이도 있고."
"좋긴 한데, 나는 그냥 네가 소원이라고 해서."
역시 유나.
하지만 우리는 오래 된 커플.
상대가 말하는 방식도 알고, 내가 하는 말이 서로에게 어떻게 들릴 지도 안다.
그리고 서로의 감정을 믿었고, 또 상대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리란 것도 믿는다.
이번 한 달은 우리에게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졸업 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한 숟가락 맛보기였다.
같이 그림을 그리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밤에는 살을 맞대고 잠드는 그런 삶.
'결혼이 집이라면 이번 한 달은 모델하우스.'
동물병원에도 갔다.
몽키는 나이가 많았고, 세리는 몸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
몽키가 약해서 길고양이들에게 공격을 자주 받았는데, 그걸 매번 세리가 대신 싸워주니까, 집 주위에서 세리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양이 울음이 들릴 때마다 유나가 후다닥 달려 나가 세리와 싸우는 고양이들을 쫓아내곤 했다.
"나는 고양이 파수꾼이야. 에휴. 그런데 우리가 서울 가면 얘들은 어떻게 지낼까?"
유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두 마리를 차에 싣고 동물 병원에 간 것이다.
병원에 가기 전 우리는 두 마리를 붙잡고 정원에서 목욕도 시켰다.
"으악! 이 놈들아, 좀 가만히 있으라고!"
사람 손을 탄 몽키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세리는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덕분에 유나와 나는 손을 긁히고 물리고, 샴푸 거품을 뒤집어쓰며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간 동물병원.
"두 마리 다 길고양이치고는 건강해요. 피부도 깨끗한 편이고요. 구충제와 영양제를 처방해드릴게요. 사료에 같이 섞어서 먹이시면 돼요."
"혹시, 혹시 말인데요. 우리가 얘들을 집에 데려가서 기를 수 있을까요?"
유나가 조심스레 묻자, 수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힘들 거예요. 몽키도 그렇고, 특히 세리. 밖에서 성체까지 자란 고양이를 집에서 기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냥 머무시는 동안 잘 돌봐주세요."
고양이 모녀의 사정을 들은 수의사는 이것저것 간식까지 한아름 챙겨줬다.
그렇게 우린 한동안 걱정이라곤 고양이 정도 밖에 없는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다.
* * *
톡, 톡, 토독.
저녁.
유나와 함께 텐트에 누워, 랜턴 불빛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텐트 위에서 토도독 소리가 들렸다.
유나가 텐트 천장을 올려보며 말했다.
"비 오나봐."
토독토독.
듣기 좋은 물방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주원아. 이 텐트 비 와도 안전하게 잘 펼친 것 맞지?"
"처음 설치해본 텐트라서 확신은 없는데······"
유나는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빗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
그리고 우린 나란히 누워서 텐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텐트 밖에 작은 그림자 두 개가 다가오더니 텐트를 발로 두드렸다.
두 마리 고양이였다.
원래 우리만 보면 다가와서 앵앵 거리긴 했지만, 밖에 비가 오니까 더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텐트 문을 열자 흙탕물이 튄 고양이들이 자기 멋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으으, 힘들게 목욕시켜 놨더니."
유나는 이를 악물고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울상을 지었다.
어차피 마음 편히 여행 온 거라, 텐트나 옷이 더러워져도 아무 상관없었다.
유나와 나는 누워서 빗소리를 듣고, 고양이들은 멋대로 텐트 안을 뒹굴었다.
"주원아."
"응?"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조금도 상상 못했어."
유나가 그렇게 말해서 뿌듯했다.
텐트 안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으니 온갖 잡생각과 걱정들이 전부 비에 씻겨 떠내려갔다.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땐 비가 오는 게 참 싫었는데.'
여름에 갑자기 비가 오면, 와이셔츠는 땀과 비에 달라붙고.
구두와 양말, 바지 끝은 흙탕물에 축축해지고.
정신없이 굴다가 우산을 놓고 내리기도 일쑤.
그래서 아침에 날씨를 확인하고 비소식이 있으면 짜증부터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은 비인데도 너무 달랐다.
텐트 바깥으로 흐르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저 이 순간이 감사하게 여겨졌다.
유나는 나처럼 비에 집중하고 있었고, 비 맞은 고양이들은 발치에서 사부작거렸다.
"유나야, 안되겠다. 집으로 피신하자."
"그래, 네가 세리를 잡아."
그렇게 우린 키득거리면서, 두 마리 고양이와 책과 랜턴을 들고 집안으로 뛰었다.
비는 며칠 동안 계속 내렸다.
유나는 비 내리는 풍경을 사진 찍고, 스케치 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비를 흠뻑 맞아보기도 했다.
그럼 나는 같이 비를 맞으며 유나를 사진 찍었다.
아무도 안 보는 산 속이니까 우린 뭘 하든 자유였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면, 잠시 그림은 내려두고 침대에서 게으르게 뒹굴며 유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시한 잡담들부터, 그림 이야기.
가끔은 미래에 대한 계획들까지.
거의 매일 보는 사이인데 왜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하루는 내가 씩씩하게 선언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내가 매일 오후에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아이들 쑥쑥 크라고 매일 안마도 해줄게. 회사 대표의 특권이랄까."
"네가 일찍 퇴근한다고? 이제까지 들은 네 농담 중에 제일 웃긴데."
원래 유나는 결혼이나 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김칫국 마시지 말라며 나를 놀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재산분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자포자기를 한 것인지.
이제 슬슬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네가 고양이한테 하는 걸 보니까 아빠 노릇 잘하긴 하겠다. 그런데 기저귀는 별로 믿음이 안가. 넌 특히 어설픈 구석도 많아서······"
"아니야. 기저귀는 잘 갈 수 있어."
"나도 가족은 많은 게 좋아. 하지만 아이 기르는 건 정말 힘드니까. 그런데 네가 정말 그렇게 아이 돌보기를 잘 도와줄 수 있으면, 음······한 번 보자. 몇 명이나······"
이거다!
난 유나에게 외쳤다.
"너! 약속한 거다. 내가 잘 도와주면 가족은 가능한 많이!"
유나는 여전히 믿음이 안 가는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코를 만지며 씨익 음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노력상점!
그렇게 우리 즐겁게 지내며 실컷 그림도 그렸다.
하나씩 10월 평가에 제출할 작품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아주, 아주,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유익한 날들이었다.
* * *
장마도 끝나고, 그림도 꽤 많이 그린 어느 날.
이제 한 달도 끝났지만, 유현이의 활약 덕분에 우린 열흘간 집을 더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유나가 내게 말했다.
"여기 너무 있었더니 친구들이 슬슬 그립다. 넌 안 그래?"
"나도 좀."
"우리 친구들 다 불러서 파티하면 어떨까? 여기 경치도 좋고, 근처에 바다도 있고, 계곡도 있으니까 다들 놀기도 좋잖아. 장 봐서 미리 요리도 만들어두고. 졸업 전에 마지막으로 엠티 느낌 내볼까?"
유나도 아직 어린 소녀라서, 은근히 변덕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때론 혼자 있는 걸 좋아했지만, 때론 왁자지껄 시끄러운 걸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
슬슬 김태민도 보고 싶고, 한철이와 형원 선배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 괜찮아?"
"뭐가?"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나랑 한 달이나 같이 산 걸 말하면 조금······"
"아, 괜찮아. 어차피 너랑 헤어지지도 못한다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나는 이제 정말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주 바람직한 자포자기의 정신이었다.
"그래, 그럼 전화 해보자. 거제도가 멀긴 하지만, 부산에서도 가까우니까 오기가 힘들진 않을 거야."
그렇게 주우욱, 이주원 패밀리에게 전화를 돌렸다.
친구들에게 다 전화를 걸기도 전에 이미 소문이 퍼져서 모두 오겠다고 대답했다.
다만 한철이의 여자 친구인 윤상미는 여름방학 입시 특강을 맡아서 올 수 없었다.
윤상미 말고는 형원 선배, 이정원, 정화 선배까지 전부 다 빠짐없이 참석 선언.
그리고 우린 시장에 가서 카니발 가득 장을 봐왔다.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약한 불에 랍스터를 구웠고, 또 부엌의 찜통에선 대게를 쪘다.
삶은 문어도 큰 녀석으로 한 마리 사와서 썰었고, 회도 여러 접시 준비했다.
술도 박스로 사서 냉장고를 빈틈 없이 채워두고.
잡채도 만들고, 갈비찜을 만들고, 해물탕도 끓였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자 마당의 고양이들이 미쳐 날뛰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여어, 이주원! 우리가 왔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온 한철이.
집구석에 박혀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늘 바쁜 형원 선배.
본격적인 영화 촬영에 들어간 수진 선배.
그리고 수진 선배에게 모든 일정을 맞춰서 뜬금없이 같이 바빠진 김태민.
우리가 노는 동안 대신 회사 일을 해주느라 바빠진 정화 선배도.
친구들 모두 우리의 거제도 산장에 도착했다.
"언니! 여기서 계속 그림 그리신 거예요? 안 그래도 잘 그리시는데, 이런 곳에서 그리면 정말 그림이 잘 나오겠어요!"
새로 패밀리에 영입된 이정원.
이정원은 형원 선배에게 따졌다.
"오빠! 오빠는 왜 이런 생각 못했어요? 시골집 빌려서 오빠는 글 쓰고, 나는 그림 그리면, 그럼 얼마나 좋아요? 주원 오빠 보고 좀 배워요!"
세상 모두를 말로 찍어 누를 수 있는 형원 선배였지만, 이정원한테는 잡혀 살고 있었다.
"주원아, 이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미리 공유 좀 해주지 그랬냐."
죄송해요, 형.
형이 정원이한테 야단맞을수록 유나가 뿌듯해 해요.
내 남자친구는 다르다면서.
"한철아, 오느라 힘들었지?"
"아니야. 사무실에서 일하다 모처럼 시골 오니까 살 것 같다. 여기 오니까 꼭 우리 1학년 때 엠티 갔던 생각난다. 그땐 모든 엠티가 다 재미있는 줄 알았지."
"아니야. 우리 엠티라서 재미있는 거야."
"맞아. 이제 너희 졸업하면 대학 엠티도 끝이구나. 우리가 벌써 졸업이라니."
직장인 한철이는 벌써 아재스러운 말투를 뱉어냈다.
앗!
이럴 수가!
중년 회귀자인 내가 한철이를 아재라고 느끼다니!
'놀라운 발전이야.'
스스로가 대견했다.
지난 한 달간의 꿀처럼 달콤한 합숙으로 내게 각인된 중년의 허물에서 조금 탈피한 것이었다.
'이제부턴 지금 이곳에 있는 스물여섯 살의 이주원이 진짜 이주원이야.'
김태민과 수진 선배한테도 인사했다.
김태민이 벌써 고양이들에 정신이 팔려 내게 집중하지 않은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수진 누나, 촬영 중에 쉬겠다고 하니까 뭐라 안 그래요?"
"제작자한테 초대받았다니까 빨리 가보라고 하던데?"
"그래요?"
"농담이야. 내 여름 촬영은 벌써 끝났어."
그렇게 우린 우리들의 마지막 학창시절 파티를 열었다.
튜브를 가지고 계곡도 가고.
고기도 먹고, 회도 먹고, 소세지도 먹고, 랍스터도 먹고.
먹고, 먹고 또 먹고.
밤부터 아침까지 쉬지 않고 마시고.
모처럼 오랜만에 마피아 게임도 했다.
"범인은 바로 이형원!"
"아, 오빠! 잘 좀 해 봐요!"
그렇게 3일 간의 파티를 끝내고.
친구들은 먼저 서울로 떠나고, 유나와 나는 이틀을 더 묵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든 짐들을 차에 싣고, 다시 텅 빈 집에서 잠시 집주인을 기다렸다.
고양이들은 이별을 아는지 슬프게 웅웅 거렸다.
유나는 몽키를 무릎에 올려두고 내게 말했다.
"주원아."
"응?"
"멋진 여름방학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소중했어."
우왕.
유나가 내게 이런 특급 칭찬을 해주다니.
"그럼 내 소원권은 그냥 복구해주면 안 돼? 네가 그렇게 만족스러웠다니까, 이건 그냥 우리가 같이 휴가 보낸 걸로 하고. 나는 다시 새로 소원 비는 걸로."
"웃기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