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차 평가 □
"저는 영화 시나리오 같은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시나리오에는 대사 앞에 배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를 내리는 지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지문은 강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수들 앞에서 또박또박 수진 선배가 발표를 시작했다.
예전엔 어설프고 많이 긴장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이제 영화도 몇 편 찍어봤으니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많이 익숙할 것이다.
게다가 미대생의 자신감은 작품에서 나온다.
오늘 수진 선배가 가져온 작품은 상당히 괜찮았고, 사전에 교수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수진 선배는 똑똑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열 명의 배우가 똑같은 지문을 읽고 다 다른 연기를 펼칩니다. 시나리오 전체도 그렇습니다. 같은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들은 각기 다른 장면을 상상합니다. 저는 그 점을 그림에 적용해 볼 순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눈앞의 그림에서 관객들이 각기 다른 장면을 볼 수는 없을까. 그래서 지문이 같이 적힌 그림을 그렸습니다."
끄덕끄덕.
수진 선배의 마력은 교수들에게도 통했다.
오늘 학생들을 괴롭히려고 벼르고 온 사람들인데,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김대성한테 당황했던 교수들이 힐링 받는 느낌이었다.
"재밌군. 그림도 지문도 과하지 않게 적절한 게 보기 좋네요. 발상도 신선하고, 고민도 많이 한 게 느껴집니다."
"작가와 잘 어울리는 청순한 느낌이야. 작품과 작가가 완전히 따로 놀면 감동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거든. 그런데 자기 느낌을 잘 살렸어."
"자네 보러오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정도면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어. 다만 작품의 크기가 크지 않은 만큼, 몇 개 더 준비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칭찬일색.
수진 선배는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스타트가 좋았다.
과연 이 분위기는 계속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폭풍 전의 고요일까?
"그래, 다음!"
다음은 바로 유나였다.
한유나.
한씨라서 1학년 출석부의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두근두근.
과연 유나는 잘 해낼 것인가?
당사자도 아닌 내가 더 떨리는 것 같았다.
유나는 50호 캔버스 하나를 교수들 앞에 걸었다.
심지어 유화 물감이 아직 마르지도 않아서 유나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림을 걸고, 손에 물감이 묻었는지, 유나는 양손을 뒤로 감췄다.
"저는 어린 시절 제가 살던 곳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이 이것 하나뿐인가?"
8명의 교수 중 하나가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따지듯 물었다.
보통 다른 학생들은 적어도 두 점.
많으면 네 점까지도 가져왔다.
하지만 유나는 달랑 한 점.
그림의 질을 떠나 양이 너무 모자랐다.
"네, 이것 한 점 뿐입니다."
"심지어 마르지도 않았군. 한 학기 동안 대체 뭘 한 건가? 그림 자체는 흠······"
그림이 한 점이라고 유나를 나무라던 교수가 이제야 비로소 유나의 그림을 제대로 살펴봤다.
은은한 회색의 작은 도시 풍경.
여름쯤일까?
회색 하늘과 회색 건물 사이에 군데군데 녹색이 보였다.
낮게 깔린 구름.
천천히 부는 축축한 바람.
누구나 어디서나 한 번 쯤 봤을 법한 풍경이었다.
그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림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가벼운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은 외롭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자연스레 그림 밖으로 전해졌다.
"그, 그림은 그림 자체는 흠······"
유나를 나무라던 교수는 뒤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했다.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고민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만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림 자체가 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야. 거칠기도 하고. 설마 미완성인가?"
"네, 약간 미완성입니다."
"한 학기 평가에 달랑 한 점, 그것도 미완성을 가져와?"
"지금 당장 억지로 완성하는 것보다는, 충분히 쉬고 나서 느긋하게 마무리하는 게 그림에게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교수의 지적 앞에 유나는 당당했다.
"음, 나도 동의해. 평가를 위해서 맘에 드는 그림을 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완성으로 검사받는 게 낫겠지. 오히려 난 높이 평가해."
강영 교수가 유나를 편들며 말했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몇 점 더 있지 않았나? 나는 그 작품들도 괜찮게 봤는데 왜 가져오지 않았지?"
"네, 실은 그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신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나의 대답에 이번엔 윤성례 교수가 끼어들었다.
"사진과 그림을 함께 건 작품이었지? 나도 좋게 봤었는데, 맘에 들지 않았다고? 난 오히려 그게 더 좋아 보이던데. 그 그림들과 이 그림의 차이가 뭐지?"
학생에게 제일 난감한 순간.
차라리 욕을 먹으면 뒤끝은 없지.
자기가 맘에 들지 않는 작품을 교수가 좋다고 하면, 미대생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어쩌면 그 혼란마저 배우는 과정의 일부겠지만.
하지만 오늘의 유나는 당당했다.
"맞습니다. 이제까지 교수님들께 검사 맡던 다른 작품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해서 그린 그림과 실제 찍은 사진을 같이 전시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작품을 구상한 것은 졸전에 그렇게 전시하면 그럴 듯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는 내내 제가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유나는 자기가 앞에 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를 최근까지 고민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젠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들, 잊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그립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림을 그리는 다른 이유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그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진과 같이 거는 작품은 졸업 전시를 위해 생각해낸 방식입니다. 그 방식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한 번 밖에 없는 졸전인 만큼, 제가 원래 그림을 그렸던 이유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유나는 당당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유나는 자신의 결심을 지키고 싶어서 교수들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새 그림을 걸었다.
그것도 미완성인 채로.
내 여자 친구지만 꽤 멋있고 섹시했다.
"하하, 교수들 입장에서 제일 난감한 학생이구만."
서춘일 교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리고 유나의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해마다 몇 명씩 꼭 이렇게 고집 부리는 친구들이 있어. 보통 그런 녀석들을 심하게 야단쳐놓으면 삐져서 졸업했다가 몇 년 만에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지. '그때 교수님 말씀을 듣기를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고집 부렸던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거립니다.' 그럼 난 속으로는 '내가 또 한 놈의 인생을 구제했구나', 그러면서 혼자 뿌듯해하지."
여기까지 말하고 서춘일 교수는 교수들을 돌아보며 이어갔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들어요. 이 정도 그림이면 고집 부릴 만 해. 이렇게 잘 그리는 친구가 고집을 부리면 오히려 응원을 해 줘야지. 난 이 그림이 마음에 듭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도 마음에 듭니다. 한 점 뿐이라 평가를 내리는 게 이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유나의 주력 지도 교수인 강영이 또 한 번 유나를 편 들었다.
"저도 마음에 듭니다. 1학년 때부터 줄곧 이 친구 그림을 봤습니다. 사진과 같이 걸기? 그것은 못 봤지만, 이 그림만으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방학이 끝나고 10월 평가 때, 이 그림 완성을 볼 수 있는 건가?"
이준성 교수도 유나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래. 계속 하고 싶은 걸 그려봐. 대신 방학이 끝나고 2학기 평가 땐 완성된 그림을 가져오게. 기대하겠네."
서춘일 교수까지 그렇게 응원하자 더 이상 유나의 그림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처형장 같은 6월 평가장.
유나는 그림 달랑 한 점으로, 심지어 그것도 미완성인채로 무사히 살아서 귀환한 것이다.
'후우······'
유나는 당당한데 오히려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나가 시작이었다.
유나 본인은 무사히 피해 갔지만, 유나 이후 화기애애하던 평가의 분위기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수들의 철퇴가 내려쳤다.
"자네, 졸업할 생각은 있는 건가?"
"저기 뒤에 1학년 학생들이 보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지는 않나?"
"혹시 학교 다니는 게 즐거운 건가? 그래서 몇 년 더 다니고 싶은 건가?"
"자네 아직 군대 안 갔지? 졸전 대신 입대 신청을 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교수들의 거침없는 난타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난타의 한 중간에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자, 다음. 이주원!"
나는 교실 뒤편에서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먼저 교수들을 한 번 슬쩍 훑어보았다.
내 이름을 듣고 빙긋 웃는 서춘일 교수.
사탕 하나를 까서 입안에 넣고, 동시에 녹차를 마시는 윤성례 교수.
마치 날 더 시원하게 물어뜯기 위해 이빨에 기름칠을 하는 것 같았다.
흐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짓는 이준성 교수.
그리고 벌써부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강영 교수.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추운 겨울 한국대 입시를 보러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전 1차 평가에 내가 서 있다니.
자, 한 번 시원하게 싸우고 오자고.
오늘은 자신이 있었다.
이날을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유나는 앞줄 의자에 앉아서 평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나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줬다.
남들 몰래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
나는 유나를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줬다.
'그래, 기대하라고. 오빠가 교수들하고 한 판 제대로 싸우고 올게.'
물론 유나는 이제까지 나를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른 적은 없다.
어쨌거나 자신감 충전.
강당 뒤의 후배님들. 똑똑히 보시게.
이것이 졸전 평가다!
이주원이 이곳을 평정하고 전설이 되겠다.
나는 내 작품들을 들고, 교수들 앞에 섰다.
'먼저 피규어 세 개.'
나는 공들여 만든 피규어를 강당 중앙의 책상에 올렸다.
조물조물 잘 만든 피규어 세 개.
여기까지 하고, 먼저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피규어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교수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와 피규어를 바라봤다.
훗.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반응.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지.
"아, 그리고 피규어만 하려니 뭔가 허전한 것 같아, '급히' 다른 작품도 만들어 봤습니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화판가방을 열고, 4절 판화 세 장을 꺼냈다.
세우기 쉽도록 미리 판넬을 붙여둔 판화를 하나씩, 일부러 천천히 이젤에 세웠다.
"그래도 제가 서양화과니까, 입체만 하면 아쉬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면도 한 번 시도해봤습니다. 이 작품들은 목판화입니다."
내가 가져온 세 점의 목판화.
한 점은 전에 말했듯 유나의 자취방이었다.
유나가 내게 차려준 작은 밥상.
그 옆에 앉아있는 유나.
두 번째는 우리가 영 아트 촬영을 할 때였다.
연극 무대를 만들고, 유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서 대본을 읽고 있었다.
'나는 유나가 뭔가에 집중할 때의 표정이 좋아.'
그리고 세 번째는 영국 여행 중 한 장면이었다.
우린 거리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었고, 유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국적인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의 도중이었고, 유나는 은근히 들떠 있었다.
나는 유나가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 순간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잠시 강당에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정적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어이, 뭐라고 좀 말 좀 해보세요.'
처음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정적이 점점 길어지자, 나도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유나의 표정을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나 쪽을 보는 것도 망설여졌다.
교수들은 물론, 유나에게도 첫 공개였다.
어떻게 보면 교수들보다 유나가 더 무서웠다.
"이리, 이리 가져와보게."
"네?"
서춘일 교수였다.
"목판은 그렇게 멀리서 봐서 제대로 알 수 없어. 가까이서 자세히 봐야지. 세 장 다 이리 가져와보게."
나는 앞에 세워둔 판화 세장을 걷어서 서춘일 교수에게 건넸다.
"저도, 저도 보고 싶습니다."
끝에 앉은 강영 교수가 말하자, 서춘일 교수가 웃으며 답했다.
"잠시 기다리시게. 뭘 그리 서두르시나."
서춘일 교수가 꼼꼼히 내 판화를 살펴본 후 옆 교수에게 넘겼다.
그런데 옆 교수들도 곧바로 판화를 넘기지 않고 한 장씩 제대로 살펴봤다.
"목판이라, 재밌군. 요즘 힘들다고 목판은 잘 안하던데, 졸전 평가에서 목판을 보는 건 또 오랜만이군요."
아까 유나를 지적했던 교수였다.
분위기가 좋은 건가?
흐흐흐흐.
그리고 이준성 교수가 징그럽게 웃었다.
제일 예상외의 반응은 윤성례 교수였다.
피식.
윤성례 교수가 내 판화들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런데 이주원."
"네?"
이준성이었다.
이준성 교수가 내 이름을 부르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판화가 몇 도씩이지?"
'도'란 색의 개수를 말한다.
판화는 한 번에 한 색만 찍을 수 있다.
한 목판화에 여러 색을 쓰기 위해서는 목판에 다른 물감을 발라서 다시 찍어야 한다.
그렇게 한 번 찍을 때마다 1도라고 한다.
그런데 색을 바꿀 때마다 매번 목판을 찍는 위치가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찍을 때마다 종이가 눌리고 손상된다.
또한 매번 색이 계속 중색 되니까, 때론 의도하지 않은 색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도수가 높아질수록 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한 점은 11도고, 다른 두 점은 12도입니다."
"12도라, 그렇다면 중간에 꽤 많이 실패도 했겠군."
"예, 뭐."
나는 피규어만 하려니 허전해서 목판을 준비했다는 컨셉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별 거 없었다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한 번 보자. 한 번 색을 찍으면 그 색이 다 말라야 다음 색을 찍을 수 있지. 그러니까 1도에 하루. 12도면 적어도 12일. 거기에 목판을 새기는 시간, 색을 고르는 시간. 이것저것 고려하면 판화 세 점이면 적어도 30일, 최소 한 달. 그런데 피규어만 하려니까 허전해서 다급히 준비했다고? 요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억.
이준성 교수님.
갑자기 쓸데없이 왜 이렇게 예리해지신 겁니까?
이준성 교수의 지적에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내 당황한 모습에 강당의 학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학생들이 웃자 교수들도 몇 명 같이 따라 웃었다.
"참, 내가 은퇴할 때가 되긴 했어."
웃음소리가 조금 진정되자 서춘일 교수가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살다살다 이제 졸전 평가에서 허세를 부리는 학생을 다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 놈이 웃기려고 아예 작정을 했군요."
이준성 교수가 맞장구치자, 잦아들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간간히 다시 터졌다.
'어어, 이게 아닌데.'
교수들을 압도하고, 칭찬의 폭풍을 받으며 멋있게 퇴장하고 싶었는데.
교수들을 웃겨버리다니.
이제 슬쩍 용기를 내서 유나 쪽도 바라봤다.
유나도 수진 선배, 김태민이랑 같이 웃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뭐, 일단 웃기면 절반은 성공이니까.'
그런데 그때 서춘일 교수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이 정도 판화면 조금 허세를 부려도 되지 않나. 허세를 부릴만한 작품이지 않나, 그런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유나 쪽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신기한 게, 얼굴을 제대로 새겨놓지도 않았어. 그런데 판화를 보니까 누구를 새긴 건지 다 알겠 단 말이야. 이런 게 재능이겠지. 안 그런가요? 오랜 만에 정말 재밌게 찍은 판화를 봤어."
서춘일 교수의 칭찬에 다른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내가?
고 2 겨울 방학 때 입시를 시작하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난 생까지 더하면 수십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미대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
그 재능이란 단어를 졸업을 반년 앞두고 듣다니.
그것도 가장 권위 있는 교수에게.
나도 사람이라 조금 기쁘긴 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아닐 거야.'
나는 맘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약 그렇게 재능이 있었다면 이렇게 발악하듯이 작품을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손가락이 퉁퉁 붓도록 목판을 새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나한테 정말 재능이 있다면.'
그건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아니라, 유나에 관한 재능일 것이다.
유나를 관찰하고, 남들은 모르는 표정을 발견하는 재능.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걸 간절히 작품에 담고 싶은 재능.
그래서 이 판화들이 괜찮아 보였을 것이다.
유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춘일 교수의 칭찬에 나는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일단 칭찬으로 시작했다.