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복수 □
"처음엔 자신이 없어서 색을 연하게 찍었습니다. 하지만 색을 차곡차곡 조금씩 쌓다보니, 색 안에 담긴 표정이나 느낌, 의미들을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작품부터는 일부러 한 번에 찍을 수 있는 색도 두 번, 세 번에 나눠찍었습니다. 물론 그만큼 실패할 확률도 높아지고, 몸도 힘들었지만······(그 만큼 제가 더 열심히 했으니 어서 칭찬해주세요, 교수님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는 솔직하게 내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교수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작품만으로 이렇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발로 뛰어다니며 그려서 돋보이는 작품.'
'참신한 시도가 즐거운 작품'
이런 칭찬들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4학년.
정말 작품 자체가 괜찮다는 칭찬을 들을 때가 되었다.
아무튼.
"흠, 흠."
할 말이 있는지 윤성례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안경을 만지며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네가 이 정도 작품을 가져올 줄 몰랐어. 상당히 괜찮고, 음······그래. 네가 처음 교수실에서 여자 친구를 그리겠다고 했을 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었지. 만약 이런 작품을 가져올 줄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다. 잘했다. 수고 많았다."
뜻밖에 윤성례 교수가 쿨하게 인정했다.
너무 쿨해서 치사하게 작품을 감춰왔던 내가 오히려 죄송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도 진심을 담아 꾸벅 윤성례 교수를 향해 인사했다.
윤성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말을 보탰다.
"이 판화 세 점은 그대로 졸전에 걸어도 될 것 같다. 그래도 놀지 말고 방학 동안 다른 작업에도 도전해 보도록. 다른 작품은 어떨지 더 보고 싶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 바로 졸전에 걸어도 되겠다.]
이 말이 평범해 보여도,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이다.
'십분 전까지만 해도 윤성례 교수를 무찌르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는데.'
몇 마디 칭찬에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나를 알아주는 위대한 교수님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세상에서 윤성례 교수가 제일 좋았다.
'꼬맹이 회귀자야. 넌 아직 멀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넘어가서야······'
속으로 내가 웃길 정도였다.
서춘일 교수의 목소리도 다시 들렸다.
"맞아요. 나도 놀랐습니다. 이 정도 목판이라면 정말 고생이 많았을 텐데. 하지만 윤선생님, 우리가 이런 재미로 교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곳에서 학생들이 우리들을 놀라게 해줄 때, 그때가 제일 가르치는 보람이 있죠."
"맞습니다.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그렇게 푸근하게 칭찬을 받으면서 기분 좋게 내 평가를 끝냈다.
'6월 평가? 별거 없군. 내가 이주원이다.'
나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개선장군처럼 유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유나가 딴 곳을 보며 슬쩍 내 손등을 꼬집었다.
아마 자기 몰래 자기를 판화로 찍었다고 야단 반.
또 발표를 잘했다고 칭찬 반인 것 같았다.
별로 아프진 않았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공들여서 자기를 찍어줬으니까, 앞으로 며칠 동안은 나한테 좀 덜 사납게 굴겠지.'
평가를 잘 마쳤더니, 계속 웃음이 났다.
그렇게 몇 번의 차례가 끝나고 드디어 김태민의 차례가 되었다.
과연 김태민도 윤성례 교수를 무찌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 번 좀비로 변할 것인가?
두두두두두.
옆으로 슬쩍 쳐다보니 수진 선배가 두 손을 꼭 모으고 마치 자기가 평가 받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자, 다음!"
드디어 김태민이 교수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김태민은 손에 살짝 큰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들과 김태민이 멀뚱멀뚱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너, 그림 그린다고 하지 않았었나? 왜 작품을 안 가져왔지? 설마 완성하지 못했나?"
김태민도 나처럼 위장 작전을 썼다.
그래서 유화를 그리겠다고 거짓 상담을 받은 것이었다.
"저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뭐야? 너도 다른 작품을 한 거야? 오늘 학생들이 단체로 다들 왜 이래?"
강영 교수가 투덜댔다.
그리고 김태민은 서류 봉투를 열고 그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김태민은 자기가 찍은 동판화를 엮어서 책을 만들었다.
동판화는 염산으로 부식시켜서 새기니까, 목판화에 비해 훨씬 많은 작품이 가능했다.
그래서 하나로 엮어 책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태민이도 참, 배운 것을 착실히 써먹는 성격이야.'
팝업북도 만든 적이 있고, 3학년 과제로 책 만들기를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김태민은 책으로 만드는 것에 익숙했다.
김태민은 서류 봉투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 교수들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말했다.
"저는 제 여자 친구를 동판화로 찍어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이수진과 고양이에 관한 책'입니다."
그 말을 듣고 윤성례 교수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분명 둘 다 자기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놓고 둘을 합쳐서 한 작품을 만들다니.
'요 녀석들이 진짜.'
그리고 김태민이 내민 책을 받아서 첫 장을 넘겼다.
그런데 억.
맙소사.
윤성례 교수는 오늘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김태민이 가져온 책은 두 권 뿐이었다.
교수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다가가 같이 책을 봤다.
교수들이 당황해서 책장을 넘기자, 책 내용이 궁금한 학생들이 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태민은 여전히 뻘쭘하게 서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허, 허허. 허허허허."
먼저 이준성 교수가 허탈하게 웃어댔다.
"허허허."
그리고 다음은 서춘일 교수.
강영 교수도 어이가 없다는 같이 웃었다.
어떤 교수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봤던 책을 다시 처음부터 다시 보기도 했다.
"내 참. 오늘 진짜 할 말이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교수 하나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곧바로 동의했다.
그렇게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첫 감평이 나왔다.
"하아아아아."
먼저 서춘일 교수가 길게 한숨을 뱉고 나서 말을 시작했다.
"내가 작가 생활을 사십 년. 교수를 이십 년 넘게 했는데, 나한테 펜을 하나 주고 이렇게 책을 그리라고 하면 난 못할 것 같아. 이건 뭐······"
서춘일 교수는 거기까지 말하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강영 교수가 평가를 이었다.
"동판화의 느낌이 참 좋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책이 끝나지 않고 계속 다음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판화의 색이 바랜 느낌과 책이라는 선택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 마치 옛날 동화책을 보는 기분도 들고, 아주 훌륭했다."
"이게······서춘일 선생님이 학생들을 제대로 야단치라고 나를 불렀는데, 이거 야단치기는커녕."
이건 이준성 교수.
교수들이 잇따라 패배를 인정하고 평가 불가를 선언했다.
그리고 드디어 윤성례 교수.
"잘했다. 어떻게 이런······"
윤성례 교수도 어이가 없는지 여기까지 말하고 몇 번 망설였다.
그리곤 다시 덧붙였다.
"학생 작업에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데,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작품 자체도 좋고, 네가 고민하고 노력한 부분도 돋보인다. 그래. 내가 너한테도 여자 친구를 그리지 말라고 말했었지. 내 실수였다. 인정하마. 수고 많았다."
마침내 윤성례 교수까지 패배를 선언했다.
그러자 김태민도 허리를 펴고 조금 의젓하게 섰다.
학우 여러분, 모두 보셨습니까?
제 친구입니다.
괜히 나까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걸걸한 이준성 교수의 목소리가 평가장에 깔렸다.
모든 교수들이 패배를 선언한 지금 이준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왠지 살짝 불안한 느낌.
'오늘따라 이준성이 조금 예리했어.'
나와 같은 생각인지 김태민도 긴장한 눈치였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이수진과 고양이에 관한 책'이군."
"그렇습니다······만?"
"심지어 이 판화는 누가 봐도 딱 이수진이군."
에칭 판화는 예리하고 정교하게 나온다.
그래서 김태민의 드로잉 실력을 온전히 품어냈다.
덕분에 정말 누가 봐도 수진 선배였다.
그런데 이준성은 다들 아는 이야기를 왜 두 번이나 확인하는 걸까?
"졸업 전시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가지. 그리고 오래오래 기록이 남을 거야. 도록을 챙겨가는 사람도 많을 거고. 그런데 괜찮겠나? 작품에 이렇게 이름까지 넣었다가, 나중에 두 사람 헤어지기라도 하면 아주 많이 민망할 텐데."
김태민의 성격을 아는 이준성 교수가 김태민을 놀리려는 것이었다.
안 돼. 태민아. 당황하지 마!
하지만 김태민은 곧바로 걸려들었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저, 절대 안 헤어질 겁니다!"
김태민의 외침에 강당의 학생과 교수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이준성.
질 때 지더라도 최소한의 반격은 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저렇게 선언해버리면 수진 선배는 부끄러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도 뭔가를 했어야 했나?'
왠지 작품에서는 비겼는데, 퍼포먼스에서는 내가 진 기분이었다.
김태민을 한 번 이기는 게 진짜 쉽지가 않았다.
'내가 도시락을 싸서 날랐을 때, 형원 선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역시 예술이란 타인의 시선으로 볼 줄 아는 마음가짐이었다.
아무튼.
김태민의 활약 덕분에 6월 평가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되었다.
물론 몇 명 울기도 했고, 몇 명은 교수들한테 심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원 패밀리 네 명은 모두 무사히 넘어갔다.
'심지어 김대성까지······'
어쨌거나 나만 아니면 되니까.
한국대 서양화과는 원래 개인주의다.
이정원은 적당히 깨지긴 했지만, 오히려 형원 선배가 위로해줄 찬스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질테니까.
형원 선배의 편인 내 입장에서는 마냥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오전부터 시작했던 긴 평가는 오후 늦게서야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저녁 식사 겸 졸업반 회식이 이어졌다.
* * *
회식엔 교수들도 참석했다.
젊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미대생이라 그런 건지.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울고불고 했던 학생들이지만, 회식이 시작되자 모두 웃고 떠들며 마셔댔다.
교수나 학생이나 모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회식 자리에선 또 즐겁게 어울렸다.
이번 졸전의 총괄 감독인 강영 교수가 잔을 들고 외쳤다.
"자,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다. 전부 졸전을 위해 그런 거니까, 혹시 서운했던 학생들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도록. 그리고 그만큼 방학동안 작품에 매진하도록!"
우린 선술집 하나를 예약해서 모두 즐겁게 마셔댔다.
회식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나는 소주병을 들고 윤성례 교수의 자리로 옮겼다.
"교수님 제 잔도 한 잔 받으시죠."
"싫어. 난 오늘 치 술 다 마셨어."
난 간절한 눈빛으로 윤성례 교수를 바라봤다.
"으이그. 그래, 따라 봐."
내 눈빛이 통하다니!
역시 윤성례 교수님이 최고였다.
나는 콸콸콸 윤성례 교수의 잔을 채웠다.
"그래,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짠.
우린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원샷.
크으.
술이 쎈 편은 아닌지, 윤성례 교수는 잔을 비우고는 오만상을 다 썼다.
그런데 그때.
내 뒤에서 김태민이 등장했다.
김태민의 손에도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교수님 제 잔도······"
"이것들이 진짜! 한 번에 왔어야지!"
김태민과 나.
서양화과의 훈남 2인조.
그리고 뒤끝 있는 남자들.
평가에서 인정받는 것으론 부족하다.
소주까지 한 잔 먹여야 우리의 복수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 * *
그렇게 1학기가 마무리 되었다.
졸전 평가가 끝났으니 1학기 실기 수업은 다 끝난 것이다.
그리고 두어 개 남은 이론 수업 기말고사만 끝나면 4학년 1학기도 끝나는 것이다.
그럼 여름 방학.
아마도 대학생으로 보내는 마지막 방학일 것이다.
회식이 끝나고 유나와 나는 집으로 걸어갔다.
여름밤은 시원했고, 평가도 끝나서 마음도 홀가분했다.
유나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오랫동안 내 안에 담아두었던 말을 유나에게 꺼냈다.
"유나야, 할 말이 있어."
"뭔데?"
"나 소원권 하나 남은 거 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유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짜 이 좀생이 녀석! 그래, 이번엔 또 뭐야! 어디 들어나 보자!"
그래, 마음껏 욕하고 소리 질러라.
소원 하나를 이루는데 그게 대수일까.
후후후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